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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중규 Oct 30. 2022

왜 ‘세 모녀’인가 / 정중규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

제3의 송파·수원 세모녀 사건, 어떻게 막을 것인가?


왜 ‘세 모녀’인가. / 정중규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 정책실장 


노자의 도덕경 73편에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 곧 하늘의 그물은 크고 성긴 듯하지만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처럼 하늘의 그물망은 촘촘하다는데, 우리 대한민국의 사회안전망은 아직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복지사각지대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내가 국민의당 시절 장애인위원장으로 선거 때만 되면 복지 관련 선거공약을 함께 만들면서 늘 ‘촘촘한 복지’를 내세웠지만 아직도 우리의 복지는, 촘촘하지 못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힘없는 자들을 더욱 힘없게 만들고, 아픈 사람들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소외된 자들을 더욱 소외시키는, 다시 말해 가진 자는 우대하고 가난한 자는 홀대하는 부우빈홀(富優貧忽)의 사회, 존경하는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악마의 맷돌’이라 칭한 대로 서민들의 삶을 옥죄는 비인간적이고 반공동체적인 장치들이 산재하는 이런 사회에선 당연한 결과다.  


특히 지난 3년에 걸친 코로나19 사태로 내수 경기가 급속하게 위축돼 소상공인·영세자영업자들이 줄줄이 폐업 위기에 몰리고, 실업자가 양산되면서 서민들의 삶의 질은 더욱 급전직하 추락하고 있다. 부익부빈익빈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대거 발생하는 빈민층 곧 가난한 이들로 인해 이 사회엔 살아도 죽은 것 같은 목숨들이 너무 많다. 우리 사회의 희망이 죽어가는 그들을 다시 살리는데서 시작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폐단은 한번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더 이상 기어 올라올 수 없는 절벽사회, 패자부활전이 용납되지 않을 만큼 가난한 이들을 짓밟는 사회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OECD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국가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심각한 것이 오늘 토론회의 주제인 가난한 이들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빚는 ‘가족 동반 자살’이다.  


가족은 인간 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최소의 단위이자 그를 보호하는 울타리다. 동시에 가족은 사회라는 조직을 이루는 세포다. 사람이 그 몸의 세포들이 하나둘 죽어가면서 그 생명을 다해 죽음을 맞이하듯이, 사회라는 조직을 이루는 최소단위 세포인 가족 그 울타리가 심각하게 훼손당해 죽으면 그것은 사회공동체 붕괴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건강한 개인이 있어야 건강한 가족이 있으며, 건강한 가족이 있어야 건강한 사회가 되는데, 최근에 유독 가족 전체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잇따르고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사회공동체가 얼마나 취약해지고 있는가를 반증하고 있다.   


‘가족 동반 자살’도 문제지만, 저는 ‘세 모녀 사건’에서 보듯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여성들의 비극에 주목한다. 왜 ‘세 모녀’인가. 2014년 송파 세 모녀와 청주의 세 모녀 사건, 2018년 사망 후 5개월 만에 발견된 증평 모녀 사건, 2019년 성북구 네 모녀와 탈북 모자 사건, 얼마 전 우리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2022년 수원 세 모녀 사건 등등 이처럼 동일한 패턴의 비극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여성들이 빈곤과 여성차별이라는 이중질곡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아직도 굳건한 가부장사회에서 남편이나 아버지 같은 남성 가장이 부재한 여성들만의 가정일 경우 얼마나 취약한 상황으로 빠져 들어가는지가 드러난 것이다.  


또 하나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구축한 사회보장체계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긴급복지지원제도조차 신청을 기피할 만큼 우리 사회에 편만해 있는 가난한 이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다. 송파 세 모녀나 수원 세 모녀들 역시 도움 받는 것을 기피했는데, 이런 현상은 마치 영국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2016)’를 떠오르게 만든다. 이 영화는 켄 로치 감독의 “사람들에게 ‘가난은 너의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잔인함이 문제다”라는 말대로 가난한 이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관료적 복지제도의 폐단을 짚고 있다. 약자와 소외계층의 안전망이 되어야 하는 복지정책이 공무원을 비롯한 공급자 위주의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전락한 영국의 복지현실을 비판하고 있는데, 우리의 복지제도 역시 그런 측면이 없지가 않다.  


