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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된 ‘캠프 데이비드’ 가시밭길 앞에 선 韓美日

by 정중규

추억이 된 ‘캠프 데이비드’ 가시밭길 앞에 선 韓美日 /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트럼프는 韓·日 향해 연일 압박

日은 차기 총리에 강경파 예상

북중러 밀착 속 3국 공조 위기


지난 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항일전쟁 80주년 전승절’ 열병식은 동북아 세력 구도의 급격한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줬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나란히 천안문 망루에 올라 북·중·러 3국 결속을 과시한 것이다.


이는 2년 전 미국 메릴랜드주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3국 협력 체제가 정식 출범한 장면과 대비됐다. 한·미·일 정상이 다자회의에서가 아니라 3국 협력을 위해 별도로 모인 것은 처음으로, 세계 GDP와 교역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자유민주주의 협의체가 탄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캠프 데이비드 체제를 이끌었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모두 퇴장했다. 올해 2월, 4년 만에 재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에 대한 ‘동맹 압박’ 기조를 드러내며 새로운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에도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주한 미군과 주일 미군에 대한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 조지아주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근로자 300명이 미 이민 당국에 체포·구금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며 단속을 정당화했다. 동맹국을 향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다. 뒤늦게 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수습에 나섰으나, 한국에선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


◇동맹 때리는 트럼프, 신사 참배 日총리 후보… 더 꼬이는 한미일 공조


이뿐만 아니다. 7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전격 사임을 발표하면서 일본의 대외 정책 연속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본 정계에서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상과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된다. 두 사람은 중요한 시기마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논란을 불러왔다. 특히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지난 8월 한국을 방문한 직후, 광복절 당일 현직 장관 신분으로 야스쿠니를 참배해 반발을 샀다.



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곳으로, 한국과 중국이 꾸준히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왔다. 차기 총리가 보수층 결집을 위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이어가는 한, 한일 관계는 경직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는 한·미·일 3국 정상 외교로 어렵게 복원한 협력 분위기를 위협하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윤덕민 전 주일대사는 “북·중·러 독재 연대가 강화되는 가운데 트럼프의 미국우선노선으로 한·미·일 협력이 흔들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어설픈 균형 외교와 감성적 민족주의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기에 냉철한 현실주의적 사고에 입각한 외교 정책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제도화된 협력 체제 위기


2023년 캠프 데이비드 합의 이후 한·미·일은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다. 3국은 안보·산업·기술 전반에 걸쳐 협력 방안을 제도화했다. 대통령부터 장관급까지 여러 협의체를 가동해 연중 대화를 이어가는 체제를 구축했다. 당시 미 행정부 관계자는 “모든 부문의 DNA에 3국 협력 관계를 내재화하고 이를 ‘뉴 노멀’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의 핵·미사일·사이버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매년 3국 연합 훈련을 실시하고 글로벌 차원의 공조도 강화됐다. 8일 10년 만에 일본 방위상이 방한한 것도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의 성과였다.



그러나 트럼프 2기 출범 후, 이러한 제도적·군사적 협력 틀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비관론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전 세계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한다. 다자 협력 체제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는 양자 관계에서 풀려고 한다. 한미 동맹에 대한 애착도 별로 없다. 새로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한 번 만났을 뿐, 아직 신뢰 관계가 굳게 형성되지 않았다. 일본의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들은 한·미·일 3국 공조와 한·일 협력을 강조했던 기시다 전 총리, 이시바 현 총리에 못 미친다.


이런 상황에서 3국 정상회의를 다시 개최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회의론이 제기된다. 특히 미국의 동맹 압박과 일본의 정치 불안정이 겹치면서 3국 공조는 더욱 복잡한 국면에 접어들 수 있다.


송승종 대전대 특임교수는 “중국이 급속히 부상하는 상황에서 한미일 3국 협력을 강화해야 하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국에 대한 고율의 관세 인상, 조지아주 한국인 직원 급습 등의 ‘마이 웨이’로 미국이 이끌어 온 다자 협력 체제가 약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북·중·러는 더욱 공고한 연대를 과시하고 있다. 베이징 열병식에서 세 정상이 나란히 선 장면은 단순한 의전이 아니라 공동 전선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2024년 6월 러시아와 북한은 상호방위 조항을 포함한 포괄적 동맹을 체결했다. 북한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단거리 탄도미사일과 탄약을 제공하고 일부 병력까지 파견하기도 했다. 최근 아프리카, 남미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있는 중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강화하는 추세다. 북·중·러의 결속은 과시용을 넘어 실질적 협력으로 발전하며 제도화할 조짐도 보이고 있다.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 정부가 나서서 주도적으로 외교적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재천 서강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도 북·중·러 3국이 모인 중국의 전승절 행사를 보며 느낀 것이 있었을 것”이라며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한·미·일 협력이 부진한데, 이럴 때 우리 정부가 3국 협력 체제를 견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장도 “북·중·러의 결속은 오히려 한·미·일이 긴밀히 협력해야 할 근거를 보여준다”며 “이재명 대통령이 10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등을 계기로 제2의 캠프 데이비드 회동을 성사시킨다면 큰 외교적 성과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상당수 전문가는 이번 기회에 영국과 유럽연합(EU)과의 관계 증진을 통해 외교 다변화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중심의 세계가 저물고 있기에 한미일 3각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처지가 비슷한 유럽 국가들과 준동맹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유럽이 여전히 국제 규범을 만들고, 세계의 여론을 움직이기에 유럽과의 관계 강화가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재승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은 “과거엔 한미 동맹에만 ‘올인’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하나라도 더 힘 있는 우방 국가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며 “‘포스트 아메리카’ 시대에 유럽의 30여 국가와 함께 군사 안보, 경제 안보 대책을 상시 논의하는 관계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캠프 데이비드 3국 정상회의


2023년 8월 18일 미국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3국 정상회의.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만나 ‘캠프 데이비드 정신’과 ‘캠프 데이비드 원칙’을 채택했다. 3국 정상회의만을 위해 별도로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매년 정상회의와 장관급 회의를 열기로 해 외교·안보·경제·기술 분야에서 준(準)동맹 수준의 3국 협력 체제가 출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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