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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변두리 냉면의 맛

조PD의 맛있는 이야기

by 조승연 PD


아버지가 정말 냉면을 좋아하셨을까?


"아들, 진천에도 물냉면을 제대로 하는 집이 생겼다. 면을 직접 뽑아. 허허허"

"아.. 그래요?"


아버지는 된장찌개에도 버터를 넣어 드셨다. 갈비찜 국물엔 꼭 밥까지 비벼드셨다. 음식은 달고 기름져야 된다는 본인만의 기준이 엄격했다. 평양 출신 어머니의 음식은 심심하다고 투정 부리던 아버지였다. 양평 옥천면에서 물냉면을 먹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그런 아버지가 왜 진천에 자가 제면 냉면집이 생겼다고 기뻐하셨던 걸까?


전국 유일한 이북식 냉면 마을이 양평에 있다. 양평군 옥천면의 '옥천냉면'. 원조격인 옥천냉면황해식당을 필두로 옥천고읍식당, 옥천면옥, 옥천느티나무냉면 등 6~7개 냉면집이 옥천면에 있다. 황해도에서 온 피난민 부부가 고향의 맛을 뽑아낸 것이 유명세를 탔다. 주변에 한 두 집씩 원조집을 따라 황해도식 냉면을 팔기 시작했고, 이내 옥천냉면촌이 형성되었다. 고유지명을 꾸밈 말로 갖고 있는 냉면은 딱 4개다. 평양냉면, 함흥냉면, 진주냉면, 그리고 ‘옥천’냉면. 이 중에서 면 단위의 조그마한 마을 지명이 붙은 냉면은 '옥천냉면'이 유일하다. 변두리 냉면이 전국구 맛으로 등장한 셈이다.


옥천냉면은 평양냉면과 맛의 결이 다르다. 육수의 맛이 달고 면이 두껍다. 평양냉면 계열의 육수는 소고기와 동치미가 베이스고 옥천냉면의 육수는 돼지고기와 간장이 기본이다. 간장으로 간을 맞춰 육수에 단맛이 많이 담긴다. 물론 시판 냉면에 비하면 슴슴하다. 정통 평양냉면에 비해 약간 단 정도다. 면도 메밀에 고구마 전분을 더해 두껍게 뽑는다. 평양냉면이 보통 1.3mm의 두께라면, 옥천냉면은 1.5mm 정도다. 마포의 을밀대와 더불어 가장 두꺼운 면이 옥천냉면이다(최근 을밀대의 면은 두께를 조절해 가늘어졌다). 찰기 있고 두꺼운 면은 확실히 씹는 맛이 있다. 두툼한 면과 달달한 육수 때문에 정통 물냉면이 아니라고 하는 순수 평냉주의자들도 있다. 말도 안 된다. 평양냉면을 중심으로 세상의 냉면이 돌지는 않는다. 각자의 영역이 있고, 각자의 맛이 있는 법이다. 변두리의 냉면은 달게 진화를 한다.


옥천면옥의 물냉면

서울 구의동 어린이 대공원을 끼고 있는 오래된 냉면 노포가 있다. 서북면옥이다. 서북면옥의 면맛은 사대문 평양냉면 노포들의 것과 매우 흡사하다. 차이는 단맛이다. 우선 냉면무가 상당히 달게 절여져 있다. 치킨무보다 살짝 덜 단 정도. 냉면무 몇 점 집어서 육수에 넣으면 단맛이 확 올라온다. 정성껏 뽑은 메밀면을 슴슴 달달한 육수에 말아먹는 서북면옥의 평냉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사대문 평양냉면 노포들의 맛은 아니다. 서북면옥의 개업일은 1968년이다. 이 시기의 서울 구의동은 변두리 중에 변두리, 서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던 동네였다. 옆 동네인 중곡동에서 살았던 아버지는 당시 구의동 일대를 정확히 기억했다.


