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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중규 Jul 04. 2023

양향자 의원의 신당 '한국의희망'의 의미 / 정중규

호남의 세속화 그 토대가 되기를

호남의 탈이념화, 더 정확히는 호남이 '민주 성지'라는 자부심에서 탈피하지 않고는 적대적 진영정치 그 늪에 빠져있는 대한민국 정치의 정상화는 불가능하다고 나는 보고 있다.

그런 내게 지난 6월 26일 출범한 정치인 양향자 의원의 신당 '한국의희망'은 어쩌면 '5.18을 내세우지 않고 탄생한 첫번째 호남 정당'이라는 의미에서 각별한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물론 '한국의희망'은 당연히 호남만이 아니라 전국정당을 표방할 것이고 당연히 그리해야겠지만, 일단 여기서는 호남과 연관지어서만 논의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오래 전부터 공감하고 있는 김욱 교수의 '호남의 세속화' 실현 그 첫걸음으로 여겨지기에, 비록 내가 직접 동참하지는 못하지만 그 정치적 성패 여부를 떠나 진심으로 지지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래서 어제 현장에 가서 양향자 의원과 최진석 교수께 직접 축하와 응원을 보냈다.

양향자 의원의 신당 '한국의희망'의 창당 정신은 윤석열 대통령이 5.18기념식에 두번씩이나 참석해 호남의 미래 그 비전 곧 "오월의 정신을 구현하고 민주영령들께 보답하는 길"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와 창의와 혁신의 정신으로 산업의 고도화, 경제의 번영을 이루는 것"으로 거듭 제시한 것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까닭이다.

2010년이었다. 대구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평생을 보낸 골수영남 사람인 이 정중규가, 민족작가회의 회원들과 함께 5.18 기념식에 참석하려고 88고속도로를 타고서 처음으로 광주를 방문하고 거기서 1박2일 동안 갖가지 행사를 치르며 광주시를 돌아다녀보면서 깨우친 것이 그것이었다.

국도 수준의 고속도로, 광주 시가지의 낙후, 겉으로만 봐도 너무나 확연했던 영호남의 경제적 격차를 재확인하면서 근본 해결책은 '호남의 산업화' 곧 김욱 교수가 말한 '호남의 세속화'뿐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국민의당과 바른미래당 창당에 함께 하면서까지 영호남 통합을 위해 애를 쓴 이 정중규가 진심으로 하는 쓴소리이지만, 광주와 호남도 이제 스스로를 옭가매 고립시키는(비록 정치적으론 이해는 되지만) 옹졸한 몸짓에선 벗어날 때가 되었다.

내가 오래 전부터 수없이 얘기했지만, 번번히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는 호남의 열악한 현실을 궁극적으로 개선하는 첩경은 '민주 성지'를 고수하는 것보단 지역경제를 살리는 것이다. 아래의 김욱 교수의 '호남의 세속화' 주장에 공감했던 이유다.


극단적으로 표현해 5.18유공자들이 받는 연금이나 그 자녀들이 취업시 받는 가산점 같은 특혜가 광주와 호남인들의 살림살이에 얼마나 보탬이 될 것인가. 그보단 대기업 공장 하나를 짓는 것이 호남 경제엔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아닌가.

호남인들이 선거 때마다 몰표를 던지며 따르는 친노친문, 더 나아가 민주당 세력이 과연 그리했던가? 오히려 민주성지로 칭송하고 내세우며 정치적으로 '표밭'으로 이용만 할 뿐, 그들이 호남지역경제 살리기에 나서며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적이 있던가. 그래서 내가 친노친문 세력에 분노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호남인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와지면 그들을 버릴까, 그러면서 '영구적이고 불변하는 표밭'을 잃어버릴까 싶은 얄팍한 두려움 때문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 호남인들이 손잡을 상대는, 빚좋은 개살구인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보다는, 경제를 살릴 '재주'가 있는 보수정치인들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지역경제만 살아나고 호남인들이 산업화 이전의 지난 시절처럼 경제력만 지니면 과거의 상처들마저 실질적으로 아물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5.18의 상처는 그렇게 치유되는 것이지 그냥 진상규명만 이뤄진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이 영남, 특히 내 고향 대구에서도 그대로 이뤄졌다. 대구는 해방공간에서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릴만큼 좌편향으로 이념 갈등과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고, 그에 따라 '1947년 10월 대구사태'나 5.18 이상의 좌우진영간 대규모 양민학살 등 비극적인 사건들이 다수 발생했다. 모든 이념 갈등이 그러하듯 그 모든 것 역시 외형적으론 좌우대립인 것으로 보이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 더 깊이는 절대빈곤이 빚은 참사였다. 대구사태 역시 식량 배급 문제에서 비롯되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박정희라는 대구 출신 대통령이 배출되고, 그의 경제성장 드라이브 정치의 중심지로 고향 대구(를 비롯한 영남)가 선택 받으면서 경제발전의 최대 수혜지가 되자, 극한의 이념 갈등도 수그러들었다. 오히려 해방공간에선 지금의 광주와 비슷하게 정치적으로 게토화 되어 있던 대구가, 어느덧 대한민국 정치경제의 중심세력으로 우뚝 서게 될 정도였다.


