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산업 표준을 만드는 데 우선시해야 할 원칙은 ‘적정 규제’다. 진흥과 부작용 억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AI가 자율주행·의료·금융 등 각 업종으로 퍼져나갈 때 AI 사회제도화의 관리 표준(투명성·책임성·견고성 등)을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AI 산업을 키우려면 연성(軟性) 규제라야 한다. 표준 제도를 처음부터 구체적인 경성(硬性) 법령으로 못 박으면 스타트업의 AI 혁신 연구·개발(R&D)에 제동이 걸릴 우려가 크다. 유연한 윤리 및 가이드라인으로 모범 AI가 되도록 유도하는 지혜로운 정책 구사가 긴요하다.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신산업의 시장 파괴와 창조를 조화할 적정 개입의 균형 감각을 갖고 신속하게 제도를 정비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구 업계 갈등 속 ‘적정 규제’ 필요 = AI를 포함한 첨단산업은 치열한 경쟁의 현장이다. 신·구 업계 간 갈등도 클 수밖에 없다. 특히 파괴적인 AI 기술이 기존 산업의 기득권을 침해해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해 타협책을 마련해주는 적극적인 조정 기능이 요구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장 간 충돌이 변호사(로톡), 세무사(삼쩜삼), 의사(닥터 나우), 약사(쓰리알코리아), 부동산(직방)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빌리티 혁신 ‘타다’가 대표적이다. 택시업계와 충돌했는데, 국토교통부가 수수방관하면서 소송으로 치달았고 타다는 결국 사업을 포기했다. 반면 미국 우버는 벌금 부과 등 초기 갈등을 택시업계 기여금 조성 같은 정부 조정의 상생 모델로 이겨내고 글로벌 서비스로 정착했다. 한국 리걸테크 ‘로톡’은 바람직한 사례다. 대한변협의 123명 무더기 징계 조치를 법무부가 취소해 혁신에 날개를 달아줬다. 미국 리걸 줌과 일본 벤고시닷컴도 유사한 갈등을 겪었지만 오랜 논의 끝에 변호사단체와 타협점을 찾아 사업화가 진행 중이다. 미국 정부는 법률 시장의 디지털 플랫폼 규칙을 제정해 적극적으로 기준을 제시했다.
◇공공 규제와 민간 자율규제 간 조화가 핵심 = 이 때문에 AI 산업표준 제정 과정에서 꼭 지켜야 할 두 번째 원칙은 ‘공공의 적극 개입과 민간의 자율 규제의 조화’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민·관이 역할을 분담해 기존 업계와 혁신벤처가 공존하는 상생방안을 도출해야 전체 시장 파이가 커지면서 부작용은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 영역(정부·의회·법원)과 시장 진입·수호자의 3각 협력이 필요한 셈이다. 공공 영역이 시장을 지켜보다가 적정 시점에 적절한 강도로 개입하는 균형 감각을 발휘하면서 ‘규제’와 ‘진흥’ 사이에서 한국형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업계 내부에서도 자율 규제를 창출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위기의식으로 상생 방안을 찾아야 한다. 도전자 테크업체는 새 기술로 발생하는 실업 등 부작용을 줄이거나 대체할 만한 대안을 함께 제시할 의무가 있다. 기존 업체들도 디지털 혁신 서비스의 진입을 막으면 기득권 유지가 아니라 해외 플랫폼 기업에 국내 시장을 빼앗긴다는 현실에 눈떠야 한다. 지혜롭게 공존하지 못하면 구글, 애플, MS 등 글로벌 빅테크에 통째로 시장을 잠식당할 우려가 크다. 디지털헬스케어 관계자는 “환자들이 국내 의료기관의 원격진료 반대에 10년 이상 가로막히자 벌써 미국 등 해외 원격진료 업체로 눈을 돌리고 있다”며 “한국형 AI 의료 서비스를 못 만들면 해외 원격진료 서비스가 한국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AI 강국’ 위해선 산업별 표준부터 정비해야 = AI 표준 제정 작업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산업별 표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비를 해나가야 한다. 산업표준에도 국제·국가·업계·기업 표준의 여러 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가표준은 국제협상 무대에서 국제표준으로 도약을 노린다. 협회 등 관련 업체들이 모여 만든 업계 자체 표준도 있다. 가장 하위의 기업 표준은 이런 체계를 잘 따라야 산업화 도로를 쌩쌩 달릴 수 있다. 만약 규격을 지키지 않으면 주행 자체가 금지되거나 충돌 사고로 손해를 끼친다.
현재 세계적으로 AI 표준이 시급한 분야는 언어지능, 영상처리 등 AI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반 기술이다. AI 학습 및 추론에도 표준화가 미흡하다. 특히 글·그림·소리를 한꺼번에 입출력하는 멀티모달(multi-modal) 분야는 인간 수준의 범용 인공지능(AGI)으로 발전하는 길목에서 신속한 표준 정비를 요구하고 있다.
