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PD의 맛있는 이야기
포항에 가면 빠지지 않고 죽도시장에 간다. 대구 서문시장 다음으로 경북에선 두 번째로 큰 시장이다. 고래, 대게, 가자미, 문어 등 동해에서 잡힌 해산물과 포항에 사는 사람들은 빠짐없이 죽도시장에 모인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구경하러 죽도시장에 가는 건 아니다. 장을 보러도 아니다. 나는 먹으려고 간다. 포항식으로 요리하는 물회가 죽도시장에 있다.
수향회식당. 메뉴도 물회와 회덮밥이 전부인 조그마한 식당에 주말이면 사람들이 종일 줄을 선다. ‘포항식’을 모른다면 수향회식당의 물회에 적잖이 당황할 수 있다. 채 친 오이와 배 위에 회 한 덩어리. 그리고 고추장이 전부. 깨소금과 참기름, 김가루 양념이 있지만 정작 육수가 없다. 물회에 ‘물’이 없는 셈이다.
“젓가락으로 회하고, 고추장, 야채를 잘 섞어서 드이소”
“육수는요?”. “육수 없어요. 그냥 비벼 드시다가 냉수 말아 드시면 됩니다”
물회의 세계는 강원도가 평정했다. 새콤, 달콤, 매콤한 육수에 회와 국수를 말아먹는 방식이 언제부턴가 강원도식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단맛의 유행과 함께 강원도식은 물회의 표준이 되었다. 새콤달콤 빨간 육수에 회와 채소를 담아 내온다. 강한 육수가 회맛을 가린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세를 거스르진 못한다.
속초 청초수물회의 메인홀은 크기가 실내 체육관 버금간다. 그 큰 식당이 주말이면 사람으로 차고 넘친다. 오와 열을 맞춰 앉은 사람들 대부분 단일 메뉴다. 빨간색 육수의 강원도식 물회.
된장 육수를 쓰는 지역도 있다. 전라도와 제주도다. 키조개로 유명한 장흥은 된장 푼 물에 열무김치를 썰어 넣은 육수로 물회를 만든다. 제주도는 열무 대신 미역을 잘게 썰어 넣는다. 단맛보다 짠맛이 더 강해 회맛은 된장 물회에서 더 잘 산다.
물회는 바다 위 어부들이 선상에서 한 끼 때우기 위해 고안한 일종의 패스트푸드다. 장을 풀어 냉국 만들고 배 위에서 가장 흔한 재료인 생선회 썰어 넣어 밥 말아먹으니 물회가 된 것이다. 된장이 흔하면 된장을 풀고, 고추장이 흔하면 고추장을 풀었다. 경북 포항은 고추장이 더 흔했던 모양이다. 경상북도는 콩 농사보다 고추 농사가 발달한 지역이다.
수향회식당의 물회는 고추장에 비비는 포항식이다. 육수의 개념이 없다. 회덮밥에 물 부으면 물회다. 수향회식당의 두 개뿐인 메뉴. 물회와 회덮밥은 이란성쌍둥이다. 깨소금이 회 위에 뿌려지면 회덮밥이고, 바닥에 깔리면 물회다.
“사장님 물회랑 회덮밥 차이가 뭐예요?”
“회덮밥엔 배가 안 들어가요”.
수향회식당 물회는 단순하고 투박하다. 회가 달다. 그리고 정성스럽다. 흐트러뜨릴 회인데도 동그랗게 모양을 내고, 홍당무 한 조각을 올려 모양을 낸다. 난 이 정성에서 수향회식당의 맛이 나온다고 확신한다. 1991년부터 여사장님이 직접 회의 모양을 잡는다. 여사장님 손의 악력으로 회에 온기가 돌고 단맛이 든다. 그게 손맛이다. 수향회식당의 물회를 먹고 나면 속이 편안하다. 부드러운 손맛으로 조리된 덕분이다.
항상 손님들이 줄을 서는 유명 맛집이지만 여사장님은 주방을 놓지 않고 있다. 손님들과 눈을 마주치고, 회를 다듬고 모양을 잡는다. 요리하는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여사장님이 있는 주방이 채 1평이 되지 않는다. 반 평 남짓한 공간에서 44년간 물회를 만들었다. 그 공간도 심해진 관절염 때문에 버겁다고 한다. 문에 기대고, 싱크대에 의지해 요리를 한다. 하지만 주방을 떠나진 않는다. 죽도시장이라서 포항식 물회를 했을 뿐인데 전통 맛집이라며 젊은 분들도 온다고 기뻐하신다.
경북 동해안 지역인 울진과 영덕의 물회도 포항식과 유사하다. 횟감과 채소의 종류만 다를 뿐이다. 그래도 난 포항 죽도시장의 수향회식당 물회가 특별하다. 44년간 0.5평의 공간에서 맛의 서사를 완성한 장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