또한 며칠 전 윤석열 대통령이 방문해 공급망 동맹을 맺었던 베트남의 경우도 그렇지 않는가. 그들이 한 때는 서로 총구를 겨누었던 적국이었던 대한민국과 경제적 동맹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도 이념을 넘어서는 실용주의로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광주와 호남이 산업화 이전 시대의 그 풍요로운 땅으로 다시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다. 과거의 풍요가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면, 이젠 신성장산업으로 호남지역의 경제를 살려야 할 것이다.

마침 글로벌 첨단기업 삼성전자의 히어로 출신인 정치인 양향자의 도전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호남이 5.18 트라우마를 온전히 치유 받고서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한걸음 더 발돋움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다.

김욱 교수의 <아주 낯선 상식> 중에서


광주는 흔들리고 있다. 욕망을 거세당한 채 ‘신성 광주’를 믿고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잃어버린 욕망을 찾아 ‘세속 광주’를 회복해야 하는는가? 예수나 부처가 아닌 인간들이 살아가는 도시인 광주는, 호남은 유사 이래 존재했던 다른 모든 세속 도시들처럼 욕망을 표출하며 살아갈 권리가 없는 것인가? 그렇게 똑같이 살면 다른 지역민들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지만 호남만은 죄를 짓는 것인가?


기억 속의 ‘신성 광주’에 대한 그런 찬양이야말로 ‘세속 광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의 호남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란 점도 자명하다. 물론 그 압박감을 이용하려는 정치세력에겐 ‘신성 광주’야말로 더 없이 훌륭한 세속적 욕망의 온상이 될 것이다.


자의건 타의건 5.18은 굉주가 욕망을 거세당한 근원이다. 나는 욕망을 거세당한 광주가 그 욕망을 다시 찾기를 바란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에 더 이상 치욕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광주가 욕망만으로 살기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욕망 없이 살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호남은 할만큼 했다. 죽은 사람들만큼은 아니라도 산사람들로서는 할 만큼 했다.


민주화 과정 속에서 발현된 것만을 따져도 그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연대-분열은 가장 유명하다. 3당합당 이후에도 계속된 김대중과 (3당합당을 거부한 1990년, 새정치국민회의를 거부한 1995년) 꼬마민주당의 연대 ·분열, 노무현의 집권 이후 벌어진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연대 분열, 그리고 최근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노와 친노의 연대·분열, 이 현상은 결코 우연한 내분이 아니다. 이는 수십 년간의 뿌리 깊은 족보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정치사의 숙명적 연대·분열이다.


현재 영남 친노세력은 영남권 지지를 토대로 극우 이데올로기에 편승하는 새누리당을 거부한 정치인들이다. 반면 호남세력은 극우까지는 아니어도 성향상 상당히 보수적인 정치인들부터 개혁적인 정치인들까지를 모두 망라한다. 따라서 그 이미지가 영남 친노세력보다는 다소 보수적인 느낌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단지 이런 느낌을 가지고 친노/비노의 분열을 무슨 진보/보수의 분열처럼 포장하는건 의도를 가진 대중적 이미지 조작에 가깝다.


‘분열하면 진다’는 겁박이 통하려면 최소한 ‘분열하지 않으면 이긴다’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승리를 통해 분열하지 않은 세속적 대가를 얻을 수 있어야만 한다. 위선 떨지 않고 말한다면 호남이라는 지역단위로 투표했으므로 호남도(영남이 수십 년을 악착같이 그랬던 것처럼) 지역(출신) 단위의 대가를 얻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분열하면 진다’는 주장은 문자 그대로 한낱 부질없고 비겁하고 위선적인 겁박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면, 즉 ’분열하면 진다’는 주장이 ‘호남은 세속적 이익과 무관하게 지역단위 전체가 새누리당이라는 절대악에 맞서야 할 의무로만 새정치민주연합에 투표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그 주장은 호남의 욕망을 거세하는 부도덕한 정치적 선전구호일 뿐이다.


2002년 대선기간 때, 영남사람 노무현이 보기에 “호남-충청-강원지역 이 연대해서 영남지역을 포위하면 이길 수 있다는 지역 분열구도"(충청의 이인제 후보에 대한 호남의 권노갑 지원)는 “민주당의 자기정체성을 부정하는” 악이었다. 그리고 2007년엔 호남 정치인이 출마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지 못”한다고 강변한다. 그의 정동영에 대한 태도를 보면 심지어는 호남정치인이 출마해 동서대결 자체가 되는 것조차 싫어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대한민국 정치는 당연히 (친)영남후보가 나설 수밖에 없는 한나라당과 역시 영남후보가 나서야만 하는 열린우리당의 양대산맥이 되어야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노무현식 선진적 지역주의 해결책이었다.