■ AI 스탠더드, 한국이 만들자(3)
“한국형 AI 표준 만들어 AI주권 확보해야”
■ 초거대 시장 속 韓의 대응
EU, 지정학적 이점 美·中 견제
日, 강점인 실용화 표준에 집중
“한국만의 인공지능(AI) 표준으로 AI 주권과 틈새 경쟁력을 확보하라!”
미국과 중국이 AI 표준화를 주도하는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오픈소스(open source)와 경량화의 새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리 기업과 정부는 강대국 틈새에서 빠르게 대응하고 있으나 제3세계 국가의 벤치마킹 대상이 될 만한 한국형 AI 표준을 만들려면 갈 길이 멀다. 김유빈 명지대 교수는 “마이크로소프트(MS)·구글 등 글로벌 빅테크의 AI 독점에서 벗어나 우리 말과 데이터로 학습한 K-AI 모델 제작으로 ‘AI 주권’을 지켜야 한다”며 “미국과 중국의 시장·패권형 AI 기술에 반감을 지닌 동남아·중동·남미 등 틈새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고유의 AI 표준으로 독자 경쟁력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AI 주권과 틈새 경쟁력을 가지려면 초거대 AI 열풍에 이은 제2의 트렌드인 오픈소스와 경량화에 주목해야 한다. 챗GPT, 바드, 빙을 비롯한 초대형 테크 기업들의 생성 AI는 엄청난 양의 학습용 빅데이터와 훈련용 그래픽처리장치(GPU) 반도체, 클라우드센터 운영 등에 천문학적인 돈을 쓰고 있다. 오픈AI는 클라우드센터 운영비만 하루 9억 원을 지출한다. 선두그룹 황새들을 따라가려는 국내 뱁새 기업의 가랑이가 찢어질 수밖에 없다. 네이버는 올 상반기에만 전년 대비 15% 증가한 1조 원의 AI 개발 비용을 퍼부었다.
이렇게 ‘초거대’만 시장에서 판을 치자 데이터 학습부터 모델 훈련, 배포까지 모든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오픈소스 모델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메타의 ‘라마’, 앨런인공지능연구소(AI2)의 ‘올모’, 스탠퍼드대의 ‘알파카’ 등이 대표적이다. 또, 대용량 반도체와 전력이 필요한 대형 AI 모델을 소비자의 저가·저용량 말단(edge)기기에서도 돌리기 위한 경량화 기술이 각광을 받고 있다. 라마, 알파카 등은 매개변수의 숫자를 초거대 AI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으로 줄이면서도 유사한 성능을 내는 ‘가벼운(light)’ AI의 대표 사례다. 김경훈 카카오 부장은 “우리나라처럼 강대국의 물량 공세를 감당할 수 없는 중견 국가는 향후 AI 모델 개발 시, 투명 공개와 경량의 2대 흐름을 적절히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AI 스탠더드, 한국이 만들자(3)
“K-컬처, ‘준법 AI’ 보호받아야 재도약”
■ 문화산업의 대처 방안
AI 저작권 침해 · 무한복제로
창의성 유린당하고 분쟁 폭발
한국의 음악, 영화, 드라마, 웹툰, 게임 등 해외 수출 K-컬처 상품도 ‘준법 인공지능(AI)’으로 재도약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류 문화예술 산업은 수십 년간 유사한 성장 전략과 수출 패턴이 반복되며 생기를 잃고 한계에 부딪혔다. 특히 생성 AI가 작년 말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면서 프로 소설가, 웹툰 작가, 작곡가들은 법적 저작권을 거리낌 없이 침해하는 AI 창작 도구 때문에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AI 저작권 침해와 디지털 무한복제에 인간 창의성이 유린당하면서 업계는 혼란에 빠지고 분쟁도 폭발했다.
이대희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오픈AI조차 학습자료를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어 침해당한 저작권자의 소송이나 당국의 규제 권리 행사에 방해를 받고 있다”며 “원고 쪽에서 피고가 무엇을 어떻게 침해했는지 어렵게 입증해야만 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공익에 해당하는 공정 이용과 TDM(글·데이터 채굴)에 대해 저작권 침해의 예외를 두는 것 말고는 현재 판례 등 규범이 형성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산업 전문가들은 저작권과 개인정보 침해가 없는 ‘양심 AI’의 표준을 먼저 만들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K-컬처의 약진이 이어지려면 법적 이슈 없는 투명공정 콘텐츠의 생산, 유통이 필수라는 것이다. 법무법인 디라이트의 조원희 변호사는 “AI 학습용 데이터를 퍼가는 크롤링(crawling)에 적법성을 부여하는 데 신문협회 등은 반대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는 자체 대형언어모델(LLM)을 개발한 세계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로, 향후 저작권법 개정 시 유럽연합(EU)의 규제 방식을 답습하지 말고 진흥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한 관계자는 “음원 시장에서 2000년대 초 고 스티브 잡스가 아이팟에서 유료 스트리밍 음악을 유통할 수 있도록 음반회사들과 협상해 상생의 아이튠즈 생태계를 창조해낸 전례가 있다”며 “창작자에게 지속 가능한 수입을 보장하는 동시에, 유통사·소매점 등 다른 이해관계자도 수익을 적절하게 받아가도록 배분하는 K-컬처 표준을 우리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