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국수, 온면(溫麵)

조PD의 맛있는 이야기

by 조승연 PD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생각나는 몇몇 가지가 있다. 따끈하게 데운 대포 한잔, 연탄불에 꽁치 굽는 연기, 원통 유리찜기 안에서 빙빙 돌아가는 호빵 같은 겨울색 짙은 식탐과 안도현 시인의 시 '너에게 묻는다'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따스한 온기를 찾으려는 문학적 위안. 이번 겨울에 여기에 하나를 더하려 한다. 따뜻한 국물에 담긴 온면(溫麵) 한 그릇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자신이 몸뚱아리를 다 태우며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만들었던

저 연탄재를 누가 발로 함부로 찰 수 있는가?


-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 중에서


중년의 뜬금없는 생각이 안도현 시인이 시에게까지 다다른 곳은 우래옥에서였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여름에 미루어뒀던 평양냉면을 먹으러 다니기 시작한다. 노포의 평양냉면이야 언제 먹어도 좋지만, 여름보다는 여유 있게 먹을 수 있고 쩡한 시원함을 만끽할 수 있는 시기는 확실히 겨울이다. 우래옥에선 먹을 메뉴가 거의 정해져 있다. 물냉면, 비빔냉면, 불고기, 대긴 갈비, 육회, 어쩌다 우설구이. 이 범위를 벗어난 적이 없다. 우래옥에선 메뉴 선정의 근거는 메뉴판이 아니라 지갑 사정이다. 이 날 따라 메뉴판을 무슨 일로 열어봤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메뉴판을 열어 만만치 않은 음식 가격을 되새김질하는 동안 발견한 것이 온면이었다. 따뜻한 국수.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보수적이고 옹졸해진다. 새로운 맛에 도전했다 배신당하면 하루 종일 찝찝함에 빠진다. 앞으로 먹어야 얼마나 더 먹겠냐며, 돈도 아깝고 시간도 아깝다고 늘 찾던 메뉴만 찾게 된다. 그래서일까. 온면을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이 들면 아예 외면해 버릴 것 같아서.

KakaoTalk_Photo_2025-11-27-23-10-33.jpeg 우래옥의 온면


그렇게 마주한 우래옥의 온면. 첫인상은 따스하고 고소했고 마지막 인상은 감동이었다. 정갈한 고깃국물에 곱게 똬리를 틀은 국수 가락. 파 몇 쪽이 송송 올라간 것이 전부인 온면은 고급스러웠다. 깔끔하게 정제된 고깃국물에 질 좋은 참기름 풍미는 깊고 은은했다. 부드럽게 씹히는 메밀면은 따스한 감칠맛의 국물 속에서 여유로웠다. 보통 '고급스럽다'라는 맛 표현에 정감이 포함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래옥 온면의 맛은 포근하고 따뜻한, 정감 어린 고급스러움이었다. 촉촉한 메밀면을 천천히 씹으며, 따끈한 국물을 마시며 가슴에 온기가 돌았다. 그 순간이었다. 안도현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 건.


50년 넘게 살아오며 온면처럼 누구에게 따스한 감동을 주었던 적이 있었을까. 자신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었다. 아마도 10년 전에 이 온면을 만났다면 육수 베이스가 어쩌네, 잘 풀어지는 메밀면이 온면에 맞냐 안 맞냐며 맛 품평을 했을 것이다. 나이를 먹으니 어쭙잖은 맛 품평 이전에 나를 생각하게 된다. 물론 늘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은 오히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 한 가지다. 맛 품평으로 잘난 척할 기회를 엿본다. 따뜻한 국수, 감동적인 맛을 품고 있는 온면이기에 나를 반추할 기회를 갖는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10월에 이어 11월 말에도 여수를 다녀왔다. 한 달 넘게 편집에 찌들었던 몸과 머리를 쉬게 하고 싶었다. 따스한 일상의 한 끼로 위로받고 싶었다. 결국 여수였다. 수궁반점 어르신들의 짬뽕 한 그릇으로 위로받고 싶었다. 정확히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짬뽕은 더 맛있었다. 탱글탱글한 굴이 짬뽕 국물에 촘촘히 자리 잡고 있었다. 완벽한 짬뽕 국물의 간에 싱싱한 재철 굴이 더해지니 말에 무엇하리오. 구수함의 극치, 그 자체. 순식간에 완뽕.

KakaoTalk_Photo_2025-11-27-23-11-14 001.jpeg 수궁반점의 짬뽕


포만감에 옆을 보니 낡은 미닫이 문이 눈에 들어온다. 미닫이 문 틈 사이로 포대 자루가 가득하다. '생면 전용 밀가루'. 밀가루 수십 포대가 방 안에 빼곡하다. 기가 막혔다. 계산을 하며 어르신께 여쭤보았다.

"면을 직접 뽑으세요?"

"그럼 면을 직접 안 뽑으면 어찌 음식을 팔겠오".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어르신의 표정. 70대 노부부 두 분이서 운영하는 수궁반점이다. 면은 기성면을 사다 쓰실 거라 생각했다. 밀가루를 반죽하고, 발효 후 면까지 뽑는 건 건장한 청년에게도 힘든 일이다. 예전에 '시골 빵집'이란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빵집에서 딱 하루 반죽 및 제빵 수습을 한 적 있다. 경험 후 하루 종일 끙끙됐다. 하물며 칠순을 넘은 노부부가 요리에 반죽과 면까지 뽑는 행위는 '정성'이라는 한 단어에 담기엔 너무 커 보인다. 수궁반점 짬뽕 맛의 깊이엔 아무리 힘들어도 외면하지 않는, '기본'을 지키는 두 분의 삶이 있었다. 난 이제 수궁반점의 노부부를 존경한다.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위안을 줄 수 있는 건 또 다른 누군가의 고난한 일상과 정성이 필요로 함을 이제야 깨닫는다. 따뜻한 국수, 짬뽕 한 그릇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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