호남은 김대중에게 어느 한 때 잠시 몰표를 던진 것이 아니다. 호남은 그가 출마한 1987년 대선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는 1997년 대선까지 3번의 대선과 3번의 총선에서 상상을 초월히는 몰표를 던졌다. 이 몰표에 대한민국은 기가 질렸다. 1980년 광주학살 이후 1997년 대선 승리 때까지 영남패권주의 대한민국에서 호남을 대변하는 김대중이 받은 정계은퇴 압박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호남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히는가. 영남의 비새누리당세력, 개혁·진보세력, 여타 잡다한 모든 정치세력들이 호남을 대변하려는 정치적 욕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통합추진회의 노무현이 ‘양비론(3김청산론)'을 앞세워 김대중을 제거하는 전략을 포기하고 ‘김대중당’에 참여하는 굴복을 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한마디로 김대중을 제거하려는 세력에 대해 호남은 ‘우리는 김대중이 죽을 때까지 김대중을 몰표로 지지할 테니까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하든지 말든지 선택하라’고 요구한 셈이었다. 유사 이래 최초의 반영남 패권주의 정권교체는 그렇게 이뤄졌다.


총선 때마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행사지만, 정동영의 사례는 자못 상징적이다. 정동영은 1996년(15대)과 2000년(16대)에 전주 덕진구에서 재선된다. 그는 2004년(17대) 총선 때는 전주 지역구에 출마하지 못하고 비례대표 후보가 되지만 이른바 ‘노인펌훼’ 발언으로 사퇴한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정동영은 민주당 출범 뒤인 2008년에 전주가 아닌 서울 동작을에 출마할 수밖에 없었고, 낙선한다. 2009년 4월 재보궐선거 때는 전주에 출마하려 하지만 불출마 압박을 받는다. 그는 탈당해 전주 덕진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지만 2010년 2월에서야 겨우 복당을 허락받는다. 그는 2012년(19대)에 역시 호남지역구에서 축출돼 강남을에 출마했지만 낙선한다. 한마디로 그는 세계 정치사에 유래를 찾기 힘든 ‘호남출신 중진의원은 호남지역에 출마하면 안 된다’는 반민주적 이데올로기의 흔하디 흔한 희생양 중 한 명이었다.


노무현은 민주당과의 법통을 끊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함으로써 영남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냈다. 열린우리당은 호남당이 아니니 지지해달라는 것이었다. 신기남은 "호남 소외론이 더 확산되고, 구주류가 신주류를 더 공격해야 한다. 호남쪽이 흔들흔들해야 영남 유권자들로부터 표를 달라고 할 수 있다'"고까지 노골적으로 발언했다. 그는 나중에 이 발언에 대해 호남표 줄어들까봐 전전긍긍히는 분들도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런 분들에게 한 말이었다"고 명확히 설명했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선대본부장을 맡은 그는 심지어 “민주당이 호남에서 지분을 가지길 개인적으로 바란다”면서 “그것이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는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에 맞다”고 주장하는 등 선거역사상 남의 당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는 초유의 선거본부장 역할까지 수행한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이데올로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열린우리당을 통한 지역문제 해결은 난관에 부딫힌 셈이었다. 열린우리당의 실패가 감지되자 열린우리당 정치인들은 현실적 대안을 내놓기 시작한다. 민주당과의 합당이었다. 부질없는 시도를 끝내고 합당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분열을 막고 득표력을 키울 것이라는 극히 이해타산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2006년 5월 지방선거 당시 문재인은 민주당과의 합당을 절대 반대하는 노무현의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한 바 있다... 노무현의 그 의지는 완전히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 흔적도 없이 좌초했다. 한데 아이러니한 것은 현재 문재인 등 친노세력은 어쨌든 그런 노무현의 신념을 이어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이어받기는커녕 호남에서 정당간 경쟁을 시도하려는 말만 나와도 그들은 기를 쓰고 분열이라고 외치거나 호남당을 만들 생각이냐며 매도한다... 난 이제 호남이 반드시 복수정당제를 쟁취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난 단언컨대 김대중(지지자)과 노무현(지지자)의 이념은 근원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즉 명백히 ‘김대중 정신'과 '노무현 정신’은 같지 않다고 본다. 우선 김대중은 ‘영남패권주의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반영남패권주의 지역연대인 DJP연대를 통해 집권했다. 반면 노무현은 ‘영남패권주의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실제론 실망스러웠지만) 영남의 표를 확장시켜 당선되기를 원했다. 당선 후 김대중은 자신의 약한 지역적 지지기반을 보완하기 위해 민주당을 기반으로 영남에 많은 정치적 지분을 할애했다. 반면 노무현은 자신을 공천해 준 민주당의 법통을 끊고 열린우리당을 창딩해 영남의 지지를 받으려 했다. 김대중은 야당인 한나라당과 타협적이었을 망정 한나라당에 정권을 내주는 차원의 대연정 같은 제안을 하지 않았다. 반면 노무현은 한나라당의 역사적 정당성을 공인하고 정권을 내주는 차원의 대연정을 제안하며 한나라당과의 ‘양대산맥’을 지향했다. ‘햇볕정책’ 때문에 김대중은 노무현에 반대하는 집회를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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