가난은 진정 나라도 구제 못하는가. 대한민국이 GDP 3만 달러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지금, 아니라고 본다. 국가는 국민 모두가 최소한의 삶의 질은 보장받을 수 있을 정도로 뒷받침을 해줘야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보지만, 적어도 천부인권이 가난에 의해 훼손되지는 않아야 한다. 가족이나 가정이 경제적 이유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마음먹을 정도로 힘들어 질 때 국가와 사회공동체가 나서 그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물론 그를 위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있지만 부양의무제 등 제도 자체의 미흡함으로 복지사각지대를 양산하면서 가난한 이들에겐 완벽한 사회안전망은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급격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파생된 불평등 문제로 사회안전망이 구멍 날 때마다 역대 정부는 그 피해자의 이름을 딴 법을 만들었다. 이른바 ‘세모녀법’이라 칭하는 ‘긴급복지지원법’도 그렇게 탄생되었다. 오늘 발제자께서 긴급복지지원제도의 개선 과제로 제시하신 비대상자 등록 처리 기준 개정, 지역별 이웃공동체 제보 참여 활성화 대책 마련, 시군 사회복지공무원 업무 지원 인력 확보, 광역시도 별 위기가구 ‘끝까지 추적하는’ 추적전담팀 구성, 경찰과 협조 체계 구축 등에 저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비극적인 사건이 터진 후에야 사후약방문식 입법이 이뤄지거나, 긴급위기상황에 처한 이들에 대한 응급조치도 필요하지만, 그보단 가난한 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려는 상황에까지 가지 않도록 하는 예방조치가 더욱 필요하다. 긴급복지지원 시스템 강화 같은 단기적인 대책과 더불어 장기적인 예방 차원에서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을 보듬으며 공동체 회복을 통해 사회적 면역력을 강화시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게 주어진 새로운 도전다. 


도시의 주거형태가 대부분 아파트라 그렇겠지만, 이웃이 사라져버린 공동체 붕괴 현실이 이러한 ‘세 모녀 사건’ 발생의 근본 원인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이웃 관계가 거의 단절되어버려 각자가 섬처럼 되어버린 이 시대에 공동체 의식을 되살리는 길을 아파트단지라는 특수한 주거환경에 맞게 찾아가야할 것이다. 반상회나 주민자치회 같은 시스템을 제대로 운영 강화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다. 주위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과 특히 복지사각지대에 있는 이웃들에 대해 평소에도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고 그들의 약한 목소리에 정부와 사회 구성원은 세심하게 귀기우리며 응답하는 그런 공동체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바탕이다. 


지구상 어느 국가보다 양극화 현상이 심각한 대한민국에서 발생하는 ‘세 모녀 사건들’은 우리 사회가 재구조화에 나서길 촉구하고 있다. 특히 가난한 이들에겐 더욱 극심한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인류가 지구촌이라는 한 배를 타는 공동운명체임을 절실히 느끼게 만들었던 코로나19 펜데믹 시기, 다가오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를 우선으로 삼아 더불어 살아가라는 각성과 연대의식 그 새로운 여정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 속에서 생존경쟁을 펼치며 승자독식의 이기주의가 정상인 것처럼 여겼던 이제까지의 사회와는 달리, 이웃의 아픔과 함께 하는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받고 있으며 지금 우리 모두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런 거룩하고 큰 싸움의 시간에 접어들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공동체 의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산업화 이전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는 그야말로 전통이었다. 서로 돕고 협동하는 공동체 연대의식으로 충만했던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복지 분야에 해마다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자되고 있지만 여전히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이웃들이 왜 생기는지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생각해야할 것이다.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지난 60년간의 경제성장은 대단했다. GDP 규모는 이제 전 세계 10위 안에 들어가고, 1인당 소득(GNI)도 서유럽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다. 얼마 전에는 미국 시사주간지 ‘US뉴스&월드리포트’가 발표한 2022년 세계 국가별 국력 순위에서 대한민국이 일본을 앞질러 독일과 영국에 이어 6위에 올랐다. 또한 2021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총회에서 선진국으로 격상되면서 대한민국은 1964년 UNCTAD 창설 이래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유일한 나라가 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부르는데 흔쾌함이 들지 않는데, 바로 세 모녀 사건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등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붕괴 해체 당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목도하고 실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욱 큰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갈수록 가난해지고 그 수가 많아지고 있다. 거기 우리 민족의 고유한 공동체 정신 그 전통을 되살리고 사회안전망을 튼튼히 하여 대한민국을 명실상부한 선진복지국가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정종현 시인의 ‘섬’이라는 시에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표현을 나는 참으로 좋아하는데, 그처럼 섬처럼 각자 고립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 섬과 섬을 잇는 다리를 부지런히 놓도록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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