돈키호테의 맛, 라 만차
인류가 창작한 최고의 소설을 선정할 때 늘 최정상의 위치에 자리 잡는 명작.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원 표기는 '돈 끼호테(Don Quixote)'지만 한국 사람에게 익숙한 '돈키호테'로 표기한다). 늙은 말 로시난테를 타고 돈키호테가 산초와 길을 떠난 곳이 스페인 미식기행 두 번째 지역인 '라 만차'이다.
라 만차 지역에 들어서면 "아! 이곳이 돈키호테의 고향이겠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끝없이 펼쳐진 평원, 초원을 떠도는 흰 점 같은 양 떼 무리, 살갗을 흩는 메마른 바람 냄새. 라 만차의 광활한 평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유 모를 먹먹함이 가슴에 차 오른다. 평온함과 황량함, 포근함과 적막함이 공존하는 라 만차의 대지 저 멀리서 돈키호테가 건들건들 나타날 것만 같다.
"어이. 라 만차에서 못 보던 친구인데. 어디서 왔는가?"
"한국에서요. 돈키호테 기사님은 어디로 가는 길인가요?"
"태양이 뜨고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으로.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만 인분의 피스토(피망 스튜)가 있는 인판테스요. 그곳의 피망 축제를 보러 가요"
스페인의 축제의 나라다. 부뇰의 토마토 축제, 팜플로나 산 페르민 축제의 소몰이 행사, 발렌시아의 불꽃 축제 같은 세계적인 축제 이외에도 스페인 전역 어디서든 건수만 있으면 축제가 열린다. 고추가 많으면 고추축제, 마늘 주산지면 마늘축제, 문어가 많이 잡히면 문어 축제 그리고 피망이 많이 나는 인판테스에서는 피망축제가 있다. 부뇰의 토마토 축제나 팜플로나의 소몰이 행사는 워낙 국제적인 축제라 세계인이 집합하지만 라 만차의 조그만 마을 인판테스의 피망축제는 전형적인 지역민들의 행사다. 그럼에도 필자는 토마토 축제보다 훨씬 강렬한 인상을 피망 축제에서 받았다.
인판테스 피망 축제의 메인이벤트는 만 인분의 피스토(피망스튜) 만들기다. 대형 무쇠팬에 장작불을 떼 피스토를 요리하고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과 나눠 먹는 것이다. 이 단순한 축제가 인상 깊었던 점은 지역 주민들이 축제를 즐기고 참여하는 방식 때문이다.
축제 전날이면 인판테스 동네 주민들은 삼삼오오 마을 창고로 모인다. 품에는 과도가 담긴 조그만 바구니가 안겨 있다. 만 인분 피스토의 주 재료가 되는 피망을 자르기 위해서다. 큰 창고 건물과 마당에 천여 명의 동네 주민들이 모여 앉아 피망을 자르며 수다도 떨고, 맥주도 마신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피망을 잘게 자르는 단순 작업을 하며 웃고 떠든다. 이 날을 위해 마드리드로, 바르셀로나로 유학을 갔던 청춘들도 작은 마을 인판테스 귀성길에 오른다. 고향 친구들과 함께 피망을 자르며 밤새 놀기 위해서다. 피망 자르기 덕분에 과도와 바구니만 있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마을 잔치가 열리는 것이다. 관의 주도나 개입은 없다. 시장도 평상복 입고 가족과 함께 피망을 자를 뿐이고, 행사는 오로지 지역 커뮤니티 주도로 진행된다. 스페인 말은 빠르고 경쾌하다. 천여 명이 한 데 모여 피망을 자르며 떠는 스페인어 수다는 꽤나 소란스럽다. 그리고 정겹다.
라 만차의 태양 빛은 직선이다. 어떤 굴절도 없이 내려 꽂힌다. 새벽 6시부터 피스토를 만들기를 위해 부지런을 떨지만 이내 라 만차의 태양과 만 인분 피스토를 끓이기 위한 장작불이 합쳐진다. 땀도 말라 버리는 햇살 아래 동네 아저씨들이 분주하다. 만 인분 피스토 조리사들 역시 지역 커뮤니티의 아저씨들이다. 2003년 축제가 시작된 이래 늘 참여하고 있는 만 인분 피스토 전용 요리사들이다.
재료는 단순하다. 피망, 돼지고기, 토마토, 올리브 오일, 소금이 전부다. 다민 양이 많다. 피망이 1.8톤, 토마토가 700kg, 돼지고기는 350kg, 올리브 오일과 소금이 각각 125리터, 21kg이 들어간다. 이 많은 양의 재료가 지름 4미터의 무쇠팬에서 5시간 동안 장작불로 조리된다. 끓이고, 타지 않게 젓고, 중간중간 간잽이 아저씨가 소금치고 간 맞추고 이 과정을 무한 반복한다. 라 만차의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올라타 있는 오후 2시. 인판테스 광장엔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피스토를 먹기 위해 길고 긴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이다.
피스토의 맛이 솔직히 대단하지는 않다. 피망과 돼지고기, 토마토를 넣고 푹 끓여낸 맛에서 특별함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대신 모두가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맛이다. 빵에 얹어 먹어도 좋고, 밥과 먹어도 좋을 맛이다. 와인이나 맥주와도 훌륭한 파트너다. 굳이 비교 하자면 자작자작 끓여낸 한국의 강된장과 흡사하다. 짭조름하고 구수한 맛이 편안하다. 이 맛 한 그릇을 위해서 라 만차의 뜨거운 태양 아래 수 천명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은 놀라운 광경이었다. 일회용 용기에 담긴 피스토 한 그릇이 이렇게까지 먹을 일일까라는 생각도 잠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가족들로, 친구들로 가득했다. 행사장 주변 작은 공원에 가족들이, 친구들이 모여 받아온 피스토에 챙겨 온 음식을 곁들여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인 필자에게 와인 한 잔과 피스토 한 그릇을 건넨다. 시끄러운 말 양념을 더해 피스토를 먹으니 한결 맛이 좋아진다. 피망 축제의 만 인분 피스토는 함께 먹어야 되는 음식이었다.
해가 질 때면 라 만차 들판은 주홍색 띠를 입는다. 아름다운 노을 저 편에서 비쩍 마른 아저씨가 늙은 말을 타고 다가온다.
"어때 친구 피망 축제는 즐거웠나? 피스토는 맛있었고?"
"따뜻한 맛. 훌륭했어요. 행복했고요"
"다행이군. 라 만차를 실컷 즐기다 가게나"
라 만차에서도 난 따스함을 맛보았다. 사람의 온기가 만들어 낸 맛. 스페인에서 만난 두 번째 맛에도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