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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 정행국 애국지사 위패 참배 / 정중규

by 정중규

서울시민이 된지 8년이 되어가지만 그동안 늘 미뤄진 과제처럼 여겨졌던, 서대문형무소 '독립관'에 위패로 모셔져 있는 일제시대 학생독립운동가 순국선열 애국지사 정행국(鄭行國, 1896년 12월 24일~1921년 11월 11일) 큰아버지를 처음으로 찾아뵈웠다.

그분은 1914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숭실전문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추적을 받게 되자, 만주로 건너가 지린성 지린, 창춘 등지에서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5월에 귀국한 그분은 고향에서 왜관청년회(倭館靑年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어 청년회 활동을 주도했으며 왜관에 동창학원(同昌學院)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반일사상 및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21년 10월 왜관청년회 주최로 '나의 조국은 죽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시국강연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1921년 11월 10일 병보석으로 출옥했으나 다음날 순국했다.


생전의 그분 모습을 내가 가장 닮았다고 아주 어릴적부터 집안 어르신들이 하나 같이 내게 수없이 얘기해 나도 모르게 마치 그분이 내게 환생한 듯 느껴지기까지 하며 그분을 내 정신적 지주로 롤 모델 삼아 모셨고, 그것은 내 전 생애를 관통하는 정신이 되었다.

심지어 스물다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순국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분 스스로 생전에 "나라 잃은 백성에게 사진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사진은 독립운동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며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는데, 그것이 안타까워 그분의 영정을 그리려고 그분의 유족들이 시도했었는데 그때마다 어린 나를 모델로 삼자고 했었다.


그분의 고난에 찬 삶이 내게 던진 메시지는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릴적부터 애국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십대 초반에 벌써 시국에 눈을 떴고, 특히 1970년대 초 사춘기 시절 FM라디오에서 들은 김형석 교수의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가족만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살 것이지만, 국가와 사회 더 나아가 인류를 생각하는 사람은 그에 걸맞는 큰 사람이 될 것이니 젊은이들이 큰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그분의 삶과 바로 연결되어 내 어린 마음에 큰 감동이 되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 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정치에 자연스레 뛰어든 것도 그러했다.

하지만 내 정치는 어디까지나 민익(民益)을 추구하는 것이 그 유일한 목적이었고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정치의 길을 걸었다.

장애인 복지운동을 하며 진보정당에서 활동한 것도 민익(民益)을 추구하기 위함이었고, 지금 보수정당에서 심지어 보수정권 20년 집권까지 꾀하고 있는 것도 역시 민익(民益) 추구 때문이다.

그래서 그 옛날 "당신은 무슨 파인가" 물으면 "나는 특정 이념이 아니라 '국민파'이다"했었다.


그러다 보니 정치가, 권력이 그 민익(民益)을 배신하면 어김없이 저항했고, 그러다 보니 유권자 반세기 동안 내가 지지해 당선된 대통령도 없었지만(윤석열 대통령이 그 처음이다), 진보-보수 좌우 구별없이 모든 대통령은 내 저항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 독립관과 서대문형무소에 오랜 시간 머물며 참으로 많은 생각에 잠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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