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재회 (단편소설)

by 머피



뒤돌아본 것을 곧 후회했다.

뒤돌아본 순간부터 이미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경남 창원의 학교. 공무원 시험장 입구에서 시험실 안내 벽보를 보다가 무심코 뒤돌아보았다. 왜 돌아봤을까. 어떤 느낌 때문에? 바보같이. 어째서? 뒤에서 그녀도 벽보를 보다가 돌아본 나와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무표정. 그녀의 얼굴에 표정 변화는 없었다. 돌아보는 내 시선에 그저 멍하니 시선을 주는 정지화면. 와중에 원망이 돋아났다. 너는 날 볼 게 아니라 안내 벽보를 봐야지 어찌하여 날 보는 거니. 왜 계속 이렇게 갑자기 마주치는지. 하필이면 여기서. 너도 시험을 보는구나. 이십 대 후반. 얼굴이 변했고 그래서 통성명을 하기 전에는 일단 몰라봐야 하는 사인데 너는 왜 나를 쳐다보는 거니. 내 죄가 뭔지 잘못한 게 뭔지 공연히 따져보고 싶었다. 나는 고개 돌린 상태고 너는 위에서 아래로 조금 시선을 내렸다. 이것은 누가 먼저 말을 건 형태일까 고민하다가 애당초 먼저 돌아본 죄를 퍼뜩 인지하니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나는 숨을 흐읍 들이마셨다. 움직이기 위한 준비. 고개를 돌리고 싶다. 괜스레 그녀 옆 다른 곳을 흘낏 보았다. 살아남아야 한다. 마치 목이 결리니까 푸는 것처럼 여기저기 둘러볼 겸 뒤도 돌아보고 그 옆도 보고 저기도 보고 여기도 보고. 그러니까 나는 특정 사람인 너를 쳐다본 게 아니라 불특정을 돌아보다가 얼핏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아아 아니구나, 잘못 봤구나, 하고 빠르게 시선을 거두는 동작으로 스르르 고개 돌려 다시 안내 벽보를 보는 처음으로 어물쩍 왔다. 돌아왔다. 나는 널 몰라. 자연스러웠나. 설령 자연스럽지 못했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곧 인생을 건 시험이 시작된다. 공무원 시험. 앞만 보고 뛰어도 모자란데 나는 왜 뒤돌아보았나. 돌아봤자 엉망인 청춘만 가득. 시선이 흩어졌다. 눈동자에 초점이 풀렸다. 모르겠다. 벽보를 봐도 가야 할 교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공부를 안 해서 잡생각만 늘었구나. 방금 내가 본 것이 확실한가. 진짜인가. 정답인가. 혹시? 너무 몰입한 나머지 헛것을 본 것인가 싶어 한 번 더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두 번째는 정말 돌아보지 말아야 했다. 차라리 궁금한 게 좋았다. 이 부분을 두루뭉술 잘 몰랐는데 내가 찍은 건 결국 오답이다. 오답 찍은 걸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냥 차라리 몰랐다면 마음이나 가벼울 텐데. 확인사살. 마침내 우리는 서로 네가 맞고 내가 맞구나 하기에 이르렀다. 별수 있나. 다시금 그녀 옆으로 뒤로 정물화의 정물과 여백을 동일시하는 시선 처리를 했다. 모르는 척. 나는 그대로 앞장서 시험장으로 들어갔고 만남은 그것으로 끝났다.


시험 보는 내내 그녀 생각을 하느라 분주했다.

시험 보러 왔구나. 내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대기업에 다닌다고 했는데 왜 시험을 보러 왔을까? 아무튼, 그녀가 합격하고 내가 떨어지면 어쩌지? 하는 난제가 전광판의 광고처럼 시험지 위에서 번쩍거렸다. 진작 인연은 끝났지만 단순하게도 나는 나만의 세상 안에서 답을 찾아 헤맸다. 좀 더 멀찍이서 관찰해야 했는데. 답은 어디에 있나. 여기에 있긴 있을까. 의문만 가득. 시간을 꽉 채워 간신히 문제를 풀었다. 공들여 공부했던 시간은 죄다 어디로 갔는지, 기억 밑으로 고스란히 묻혀 찾을 길이 없다. 준비했던 시간은 공부를 위함이지 시험을 위한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대강 쓱 읽고 감으로 찍으며 넘어갔다. 불안이 엄습하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샤프를 데구루루 내려놓았다. 사인펜으로 답안지에 마킹했다. 돌이킬 수 없다. 나는 나무다. 움직이지 못하는 개체이기에 보이는 풍경 외의 세상을 모른다. 보이는 게 전부다. 마킹은 이파리 중 마음이 가는 것을 찍는 것이었고 사인펜은 줄기였다. 줄기는 나를 지탱하는 근간. 믿을 수밖에. 시험지에 적은 번호를 보고 급히 손을 놀렸다. 집중해야 할 시각. 곧 종료 종이 울릴 테다. 나는 무아지경에 빠졌다. 2번 문제에 4번, 3번 문제에 4번, 4번 문제에도 4번, 5번 문제에도 어라? 젠장, 4번이라고 풀었네. 미치겠다. 어떡하지? 어딘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정답이 연속해서 같은 번호가 네 차례나 나올 리 만무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시간이 없다. 그녀도 이 문제를 나처럼 풀었을까? 연속해서 네 번이나 같은 답이 나올 수 있나, 새로운 유행? 시험 주관자가 변태인가, 라며 고민하고 고민했다. 고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나는 끝내 답을 고치지 않아 낙방했다. 어디서 정보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시험에 합격했다고 했다. 나는 서울로 상경했고 이번에도 내가 어디서 입수했는지 모를 정보에 의하면 그녀는 경남 하동 북천에 발령받았다고 했다. 결혼한 뒤라고도 했다.




