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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여수의 동네 노포

조PD의 맛있는 이야기

by 조승연 PD

10월 중순. 짐을 싸서 여수로 향했다. 3주 간 스페인 촬영 내용을 편집할 시간이 필요했다. 영상 편집은 엉덩이 싸움이다.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얼마나 오래 모니터를 응시하는 가가 중요하지, 대단한 작업공간이 필요하진 않다. 그래도 새로운 환경에서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왜 그런 장면이 있지 않은가. 블로그나 유튜브 영상 썸네일에 노트북 하나 꺼내놓고 워라밸을 즐기는 젊은 친구들의 모습. 휴식하며 일하는 멋진 디지털 유목민들의 실루엣. 중년이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지금이라도 멋진 바다가 보이는 곳에, 맛집이 지천에 깔려있는 곳에서 편집 작업을 해보자. 그래서 선택한 곳이 여수였다. 결과적으로, 생각보다 멋있는 일상을 영위하진 못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맛있는 일상을 누리다 왔다. 여수의 동네 노포 덕분에 가질 수 있었던 행복한 짬은 또 하나의 맛있는 추억이 되었다.


편집 작업은 실내에서만 가능하다. 특별한 시간을 내지 않는 한 바깥공기를 온전히 쐴 수 있는 시간은 밥 먹을 때뿐이다. 이번 여수행에서 유일한 원칙은 외식이었다. 밥만큼은 실내에서 해 먹거나 시켜 먹지 않고 무조건 걸어서 동네 식당에서 먹는다고 다짐했고, 첫 식사에서 횡재에 가까운 맛집을 만나게 되었다. 여수여고 부근의 작은 동네 노포 중식당. 수궁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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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고 했던 숙소 앞 중식당이 문을 닫은 바람에 10분 여를 걸어 여수여고 부근까지 가게 되었다. 길가 모퉁이에 작은 동네 중식당이 보였다. 수궁반점. 입구에 걸린 구슬발과 빛바랜 궁서체 간판을 보는 순간 느낌이 왔다. 구슬발을 제치고 들어가려는데, "자리 없습니다. 기다리세요". 느낌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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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노포답게 수궁식당의 메뉴는 단출하다. 짜장, 짬뽕, 볶음밥 등 기본 식사류 7가지와 탕수육이 전부다. 라조기나 난자완스 등 다른 메뉴들은 가격표 앞자리가 지워져 있다. 이유는 명징하다. 노부부 두 분이서 운영하는 식당이기 때문이다. 홀은 남편분이 주방은 아내분 담당이다. 칠순은 족히 넘어 보이는 아내분이 모든 요리를 도맡아 하니 메뉴가 점점 줄을 수밖에. 작은 중식당은 소리로 알 수 있다. 볶음밥을 시키자 경쾌하게 웍을 다루는 소리가 들린다. 밥을 바로 볶는 소리다. 뒤이어 물 볶는 소리가 들린다. 짬뽕 국물을 볶아내는 소리다. 힘들다고 음식을 허투로 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맛있는 소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아내가 짬뽕 국물을 한 수저 뜨더니 감탄사를 연발한다. "여보 기가 막히다. 어쩜 이런 맛이 나지". 뽀얀 빨간색의 국물 빛깔처럼 맛도 곱다. 개운하고 기분 좋은 얼큰함이 구수하게 혀를 감싼다. 그리고 뒤따르는 기분 좋은 단맛. 맛이 깔끔하다. 면도 중면과 우동면 사이 어딘가 쯤의 굵기. 국물 맛이 적당히 배어 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당함'이라는 맛의 균형감. 수궁반점의 짬뽕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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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에서 많은 짬뽕을 먹어보진 못했지만 기억에 남는 한 곳이 더 있다. 진도의 '중국성'이라는 동네 중식당이다. 그 집의 짬뽕도 개운한 얼큰함이 일품이었다. 진도의 중국성과 여수의 수궁반점 짬뽕의 공통점이 있다. 양배추다. 잘게 채 친 양배추가 짬뽕의 개운하고 기분 좋은 단맛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는 좋은 고춧가루. 양질의 재료를 노부인께서 정성껏 조리해서 내어 주신다. 캅사이신의 매운맛도, 과한 불맛도 없다. 깔끔하고 개운한 얼큰함. 이런 짬뽕을 9,000 원에 만날 수 있음은 행운이다. 동네 분들로 만석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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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밥도 훌륭하다. 근래에 돼지고기를 이렇게 푸짐하게 넣어 준 볶음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올려준 달걀 프라이에서 보이는 정성은 감동이다. 기름에 대충 튀겨 낸 달걀 프라이가 아니다. 노른자를 정성껏 살려 깨끗하게 부쳐낸 달걀 프라이가 볶음밥을 곱게 덮고 있다. 짜장을 솔솔 비벼서 먹어 본다. 맛있다. 돼지고기와 함께 볶아진 밥이 어찌 맛이 없으랴. 게다가 짜장의 맛이 압권이다. 달지 않고 구수하다. 설탕과 조미료로 허접한 재료의 빈 구석을 때운 맛이 아니다. 살짝 아쉬움도 있다. 볶음밥이 고슬고슬하지 않고 뭉쳐 있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밥의 양이 워낙 많다. 동네 장사하면서 양을 적게 할 수 없다는 주인 노부부의 마음이 밥의 양에서 느껴진다. 밥의 양을 줄이면 충분히 고슬고슬하게 볶아질 수 있겠지만, 그전에 충분히 배불리 먹이려는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맛이 맞다.


