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들은 인공지능(AI) 표준 구축을 위한 자율 경쟁으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정부 규율은 이를 제대로 뒤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부처 간 AI 정책이 중복되거나 엇박자를 내면서 업계에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정부는 AI 관련 법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출발했지만 여야 대치 정국 속에 법안이 표류하면서 세계 최초의 영예도 뺏길 위기다.
27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 업계에 따르면 LG, 네이버, 카카오 등은 자체 AI 윤리 원칙에 따라 초거대 생성 AI를 제작했거나 제작하는 중이다. 국내 민간업체들이 공공 규제의 틀이 잡히기도 전에 개발을 서두르고 있는 것은 지난해 11월 놀라운 성능의 생성 AI 겸 대형언어모델(LLM) 챗GPT 3.5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챗GPT는 올해 마이크로소프트(MS)와 손잡으면서 생성형 AI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최근 비슷한 성능의 구글 LLM ‘바드’, 메타의 ‘라마’ 등 후발 주자가 등장했지만, 챗GPT의 승자독식 효과로 인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마찬가지로, 한국어와 한국 콘텐츠에 특화된 장점을 내세우지만 아직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도 세계적 흐름에 뒤처질 수 없기에 속속 한국형 AI를 발표하고 있다.
이에 산업부도 이 같은 민간 개발 속도에 맞추어 지난 6월 AI 국가표준(KS) 작업 차원에서 AI 윤리 표준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앞서 발표된 과기정통부의 AI 윤리 원칙과 중복되면서 부처 간 업무 조율이 잘되지 않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2020년 AI 윤리 기준을 처음 제정하는 등 우리가 선례를 만들고 있는데 (산업부가) 왜 뒤늦게 유사한 내용을 반복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정작 업계에서는 정부의 AI 개발 지침 및 윤리 표준에 대해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AI 관련 업체 대표는 “금시초문”이라며 “개발 과정에서 일일이 검토하기도 어렵다”고 토로했다.
국회가 제정을 추진하는 우리나라 AI 관련 법안도 올 연말 통과될 유럽연합(EU)의 AI 법안(AI Act)에 세계 최초 타이틀을 뺏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AI 법으로 통칭되는 ‘인공지능 산업 육성 및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법률안’은 2월 정필모·윤영찬 의원 등 7명의 의원입법 병합안으로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법안소위를 통과했으나 야당의 방치로 아직 통과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안은 총리실에 인공지능위원회와 신뢰성 전문소위를 두고, 정부는 고위험 영역 사업자에게 신뢰성 확보 조치를 의무화하는 등 국제 수준의 통제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진보네트워크센터·참여연대 등 인권시민단체들은 ‘우선 허용, 사후 규제’ 원칙이 AI 오남용을 부를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과거 데이터 관련법 제정 당시의 ‘늑장 입법’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당시 익명성을 적정선에서 보장한 가명 정보제의 도입이 경쟁국보다 늦어지면서 데이터 기반 서비스 사업에서 먼저 제품을 출시한 글로벌 빅테크에 우리 기업들이 시장을 빼앗겼다는 비판이 나왔었다.
전문가들은 연구·개발(R&D)과 사업화 간 구분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라 중복 분야에서는 적절한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AI 표준은 국제 표준, 국가 표준, 업계 표준 등 다양한 층위가 있는 만큼 ‘한국형 표준’의 전체 위상이 높아지도록 부처 이기주의를 버리고 대승적으로 상호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국제표준화기구(ISO) 회장 선거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회장(조성환 현대모비스 대표)이 당선되면서 한국이 AI 관련 국제표준 제정을 주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조 신임 회장이 내년부터 2년간의 임기 동안 AI 국제표준화 작업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박종열 서울과학기술대 교수(AI 표준 로드맵 작성위원)는 “여러 부처가 AI 업무를 추진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중복과 충돌, 예산 집행의 효율성 등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한국이 국제 표준 최대 공식기구인 국제전기통신연합(ITU)과 ISO/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등에 조기 참여해 의미 있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나 아직 남은 표준화 여정이 긴 만큼 국가 전략 마인드를 갖고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AI 스탠더드, 한국이 만들자(2)
“AI 지원, 美처럼 ‘네거티브 방식’으로 보완돼야”
빅테크계 “국가차원 지원 절실”
