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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May 27. 2024

비바람 속 걷는 남자

너무 시원해 벅차오르는 기분



어쩐지 불쌍한 표정으로 보인다




비바람을 좋아한다.



세상살이에 떠밀려 변방의 엑스트라가 된 지 오래. 엑스트라는 나서면 안 돼. 중심으로 나와서도 안돼. 구석에 쭈그리고 있어야 제맛. 스타를 보며 손뼉 치고 리액션이나 하고 그러면 족하다. 

  

딸아이에게 비 오는 날 비바람에 떨면서 걷는 풍경을 그려달라고 했다. 

본질은 비바람의 시원함을 즐기는 쪽에 염두를 뒀다. 막상 받은 그림을 보니 그리 즐기는 거 같지는 않았다. 호주머니에 한 손을 꽂았는데 처량하게 보일 뿐이다. 표정도 시큰둥하다. 몸은 떨고 있다. 비 내리고 바람이 분다. 주변 꽃들도 떤다. 빗방울에도 다양한 표정이 담겼다. 


"어머! 창밖 좀 봐!"

아내의 말에 바깥을 보니 세상이 온통 뿌옇게 변했다. 복면가왕이 하는 저녁 시각. 바깥은 어둠이 내리고 비가 내려서 마치 안개 낀 것처럼 연초록 물방울 속에 들어가 버렸다. 물방울 속의 세상. 그래, 지금은 구경 가야 해. 복면가왕이 중요한 게 아냐. 

"어디가? 조금 있으면 미녀와 순정남이 한다고!"라며 아내가 말했다.

지금 '미녀와 순정남'(주말드라마)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도라가 기억 찾으면 어쩌려고?"

"나중에 얘기해 줘." (도라는 기억을 잃은 여주인공이다)


비가 오면 일부러 나간다. 

우산을 들고서 비바람을 즐기러 간다. 우산도 작은 걸 든다. 얼굴이나 목덜미, 팔에 빗방울과 바람이 닿는 면적을 최대한 넓게 한다. 그럼에도 우산은 들고 있어야 남들 보기에 처량하게 보임을 피할 수 있다. 거기에 신발은 긴 목 등산화를 신는다. 그래야 비가 들어차지 않는다. 운동화나 슬리퍼는 비가 새어 들어와 축축하게 된다. 축축하면 냄새가 밴다. 그러면 결국 빨아야 하니까. 


적당한 물 웅덩이는 마구 질퍽질퍽 밟고 다닌다. 

간간이 사람들이 다닌다. 저마다 비 맞을세라 걸음걸이가 총총거린다. 차는 길가에 사람이 있든 상관없이 부아앙 달린다. 물이 튕긴다. 점점 차들에 비해 사람이 없다. 어느 시점 길가에는 나 혼자만 덩그러니 걷는다. 바로 이 순간이다. 비바람이 거세진다. 각도가 옆으로 비스듬히 변해 몰아친다. 가슴이 뛴다. 벅차오른다. 비바람을 온전히 느끼는 순간. 세상은 깜깜해지고 차가워진다. 물방울 속의 세상. 물방울 껍질로 뒤덮여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 정말 아무도 없을까? 생각한 순간 누군가 떠오른다. 가족. 내 소중한 이들은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안락한 시간을 보낸다. 친구, 아는 이들도 모두 집안에 있을 테지. 다행이다. 나 혼자 이 비바람을 뚫고 헤쳐나가면 된다. 이제 다른 이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비바람 몰아치는 강변, 가로등이 반짝이는 다리를 혼자 건넌다. 야간 조명이 화려한 길, 어둠 속 아늑한 길을 혼자 터벅터벅 걷는다. 걸으며 주변 풍경을 흠뻑 마신다. 사람들이 많아서 주저했던 번화가도 신나게 걷는다. 보는 시선이 많아 꾸물거렸던 중심가도 마음껏 걷는다. 저녁에 비 내리고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부풀어올라 세상을 뿌옇게 만들면 그간 가보지 못한 곳을 주인공처럼 누비는 자유.   


소외된 자만이 느끼는 쾌감. 나만의 퇴폐로운 한때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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