점심때만 수궁반점을 두 번 더 찾아갔다. 언제나 만석이었고, 자리가 비우면 바로바로 채워졌다. 이 와중에 나처럼 눈치 없이 탕수육까지 시키는 테이블이 있었고, 이 모든 요리를 홀로 담당하는 노부인의 모습은 경이로움에 가깝다. 두 분이 건강하게 이 맛을 지켜주셨으면. 그러자면 사람들이 좀 덜 와야 될 텐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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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여고 부근 수궁반점에서 길을 건너 10분 정도 걸어가면 여수고등학교가 있다. 여수고 앞에 또 다른 동네 노포가 있다. 노인 세 분이 운영하는 백반집 덕충식당이다. 식사 메뉴는 단 하나. 김치찌개백반. 7000 원에 김치찌개 포함 반찬이 14가지. 허허. 헛웃음 밖에 안 나온다. 반찬 하나하나에 담긴 손맛이 7000 원의 수준이 아니다. 대두로 담근 피클과 들깻가루로 버무린 미역귀에 이르러서는 그저 감탄스러울 뿐. 기본에 충실할 뿐인 김치찌개는 얼마나 맛깔스러운지. 잘 익은 김치에 돼지고기 뭉터기로 썰어 넣고 푹 끓였을 뿐 어떤 기교도 없다. 그렇기에 깊고 따스하다. 얼큰 시큼한 국물에 쌀밥을 슥슥 비벼 찌개 속 부드러운 돼지고기 한 점을 더한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반찬 하나를 남기지 않았다. 맛도 맛이지만 이 가격에 이토록 멋진 밥상의 음식을 남기는 건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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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 가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메뉴 중 하나가 서대회 무침이다. 여수 유명 관광지 식당 어디를 가든 서대회 무침은 빠지질 않는다. 개인적으로 관광지 대신 동네 밥집의 서대회를 선호한다. 서대회는 스치듯이 편안하게 마주해야 할 일상의 메뉴다. 대단하게 각 잡고 시켜서 음미하듯 먹는 암소갈비나 다금바리회가 아니란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덕충식당의 서대회 무침은 추천할만하다. 백반을 먹으며 일 인분을 추가하면 두세 명이 충분히 즐길만한 양이 맛나게 나온다.


수궁반점보다는 일하시는 분이 한 분 더 있어서 다행이지만 덕충식당도 역시나 노인 세 분이서 운영하고 있다. 남자 두 분은 홀, 여사님은 주방. 수궁반점처럼 바로바로 음식을 조리해야 되는 수고스러움을 덜 수 있지만 그래도 쉽지 않은 일이다. 꼭 건강하셔야 한다.


동네 노포에서 한 끼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었기에 오롯이 편집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전에 편집을 하면 점심에 찾아갈 동네 맛집이 있었고, 오후 편집을 끝내면 저녁 맛집도 동네에 있었다. 산책 겸 슬슬 걸어가면 편집 작업의 고단함을 위로해 줄 따뜻한 맛들이 여수엔 즐비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후유증이 심각하다. 수궁반점과 덕충식당 두 곳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수여고와 여수고 사이엔 재야의 고수들이 즐비했다. 더 늦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가야 하는데. 마음이 조급하다.


* 여수의 동네 맛집 탐방기는 다음 주에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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