AI 문해력 강화 필요성 등 강조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자체 개발하는 국내 빅테크 업계가 무서운 속도로 치고 나가는 해외 기업들과 경쟁하려면 국가 차원의 AI 생태계 지원이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모은다. 정보기술(IT) 규제는 유럽연합(EU)이 아닌 미국을 참고해 네거티브 방식으로 보완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빅테크 업계 핵심 관계자는 27일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초거대 AI를 하나의 모델을 넘어 생태계를 만드는 기반 기술로 바라보고, 이에 맞는 투자와 지원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면서 “미국의 경우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 행정부로 넘어오면서 AI의 중요성과 동력이 약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미국 인공지능국가안보위원회(NSCAI)가 지난 2021년 3월 백악관과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는 국가 차원에서 AI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 좋은 사례로 꼽힌다. 미국은 이와 함께 클라우드 법안(ACT) 등을 제정, AI 산업의 핵심 요소인 데이터를 확보·보호하는 노력을 정책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도 지난해 12대 전략 기술에 AI를 포함하면서 대책을 수립하기 시작했다”면서 “다른 국가의 움직임을 고려해 훨씬 파격적이고 빠르고 강력한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교육 과정에서 AI 문해력을 강화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다른 빅테크 업계 관계자는 “개인의 초거대 AI 활용 역량이 업무 생산성을 좌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이를 위해 정책 전략을 수립할 때 실제로 초거대 AI를 연구·개발(R&D)하고 서비스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AI와 관련한 사회적 담론이 건강하게 형성되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전문가들과 함께 자체 AI 윤리 포럼을 만들어 운영 중인 네이버는 이 내용을 초거대 AI ‘하이퍼클로바X’ 개발에 반영하고 있다. 빅테크 업계 관계자는 “국내 IT 규제는 포지티브 방식으로 정해진 틀에서만 새로운 시도가 가능하다”며 “‘특정한 것만 가능한’ 방식이 아닌 ‘특정한 것만 빼고 가능한’ 네거티브 방식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필요한 규제와 그렇지 않은 규제가 무엇인지 일제히 살펴, 혁신과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AI 스탠더드, 한국이 만들자(2)
“표준 외교가 곧 국가경쟁력… 영향력 확대가 국익 직결돼” ‘국제표준화기구 AI 담당 한국대표’ 조영임 교수
“표준은 ‘기술의 법’입니다. 비유하자면 기술 발전의 고속도로죠. 고속도로에서는 교통규칙만 잘 지키면 어떤 차든 빠르고 안전하게 갈 수 있지만, 고속도로가 없는 곳에선 국도나 지방도로로 꼬불꼬불 가야 합니다. 험하고 잘못 갈 수도 있죠. 또 고속도로가 있는데도 규칙을 안 지키면 사고가 나서 나도 위험해지고 다른 차들에 연쇄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는 겁니다.”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 인공지능(AI) 표준을 담당하는 42 분과위원회(SC42) 한국 대표단장인 조영임(사진) 가천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표준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조 교수는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의 의뢰를 받아 6년째 표준 외교의 국제무대에서 맹활약 중이다. 조 교수는 SC42가 AI의 대표 국제표준기구로서, 필요하면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다른 기관과 ‘리에종(liaison·협력조직)’을 구성해 일하는데 점점 협력 요청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에 따르면 SC42는 기반 표준(foundational standard)·데이터·신뢰성·사용례 및 응용·AI 시스템의 컴퓨터공학적 접근법 및 특성의 5개 작업반으로 나뉘고, 세부적 기술보다는 국가 및 기업에 평가지표·윤리·인증 등 포괄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AI를 어떻게 평가·테스트하고 관리할 것인가, 챗GPT 같은 대형언어모델(LLM)을 경량화할 때 어떻게 해야 효율적인가 등 기업과 연구자들이 관심 있는 항목들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므로 규제라기보다 연성(軟性) 법에 가깝다는 것이다. 현재 56개국이 참여해 개발 완료 17종, 개발 중 30종 등 쉴새 없이 표준을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는 SC42의 특별위원회(AHG) 의장을 맡아 사용례 양식도 제안하며 정회원(P멤버)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준회원(O멤버)은 투표권을 주지 않아 회원국 3분의 2의 찬성으로 의결하는 표준개발 단계 승인에 참여하지 못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
조 교수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절차지만 그 결과는 영향력이 매우 크기 때문에 성실하게 임하고 있다”며 “지금도 괜찮은 수준이지만 표준 외교의 국제무대에서 우리 목소리를 더 키워 국익에 이바지하고 세계 번영에도 봉사했으면 한다”고 희망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