인생은 길다.

긴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 만나는 것보다 생각한 시간이 더 길면 생각은 상상이 되어 실제에서는 도리어 어색해진다. 첫사랑을 오랜만에 만나면 으레 그런 것처럼. 오랜 시간 그려왔던 모습과 사뭇 다를 수밖에 없기에 실망은 필연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데 단지 실망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실망이라는 단어를 거론하는 내 의지는 그것이 대부분 거짓말임을 안다. 나는 자신을 속이고 죽였던 사람을 또다시 죽이고 무덤 만들어 고개 한번 숙이고는 힘차게 발길 돌려 버렸다. 나를 살리고자 지나간 시간으로부터 무참히 고개 돌려 버렸다.


나는 그녀를 보고 다시 모른 척할 것이다.

북천에 방문하는 우리 직원은 스무 명 남짓. 북천의 관리자로 일하는 그녀는 나를 발견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반갑습니다, 하고 악수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고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지나쳐버린 인연이라 말을 걸 수는 없다. 그저 돌아볼 뿐이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는 사이가 아니기에 개인적인 안부도 묻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녀를 쏘아볼 것이다. 너는 죽었다. 그러면 그녀 또한 나를 뭉근히 지켜볼 것이다. 내가 과연 저를 아는 척하는지 한순간도 놓칠세라 지켜볼 터다. 그녀는 내가 직원들과 다음 코스인 ‘하동 짚와이어’를 타러 갈 때까지, 이다음에 또 봅시다, 시치미 뗀 인사를 하고 손 흔들며 안녕할 것이다. 나는 버스에 올라 가만히 눈 감는다. 그리고 특이하게 중얼거린다. 구렁이가 드디어 하늘에 가는구나.


북천에 가면 오래된 기찻길이 있다.

오래도록 달렸지만 더는 달릴 수 없는. 쭉 뻗은 모양새가 가슴 떨리게 한다. 코스모스와 바람개비가 가지런하여. 녹슨 기찻길까지. 이제 달릴 수 없다는 걸 아는데. 그런데 그러한데 언제라도 금방이라도 달릴 것만 같아서.


삶과 죽음, 평범한 것과 특이한 것, 아는 척과 모르는 척, 그녀가 근무하는, 그녀는 벌써 죽어 바람이 되었는데, 드디어 그녀와 만나다니.


막상 당신과 마주치면 나는 그대로 멈춰서 버릴 거야. 몰라. 모르겠어. 왜 이러는지. 그저 지나간 나날. 다시 만나는 거 같아서. 당신을 보면 오래전 그날 내가 나타나 나를 가로채. 그럴 거 같아.


너도 알겠지.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라 어쩌면 나였던 내가 아닐지.


그, 그래 나야. 저, 저기, 나 알아보겠니? 오랜만이다. 이 한마디 후 잠시간 말이 없다. 지켜본다. 마주 본다. 고개 숙인다. 시선 돌린다. 딴 곳을 본다. 어떡하지. 오랜만이라는 한마디로 뭉뚱그릴 수 없는 틈새가 지나간다. 애써 용기 내 다시 본다. 마주 본다. 그러고 말한다. 자, 잘 지냈니? 나도 잘 지냈어. 대답을 기다린다. 쳐다본다. 다시 고개 숙인다. 어딜 봐야 해? 이제 무슨 말을? 그, 그럼 잘 지내. 또 보자. 안녕. 그제야 그녀가 쳐다본다. 응시한다. 눈 마주친다. 인사한다. 아, 안녕. 그래 오랜만이다. 나 기억나니? 그러고 보니 우리 참 오랜만에... 인사하네. 그래, 왠지 낯설다. 꼭 네가 아닌 거 같은. 나도 내가 아닌 거 같은데. 마주 본다. 고개 숙인다. 시선 돌린다. 딴 곳을 본다. 안돼. 지금 아니면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서둘러. 소중히. 간절한. 바보. 안타까운. 야속한. 정신 차려. 다시 쳐다본다. 눈 마주친다. 보인다. 당신이. 당신의 얼굴이. 당신의 얼굴이 내 앞에 가까이. 당신의 얼굴이 내 앞에 가까이 존재하는 게 정말일까. 당신의 얼굴이 내 앞에 가까이 존재하는 게 정말일까라고 자꾸 되묻게 된다. 지금 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기분. 붕 뜬 그림. 현실에서 나는 영화를 본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된다. 당신의 얼굴이 내 앞에 가까이 존재하는 게 정말일까라고 자꾸 되묻게 되는데 아무 대답도 없고 묻다가 어쩐지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아서.


글쎄, 그랬던 것처럼 또 지나고 나면 그 장면이 떠오르겠지. 눈감는다. 생각한다. 재생된다. 나타난다. 내가 본 장면. 나는 어떻게. 그리고 너는 어떻게.


하하하.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올해 북천의 축제에는 찬 바람이 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