“비 오면 택시도 안 들어왔어. 온통 진흙밭인데 누가 들어오려고 해. 이 동네가 그랬어"


도시 개발의 속도만큼 서민들의 먹는 속도는 빠르다. 식재료를 꼭꼭 씹어 맛을 음미할 시간 따위는 없다. 빨리 먹어야 많이 먹을 수 있고, 후딱 먹어야 짬 내어 쉴 수가 있다. 그렇다고 맛을 놓치고 싶진 않다. 그래서 간이 세진다. 달고 짭짤해야 한다. 직관적인 맛이 미각을 자극해야 한다. 아버지의 입맛이 그랬다. 땀 흘리는 노동자의 입맛이 그랬다. 우리 동네 이웃들의 입맛도 그랬다. 지역 단골의 입맛에 맛게 음식은 진화한다. 평양식 서북냉면의 단 맛은 변두리 이웃들과 공생하려는 노력의 결과다.


옥천면 모든 냉면집의 메뉴는 한결같다. 물냉면 혹은 비빔냉면에 고기완자, 그리고 새빨간 무절임. 바로 술안주다. 간 돼지고기를 달걀 옷 입혀 부쳐낸 완자에 무짠지를 매콤하게 무쳐냈다. 밭일에 땀 흘린 촌부가, 햇볕에 그을린 인근 부대 군인들이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고기완자에 매콤한 절임무 얹어 한 입, 시원한 막걸리 한 잔. 맛에 취해 술에 취해 왁자지껄. 시끄러운 너스레 한 자루 쏟아내고 마무리는 시원 달큼한 냉면 한 사발. 새침한 사대문 평양냉면으로는 감당 못할 질펀한 정서가 옥천냉면에는 있다. 변두리 냉면의 맛이다.

옥천냉면의 대표 메뉴 고기완자와 절임무

아버지와 어머니의 입맛은 온달과 평강공주였다. 평양 출신에 사업가의 딸이었던 어머니 입맛은 평양냉면과 해산물에 닿아있었고, 충북 음성 깡촌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버지는 기름진 육식을 갈망했다. 연말이면 중년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을지로로 부부 모임을 나가셨다. 중식당 저녁 모임이었지만 늘 점심에 나가셨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평양냉면을 위해서였다.


"그 밍밍한 냉면을 네 엄마는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비싸기만 하고. 그래도 엄마를 위해 아빠가 점심에 평양냉면 한 그릇 했다"


서울 사대문 평양냉면의 대표격인 우래옥 물냉면


어머니 때문에 드시긴 했지만 아버지는 평양냉면 맛이 탐탁지 않았다. 만약 옥천냉면이었으면? 아버지의 기름진 입맛에 안성맞춤인 고기완자에 맵고 짠 절임무도 있고, 진한 육수의 냉면도 있으니까. 그래도 아버지는 냉면 맛의 핵심은 알고 계셨다. 메밀면의 맛이다.


"면이 툭툭 끊어지는 게 씹으면 구수하니 괜찮지. 질긴 고깃집 냉면은 영 아니야"


진천 읍내에 새로 생긴 고깃집에서 직접 면을 뽑는다고 엄청 좋아하셨다. 진천으로 귀촌 후 서울까지 안 가도 괜찮은 물냉면을 먹을 수 있다고. 네 엄마가 엄청 좋아한다고. 오늘 점심은 냉면으로 하자며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대동하고 앞장서셨다. 물론 그 길이 진천에서 마지막 냉면일 거라곤 생각 못했다. 일등 당첨 복권을 잃어버린 듯 허망한 절망감이 깃든 아버지의 표정도.


"사장님. 면이 이게 아닌데. 왜 그래?". 나온 냉면을 보시더니 아버지는 정색을 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직접 반죽해서 면을 뽑자니 너무 힘들어서요. 도저히 못하겠어서 그냥 사서 썼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들 엄마가 냉면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진천에도 생겨서 얼마나 안심을 했는데..."


아버지는 3개월 후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당신이 가시기 전까지 어머니가 맛나게 드실 냉면집을 진천에선 끝내 찾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냉면을 좋아하진 않았다. 어머니를 좋아하셨다. 생전에 옥천냉면을 아셨다면 냉면도 좋아하셨을까?



* 이 글에서 표현한 옥천냉면과 서북면옥의 물냉면이 달다고 하는 것은 사대문 평양냉면의 맛과 비교했을 때이다. 평양냉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심심할 수 있다. 맛의 세계는 상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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