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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미식기행-4

장쾌한 대서양의 맛, 갈리시아

by 조승연 PD

대서양과 마주하고 있는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의 날씨는 매섭다. 비외 바람이 빠르게 흐르는 구름에 실려 수시로 교차한다. 비 온 후 활짝 갠 갈리시아의 하늘은 어찌나 푸르른지. 뜨거운 태양의 지중해나 라 만차의 하늘과는 다른 장르다. 배경음으로 대서양의 장쾌한 파도 소리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장쾌하게.

스크린샷 2025-11-06 오후 8.58.48.png 갈리시아 지방 묵시아의 '죽음의 해안'과 '성모 마리아의 성소'

산티아고 순례자길 주요 코스 중 하나인 갈리시아 서해안의 작은 마을 묵시아(Muxia). 이 곳의 바다는 '죽음의 해안'이라 불리운다. 대서양을 마주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성소' 앞 해안에서 거친 파도가 바위와 부딪치며 내는 파열음은 시원함을 넘어 웅장함에 다다른다. 끝없이 이어지는 흰 포말과 바다의 파열음은 이 곳이 왜 '죽음의 해변'이라 불리우는지를 알려준다. 바람과 파도에 휩쓸려 묵시아 앞바다엔 수 많은 배들이 침몰했다고 한다. 이 때 수장된 인간의 육체를 자양분 삼아 몸집을 키웠다는 전설 속 어류가 묵시아에 있다. 보통 1.5m 정도의 크기에 3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스페인 붕장어, 꽁그리오(Congrio)다.


스크린샷 2025-11-06 오후 9.02.33.png 스페인 붕장어 꽁그리오(Congrio)

믿기지 않는 크기의 스페인 붕장어 꽁그리오. 맛도 믿기지 않는다. 40kg 가까이 나가는 붕장어 토막을 두껍게 썰어 소금만 뿌려 숯불에 올린다. 굽기 정도는 미디엄. 완성된 꽁그리오 숯불구이를 칼로 썰어 한 점. 기가 막히다. 생선 구이에서 이렇게 풍만한 육즙을 경험해 본 적이 있던가. 감칠맛 그 자체다. 붕장어 구이 특유의 기름진 맛은 희미한 흔적만 있다. 담백하고 깔끔한 살맛의 치감이 탱글하다. 어류는 클수록 맛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스페인 붕장어가 증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압도적인 맛이다. 하긴 이 정도 크기의 붕장어를 만난 적이 없으니 어찌 그 맛을 경험해 볼 수 있었을까. 묵시아의 바다에 감사할 뿐이다. 갈리시아 바다의 웅장함 속에는 거대한 맛이 있었다.


스크린샷 2025-11-06 오후 9.04.36.png 스페인 붕장어, 꽁그리오 숯불구이


이 맛을 오래 보존하려고 600년 전 묵시아 사람들은 덕장을 만들었다. 냉장시설이 없던 과거, 목숨 걸고 잡아온 꽁그리오를 썩혀 버릴 수는 없는 일. 살집이 두꺼워 보통 생선처럼 말리면 상해버리기에 꽁그리오 몸통에 칼로 구멍을 내서 덕장에 널어 말렸다. 큰 연 같아 보이는 스페인 붕장어가 해풍에 숙성, 건조되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는 법이 바뀌어 덕장에 말리는 꽁그리오는 볼 수가 없고 대신 말린 콩그리오 음식만 남아있다. 말린 콩그리오를 물에 불린 후 병아리콩, 달걀에 호두와 잣가루로 고소함을 더해서 한 소뜸 끌어낸다. 추운 겨울, 강한 바다와 맞서야 했던 묵시아 주민들에게 고단백질 보양식이었을 것이다. 구수한 맛이 들기름 넣고 푹 끓여낸 황태국과 많이 닮아있다.


