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 단체전
왜냐하면 예탈이 없기 때문이다. 예탈이 없는 대회는 보통 작은 리그전에서나 볼 법한 광경인데 이렇게 정식 대회에서도 예탈이 없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정식이지만 승점이 적용되지 않는 시 자체 대회. 협회장배의 협회장이 인사말에서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예탈이 없습니다. 그러니 편히 게임하며 맘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예탈이 없어서 마음 한편이 편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리그전 등을 다니며 깨달은 게 있다. 나처럼 어중간한 이는 예선에서 반드시 1등을 해야 한다는 거다. 1등으로 본선에 가야 다른 조 꼴찌를 만날 확률이 커진다. 그러면 최소 본선 2회전까지는 간다. 그러다 보면 신바람 타서 입상까지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구조. 그래서 예탈이 없는 예선이지만 나는 긴장하고 들어갔다.
첫 상대는 고성의 6부 펜홀더 숏핌플 정 선수.
정 선수는 개성이 확실한 아저씨다. 큼직한 귀걸이와 팔찌 손가락 반지들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정 선수가 한창 게임 중 구슬땀을 닦으며 한 말. "여기서 나만큼 즐거운 사람이 있을까? 내가 제일 즐거울거야." 승패는 이미 관심밖이다. "나는 그저 플레이를 즐기는 거야. 아아 땀난다." 땀 닦으며 내게 한마디 해준다. "나는 너무 즐겁거든. 이걸로 만족이거든. 이 땀 좀 보라고."
1세트에서 나는 7대 0으로 끌려갔다. 이게 뭔가 싶었다. 저렇게 빈틈 많아 보이는 아저씨가 의외로 랠리가 정확하다. 실수를 안 하시네? 정신 차리니 7대 0. 큰일이다 싶어 작전을 바꿨다. 짧게 커트 주고 루프 드라이브를 걸었다. 다행히 작전이 주효했다. 비교적 쉽게 3대 0으로 승리.
두 번째 상대는 진주의 이 선수.
펜홀더 4부다. 백서브가 일품이다. 백서브가 커트처럼 보이지만 받으니 회전이다. 회전인가 싶어 쇼트로 받으니 튕겨나갈 정도로 회전이 많다. 회전이 많은데도 짧게 넘어오니 받는 직전까지도 이게 커트가 아닐까 의심 갈 지경이다. 그럼에도 꾹 참고 회전 속도를 죽이며 따닥 쇼트로 받았다. 서브를 탄 1세트를 내주고 내리 3세트를 따 3대 1로 승리.
본선 1회전에서 금산의 6부 김 선수를 만났다.
지금껏 천적관계. 전부 패. 처음엔 3대 1로 그다음엔 3대 2로 졌고 오늘 또 만났다. 김 선수는 젊고 잘생겼는데 눈이 다소 작다. 작은 눈으로 매서운 드라이브를 팍팍 꽂는다. 본부석에서 진행자가 빨간 바구니(대진표와 공)를 주며 내 상대로 김 선수를 호명했다. 그 순간 내가 "어? 네가 왜?"라고 하니 김 선수가 "어? 혹시 예선 1등 하셨어요?" 했다. "응, 너 설마?" "네, 3등이에요"라며 웃었다. 내가 어이없어하며 "네가 왜 꼴등이야?"라고 따지니 "그러게요" 하며 웃기만 했다. 게임이 시작되고 내가 먼저 김 선수의 서브를 타 실점했고 김 선수도 내 서브를 타 실점했다. 서로가 서브권일 때 득점하며 시소게임하다 결국 5세트에서 11대 8로 패. 이때 김 선수의 한마디. "또 5세트에서 힘겹게 이겼네요." 배려의 말이다. 대회에서 연속으로 만나다 보니 나이를 떠나 쉽게 익숙해지고 친해져 "이겼으니 꼭 입상해야 한다"라고 등을 쳐 주었다.
오늘 집에 빨리 가겠구나.
