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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혼밥도 알차게 먹는다.
강화집과 천안식당에서

조PD의 맛있는 이야기

by 조승연 PD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영화 베테랑 중 형사 서호철의 대사)


먹고살려고 참긴 하지만 쪽팔리고 싶지는 않다. 하란 대로 했는데 아웃풋은 왜 이 모양이냐고, 영혼을 갈아 넣은 기획안에 참신함은 어디에 팔아먹었냐는 간부들의 참신한 지적질을 폭탄주에 팍팍 말아먹으며 외친다. “니미,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이어지는 엔딩 멘트도 곁들여서.


“더러워서 때려치우든지!!”


때려치우고 나니 지적질이 있던 자리가 휑하니 비어있다. 조직의 지적질이 있던 자리는 주머니였다. 이제 주머니를 채우는 건 조직을 때려치운 스스로의 몫이다. 일이 있어야 지적질이든 뭐든 주머니가 채워진다. 일이 없으면 빈 주머니에 불안감이 들어선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김훈 작가 산문집 제목을 곱씹어 본다. 참으로 명문이다. 밥벌이를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을 먹기 위해서는 밥벌이를 해야 한다. 뭐 어쩌겠는가. 노동으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이번 생은 그렇게 살아야지. 나는 주머니를 채우고, 밥벌이를 위해 지방도 가고 도심도 간다. 어디든 간다. 다행히 주머니에 일거리가 있던, 불안감이 있던 한결같은 것이 나에겐 있다. 밥때면 언제나 당당한 식탐이다.


강화도 스페인 마을에서 미팅이 잡혔다. 안암동에 일정을 마치고 나니 오전 11시 30분.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밥을 여기서 먹고 가야 하나, 강화도에 가서 먹어야 하나’. 여기서 고민이란 혼밥이니 건너뛸까 아니면 대충 때울까의 고민이 아니다. 혼밥이니 대충 먹자는 나의 식탐이 허락지 않는다. 밥벌이도 지겨운 마당에 왜 밥마저도 허투루 먹어야 하는가. 혼자 먹는 밥이니 더 잘 먹어야 한다. 최악은 혼밥이 맛도 없을 때이다. 게다가 나는 가성비 최고의 밥집도 알고 있지 않은가. 고민이 깊어진다. ‘밥을 근처 어머니 대성집에서 먹고 가야 하나, 강화도 강화집에서 먹어야 하나?‘. 결정했다. 오늘은 강화집이다. 제대로 된 백반 한 상을 마주할 생각에 운전이 즐겁다.


“우리가 돈이 없지 식욕이 없냐”

강화집1.jpeg 이제 순대국은 팔지 않는다

강화집은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5회에 출연했다. 벌써 6년 전이다. "허화백님 식대는 내가 낼게요". 촬영 당시 옆 테이블 손님 멘트가 배어든 듯 여전히 정감 있는 모습이다. 혼밥인을 위한 카운터 테이블에 앉아 백반과 닭곰탕 2개뿐인 메뉴를 보니 갈등이 시작된다. 백반? 닭곰탕? 뭘 먹지?


“닭곰탕 드셔. 백반 반찬이 거진 다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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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조림이 빠진 9개의 찬에 흰쌀밥과 뽀얀 닭곰탕이 7000원. 싸다. 그렇다고 만만히 볼 구성이 아니다. 강화의 맛이 오롯이 쟁반에 놓여있다. 먼저 순무김치. 무과가 아닌 배추여서 ‘깍두기’가 아닌 ‘김치’라고 하는 걸까? 강화 사람들은 깍두기라 하지 않고 순무김치라 부른다. 구수한 맛, 단맛, 톡 쏘는 맛, 겨자맛, 인삼 맛 등 총 다섯 가지 맛이 난다고 하는 강화도의 상징이다. 인삼맛까지는 모르겠지만, 옹골찬 식감 안에 알싸함이 꼭 박혀있다. 1893년 영국에서 파견된 해군 교관이 영국식 순무를 가져와 토종 순무와 교잡하여 강화도에 심은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니, 강화 순무는 양배추와 순무를 교잡시킨 콜라비의 사촌쯤 되겠다. 딱딱한 육질과 보랏빛 외모가 닮기도 했다. 닭곰탕에 알싸한 순무김치 한 조각. 좋다.


“닭곰탕엔 소금을 살짝 넣어요. 그래야 최고로 맛있어”


로마에선 로마법을 강화집에선 사장님 말을 따라야겠지만, 닭곰탕에 소금만큼은 굳이 안 따라도 된다. 짭조름한 강화도 밥도둑이 있기 때문이다. 밴댕이젓이다. '밴댕이 소갈딱지'. 속 좁은 사람을 비유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밴댕이의 내장이 워낙 작아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속 좁은 밴댕이는 고소하다. 질 좋은 버터의 고소함이 밴댕이의 살맛에 배어있다. 강화도에 꽃이 피는 4월부터 5월이 제철. 기름진 고소함이 절정에 이른다. 속도 좁은 녀석이 성질도 급해 빨리 상하는 밴댕이는 예부터 음력 단오 즈음이면 젓갈로 환생했다. 마늘 넣고 빨갛게 버무린 매콤 짭조름한 밴댕이젓. 흰쌀밥에 올려 먹으니 밥의 온기에 염장된 밴댕이의 고소함이 녹아내린다.


입 안이 좀 짜다 싶을 때 밤 새 고아낸 닭곰탕 국물 한 수저 뜬다. 담백한 맛에 입맛이 정리되고, 속이 편안해진다. 백반 한 상의 중심축을 닭곰탕이 잘 잡아주고 있다. 닭곰탕 맛이 자극적이었다면 강화집 백반의 맛은 중구난방이었을 것이다. 개성 강한 반찬들 사이에서 전체적인 맛의 조화를 닭곰탕이 지휘하고 있다.