풍만한 맛의 꽁그리오를 만날 수 있었음은 사나운 바다에 맞선 인간 노력의 결과일까, 아니면 묵시아 바다가 인간에게 허락한 선물일까. 묵시아 바다의 또 다른 진미 거북손 채취 현장을 보고 나니 궁금증이 더해졌다. 한국에서도 1박 2일과 삼시세끼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유명세를 얻은 거북손은 스페인에서는 고급 식재료다. 한 접시에 거북손 댓게 담아서 6~7만원이 넘는다. 소고기 보다 확실히 비싸다. 그럴만 하다. 목숨 걸고 따는 거북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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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바위에 붙어 사는 따개비류의 거북손 채취 과정은 파도와의 한 판 승부다. 갈리시아의 성난 파도는 쉴 새 없이 바위를 향해 돌진한다. 거북손을 따는 해남(갈리시아 거북손 채취는 대부분 남성이다)들은 센 파도가 오면 도망갔다, 물러나면 바위에 붙어 거북손 따기에 바쁘다. 이 과정을 몰려오는 큰 파도의 횟수만큼 반복한다. 파도에 휩쓸리면 그 순간으로 끝이고, 파도에 밀려 머리가 갯바위에 부딪쳐도 끝장이다. 끌로 거북손을 떼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노동에 극도의 긴장감이 더해진다. 도대체 거북손이 뭐길래 이 고생을 하는 걸까. 우선 돈이 된다. 도매가로 1kg에 20만원을 넘나든다. 왜 이토록 비싼 걸까? 맛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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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 표현이지만, 거북손은 대서양의 맛이다. 바위에 흡착하는 빨판 지지대의 속살을 먹는 거북손의 맛은 '이거다'라고 정의하기 어렵다. 조개와 오징어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듯한 식감과 맛이다. 껍질을 벗겨낼 땐 주홍색 육즙이 주르륵 흐른다. 병아리 눈물만큼의 거북손 육즙에 바다같이 넓은 감칠맛이 응축되어있다. 육즙이 쫄깃한 살에 부딪쳐 뿌려지는 맛의 포말이 입 안 가득하다. 갯바위 틈 속 거북손에서 진미를 발견한 인간의 식탐도 대단하고, 밀려오는 파도를 피해가며 대서양의 맛을 채취하는 사람도 대단하고, 이 작은 생물 속에 놀라운 맛을 담아 놓은 바다도 대단하다.


스페인 붕장어인 꽁그리오나 거북손이 갈리시아의 진귀한 맛이라면 대중적인 맛의 톱 스타는 이름도 귀여운 뽈뽀(Pulpo), 문어다. 스페인 전역에서 사랑받는 문어지만 갈리시아 지역엔 특별한 문어 요리가 있다. 한번 맛본 사람, 특히 한국인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맛이라는 '뽈뽀 아 페이라( Pulpo a Feira)'다. 삶은 문어 다리만 동글하게 잘라 소금, 피멘토(빨간 파프리카 가루)와 올리브유를 뿌리는 게 전부인데, 그 맛을 잊혀지지 않는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문어살의 구수한 감칠맛을 소금맛이 한 껏 끌어올려준다. 한국은 5분 정도 문어를 데쳐 쫄깃한 식감을 즐기지만, 스페인은 30분 이상 푹 삶고 10분 정도 뜸을 들인 후에 먹는다. 개인적으로 문어를 먹는 방식은 스페인의 것이 훨씬 낫다. 손을 멈출 수도 입을 뗄 수도 없다. 와인이나 맥주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스크린샷 2025-11-06 오후 9.11.49.png 뽈뽀 아 페이라(Pulpo a Feira)

갈리시아 일요일에 주말장이 열리거나 지역 축제에 먹거리 장터가 서면 그 중심엔 문어 포장마차가 있다. 식재료를 다룰 때 가위를 사용하지 않는 스페인이지만 '뽈뽀 아 페이라'를 조리할 땐 예외다. 가위로 묘기 부리듯 문어 다리를 잘라내는 모습은 아슬아슬 하면서 흥겹다. 우리네 장터에서 엿장수가 가위로 엿을 끊어내는 흥 그대로다. 그래서일까, 갈리시아 방언인 '뽈뽀 아 페이라'를 번역하면 '장터(Feira)의 문어(Pulp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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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며 꽁그리오, 거북손, 뽈뽀의 맛을 떠올리다 보니 결국엔 갈리시아의 장쾌한 바다가 보고 싶어진다. 답답한 가슴을 시원히 뚫어주던 푸르디 푸르던 파도 소리도. 격정적인 바다와 더불어 살며 진귀한 식재료를 채취하던 사람도, 그들 덕분에 그 바다 덕분에 맛볼 수 있었던 깊고 깊은 감칠맛도. 모두가 그리워진다. 맛있는 추억이 혀에 새롭게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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