단체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런 생각을 했다. 오후에 단체전이 시작되고 예선에서 나는 롱핌플을 만나 첫 게임에서 패했다. 다행히 같은 팀 규옥이와 승호가 승리해 이겼는데 두 번째 예선 사천 팀을 만났을 때도 핌플 5부 서 선수를 만났다. 미디엄 핌플이라고 했다. 여태껏 나는 서 선수를 이긴 적이 없다. 역시나 뒤지다가 막판에 겨우 이겨 우리 팀이 승리했다. 팀은 1위로 예선을 통과했다.
본선이 시작되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우리 팀은 불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부전승이라고 했다. 본선 2회전에서 남강 팀을 만났다. 이 남강 팀은 2주 전 동네 리그전에서도 만났다. 남강 팀은 3인 단체전인 오늘도 같은 멤버로 나왔다. 5부 안 선수와 이 선수, 그리고 3부 양뽕 성 선수다. 양뽕은 양 면이 핌플 유저라 양뽕이라 지칭한다. 나는 이 양뽕 성 선수의 밥이다. 이긴 적이 없다. 서로가 1, 2, 3번을 고르기 전 눈치 싸움을 했다. 대진의 승리인가? 종이에다 이름을 적기 전까지 나는 규옥이와 승호 가운데 끼어 서성거렸다. 고심 끝에 번호를 정했고 차례로 번호를 호명하며 탁구대 앞에 섰다. 1번 규옥이가 이 선수와 만났고 2번 승호가 양뽕 성 선수를 만났다. 이때 성 선수의 진심 어린 탄식 "아~~~!" 하는 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우리 팀 셋 중 유일하게 뽕을 타지 않는 이가 바로 승호이기 때문이다. 3번인 나는 안 선수를 만났다. 게임이 진행되기 전, 성 선수가 자기네 팀원들에게 말하는 게 들렸다. "큰일이에요. 저기 승호 선수는 제 뽕을 안 타요. 승호만 피하면 제가 무조건 이기는 건데"라면서 나를 가리키며 "형이 2번인 줄 알았잖아요. 형을 꼭 만나고 싶었는데"하며 아쉬워했다. 나와 규옥이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왼쪽 테이블에서 규옥과 이 선수가 게임했고 두 번째 테이블에게 승호와 성 선수가 게임했다. 나는 그 테이블 심판을 봤다. 보는데 성 선수가 한쪽은 롱이고 한쪽은 미디엄이라 했다. 게임 내내 라켓을 돌리며 상대의 혼란을 초래하려 했지만 날카로운 승호는 안경 속 눈을 반짝이며 귀신같이 커트냐 너클이냐를 구분해 냈다. 6부 승호가 3부 성 선수를 쉽게 요리해 갔다. 게임 중 왼쪽 테이블에서 게임이 끝났다. 돌아보니 규옥이가 패했다. 3번인 나는 일어나 안 선수와 대적했다. 1승 1패. 내가 결승. 안 선수와 나는 서로 간 악수하며 "우리는 인연이다. 운명이다"라며 웃었다. 그간 단체전에서 남강 팀만 만나면 나는 안 선수와 같은 번호가 돼 싸웠다.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다 오늘 또 만났다. 게임이 시작되고 평소보다 랠리가 길었다. 안 들어와야 할 공이 두 개 정도 더 들어와 당황스러웠다. 그럼에도 나는 공격일변의 작전으로 강타를 때렸다. 모퉁이에 있던 위치라 코너를 둘러싼 양쪽 구장의 선수들이 열렬히 응원을 해줬다. 나는 아득한 시야를 느끼며 집중 또 집중하며 공격하려 애썼다. 상대가 드라이브를 걸면 카운터로 스매싱을 날렸다. 다행히 잘 꽂혀 승리. 나는 승리직후 급히 안 선수와 악수하고 돌아서 응원해 준 이들과 차례로 손뼉을 마주쳤다. 이 맛에 단체전인가 싶었다.