강화집10.jpeg 강화집 맛의 지휘자 닭곰탕


"닭곰탕 하나 줘요. 반찬은 무짠지만 주고, 그거면 충분해"


강화집 단골손님이 들어오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다른 반찬 다 필요 없고 무짠지만 수북이 달란다. 아하! 이 집 반찬의 숨은 고수는 무짠지구나. 아삭하게 씹히는 무짠지의 짠맛에 청량감이 묻어난다. 동그란 오봉에 담긴 반찬 하나하나 허투루가 없다. 강화도 어머니의 맛. 반찬 맛에 집중하며 입을 오물거리니 혼밥의 시간이 즐겁다. 오길 잘했다.


강화집은 낚시꾼들에겐 성지와도 같은 백반집이다. 새벽 3시에 문을 열고 오후 2시면 영업 종료다. 주변 시장 상인들은 물론, 새벽배를 타려는 낚시꾼들에게도 든든한 뒷배였다. 배우 이덕화 선생께서 이 집을 사랑한 데는 이유가 있다. 매일 새벽 3시에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는 건 돈 이전에 거룩한 정성이다. 혹여나 여행차 강화에 있다면 강화집을 지나치지 말자. 밥벌이를 위해 일상으로 돌아가는 당신의 속을 강화의 맛으로 든든히 채워 줄 것이다.

KakaoTalk_Photo_2025-04-24-14-34-12 015.jpeg 정감이 있는 현지인 맛집인 강화집

백반 한 상 받자고 강화도까지 가기엔 너무 멀지 않냐고? 음, 그럴 수도. 그렇다면 주위를 둘러보자. 세상은 넓고 알차게 혼밥 할 수 있는 집은 많다. 난 여의도에 약속을 잡을 때면 오후 2시 이후를 선호한다. 천안식당에서 오롯이 즐길 혼밥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오후 1시쯤 인도네시아 대사관 건너편 경도빌딩 안의 조그마한 천안식당에 들어선다. 나 같은 혼밥 식객 여러 명이 식사 중이다. 혼밥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다. 메뉴는 대부분 고추장불고기 백반. 검정 법랑 프라이팬에서 지글대는 고추장불고기도 좋지만 천안식당의 진미는 '공짜' 순두부찌개다. 대충 끓여서 맛있는 맛이라고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천안식당1.jpeg 도심에도 알찬 혼밥집은 있다

대학 시절 술에 떡이 되어 들어온 다음 날이면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해장국을 끓여 주셨다. 술 먹고 골골되는 아들놈 뭐 그리 이쁘다고 정성 들여 국을 끓이셨겠는가. 정말 대충 끓여 속이나 풀라고 내어주셨다. 팔팔 끓는 물에 고춧가루 듬뿍, 마늘 넣고 간장으로 간 맞추고 미원 한 꼬집이면 끝. 가스불을 내린 후에 계란물 풀고 내어주시면 계란국이다. 순식간에 조리해 주시던 그 계란국이 어찌나 맛있던지. 얼큰하고 국물에 속이 풀리고 보드라운 계란옷에 속이 달래진다. 짭짤 달큼한 간에 입맛이 돋는다. 대충 끓여 잊지 못할 국물 맛이 천안식당 순두부찌개에 고스란히 옮겨와 있다. 해장으로도 좋고 밥 친구로도 좋다. 9000원의 혼밥에 행복한 추억과 새로운 기운을 얻는다.

천안식당4.jpeg 천안식당 고추장불고기 백반

몇몇 음식 평론가는 백반(白飯)을 반찬 없이 밥과 국만 먹는 초라한 밥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짐승을 잡는 백정(白丁), 놀고먹는 백수(白手), 성이 없는 평민을 뜻하는 백성(白姓)처럼 백반(白飯)에 쓰인 백(白) 자는 없음, 공백을 뜻하는 부정적 의미라고 한다. 혼밥의 든든한 동반자인 백반이 달랑 밥과 국만 있는 밥상이라니. 기운 빠진다. 강화도 명물 밴댕이의 표준어는 멸치과의 '반지'다. 육수용으로 많이 쓰이는 디포리의 표준명이 청어과 '밴댕이'다. 즉, 모든 사람이 밴댕이라 부르는 고소한 생선의 호적상 이름은 '반지'인 셈인데, 아무도 '반지'를 '반지'라 부르지 않고 '밴댕이'라 부른다. 그러니 젓갈도 만들고 회로도 먹는 고소한 그 생선은 그냥 '밴댕이'인 것이다. 짜장면을 '자장면'이라고 쓰는 사람이 없듯이 말이다.(2011년 8월까지 짜장면의 표준어는 '자장면'이었다. 짜장면은 틀린말이었다).


'밴댕이'가 밴댕이이고 '짜장면'은 짜장면이듯이 '백반'도 '백가지 반찬'이 있는 알찬 밥상이어야 한다. 홀로 해도 맛있는 밥상이어야 한다. 직장인이던 프리랜서든 밥벌이는 지겹다. 지겨운 밥벌이를 맛있는 밥상으로 해결해보자. 가벼운 주머니로도 소소한 식탐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그 순간 나는 온갖 걱정과 고민을 완벽히 망각한다. 오늘도 난 알차게 혼밥 하러 가고 있다. 어디로 갈까나.. 그래 오늘은 '큰바위 식당'이다. 언제나 꿋꿋한 나의 식욕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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