본선 3회전에서 나는 5부 정 선수를 만나 운 좋게도 그의 수많은 실수를 틈타 가장 빠르게 승리했다.
승호는 4부 젊은 황 선수를 만나 패했고 규옥이가 마지막 세트에서 4부 황 선수에게 승리했다. 젊은 황 선수는 규옥 상대 황 선수의 아들로 부자지간에 팀을 이뤄 우리의 상대로 만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나란히 4부 고수다. 최근에는 아들 황 선수가 상승세로 진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본선 4회전에서 사천 팀을 만났다.
사천 팀은 너무도 익숙한 팀이다. 나는 왼손 펜홀더 박 선수를 반드시 피하고 싶어 "형~ 몇 번이에요?" 하고 툭 물었다. 형은 "나 1번이야"라고 했는데 나는 곧이곧대로 믿고 2번으로 적었다. 이윽고 탁구대 앞에서 서니 박 선수도 2번. 내가 "왜 거짓말했어요?" 하니 "너를 꼭 만나고 싶었다"라는 저승사자 같은 대답이 들렸다. 박 선수는 왼손으로 서브가 강점이다. 박 선수는 한때 우리 구장 사람이었다. 내가 탁구를 시작하고 박 선수를 접했을 때 서브 하나를 받지 못해 내내 졌었다. 어쩌다 서브를 좀 받게 될 때쯤 박 선수는 사천 구장으로 이적했고 그의 서브를 받아본지 한참이 된 터라 불안했다. 역시 1세트에서 서브를 타 패했고 2세트에서 간신히 이게 커트가 아니라 회전이구나 하며 적응해 동률로 만들었고 결승에서 6대 5로 맞서고 있었다. 이때 양쪽에서 규옥이와 승호가 승리해 게임 중단. 심판이 끝까지 할래? 라고 묻자 박 선수와 나는 동시에 "스탑"을 외쳤다. 서로 간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영리한 판단이었다.
본선 5회전 결승.
나는 4부 박 선수를 만났다. 박 선수는 최근 개인 유튜브 영상으로 자신의 탁구 경기를 찍으며 멀리 전국구 오픈 게임을 찾아다니는 떠오르는 스타다. 며칠 전 우리 구장에 놀러 왔을 때 가볍게 게임했는데 내가 이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몇 점 따보지도 못하고 패했다. 게임 중 공 주으러 다니며 얼른 게임이 끝나길 하고 바랐다. 그의 점착 러버가 따귀를 때리듯 드라이브를 걸면 도저히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커트볼 드라이브도 아예 실수란 게 없이 양쪽으로 꽂혔다. 지난번 구장에서와는 차원이 달랐다. 옆에 승호가 아깝게 패하는 순간 우리 팀은 3등이라는 성적이 확정되었다.
오늘 대회에서는 상위부(1~6부), 하위부(7~8부)로 나눠 단체전이 벌어졌다.
우리는 상위부에서 최하위 부수인 6부 세 명으로, 전혀 성적을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 구장에서는 상위부에 네 팀이 출전했는데, 두 팀이 3위로 입상했다. 우리 팀 말고 저쪽 입상 팀은 1부 이 선수, 2부 관장님, 3부 서 선수였다. 무려 이들과 동급의 성적을 거둔 것이다. 그것도 6부 셋이서.
밤늦게 회식자리에서 우리 셋은 흥분했다.
우리가 거둔 성적이 실로 놀라웠다. 진주, 사천, 남해, 고성, 합천, 하동에서 상위부 40개 팀이 참가한 단체전에서 무려 3등이라니. 것도 1부부터 고수가 즐비한 곳에서.
상위부에서는 늘 최하수로 취급받던 부수에서 정말 오랜만에 입상의 짜릿함을 느낀 하루. 패배에 익숙하여 그러면 그렇지 하고 돌아서던 나날. 마침내 볕이 든 날.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 괜찮은 추억이 하나 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