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대학교 천장화, 또는 교수 그림이라고도 알려진 이 작품은,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을 위해구스타프 클림트(Gustav_Klimt, 1862년 7월 14일~1918년 2월 6일)가 1900년에서 1907년 사이에 그린 일련의 그림이다.
1894년 클림트는 천장을 그리라는 의뢰를 받았다. 클림트가 그의 그림인 철학, 의학, 법학을 발표하자 그림 속의 '음란물'과 '변태적인 과잉'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결국 그 어떤 그림도 대학에 전시되지 않았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상징주의 화가이자 빈 분리파 운동의 가장 저명한 구성원 중 한 명으로 비엔나 근교 바움가르텐 Baumgarten이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클림트는 정통미술교육기관이 아닌 응용미술학교인 Kunstgewerbeschule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 학교는 지금의 비엔나 응용미술대학교(University of Applied Arts Vienna)로 개편된 학교이다. 클림트가 후원을 하던 비엔나 표현주의의 천재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 역시 클림트의 모교인 Kunstgewerbeschule로 진학을 하였으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교수 여러명이 종용하여 국립미술학교인 비엔나의 Akademie der Bildenden Kunste로 전학을 갔던 것과 비교를 하면 차이가 있다.
이렇게 응용미술과 공예학교에서 그림을 배운 클림트는 건축미술을 하는 화가가 된다. 그가 맨처음한 일은 공공건축물에 그림 장식을 하던 일이다. 극장이나 도서관 등 대형건물은 르네상스 이래의 전통대로 큰 벽화 그림으로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 역시 이런 그림들을 그렸다. 그가 그린 그림 중에는 나중에 소개하게 될 비엔나 부르크극장(Burgtheater) 장식을 비롯하여 여러 작업을 했다.
클림트의 주요 소재는 여성의 몸이었고 그의 작품은 솔직한 에로티시즘이 특징이다. 우화와 초상화를 포함한 그의 비유적 작품 중에서 그는 풍경화를 그렸다. 빈 분리파의 예술가들 중에서 클림트는 일본 미술과 그 방법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하지만 클림트를 비엔나 미술계의 화제에 중심에 세우게 된 그림은 따로 있었다. 바로 비엔나 대학교 대강당(Great Hall of University of Vienna)의 천정을 장식하게 된 이른바 비엔나 대학 대강당 천정화라는 그림이 그것이다. 이 그림은 이 대학을 대표하는 4개의 과목, 철학, 의학, 법학, 신학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학과별 그림(Paintings)라고도 불렀다. 나름 건축 장식가로서의 경력을 쌓아오던 클림트에게 이 프로젝트가 떨어진 것은 1894년의 일이다. 이 그림은 대강당의 천정 가운데를 차지할 그림과 네 벽면에 위치할 그림 등, 총 다섯점의 그림으로 구성될 예정이었고, 이 가운데 클림트가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세개의 벽화를, 그리고 클림트의 친구이자 동업자, 프란츠 마치(Franz Matsch)가 중앙 천정화와 신학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이 그림은 벽에 직접 그려넣는 방식이 아닌, 그림을 그린 후 벽에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던 것 같다. 클림트는 길이가 4미터에 가까운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별도의 작업실을 준비하면서까지 그림을 그렸다.
클림트는 1900년부터 철학, 의학, 법학의 순서로 하나씩 그림을 선보였는데, 그의 그림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비엔나는 그야말로 뒤집어져 버렸다. 지금 보아도 불편해할 사람은 무척 불편해 할만큼 그림은 과격했다. 사람들은 "이런 망칙한 그림을 지성의 전당인 비엔나 대학교의 대강당에 그려넣다니"하며 "포르노"라고 비난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누드를 그린 것이 문제는 아니었다. 누드를 그리는 방식이었다.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나, 대학교 측은 누드가 그려지더라도,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차분한 누드를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클림트가 그린 누드는 프랑스나 벨기에 같은 곳에서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선정적인 누드였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림들은 애초 당국에서 원했던 아이디어와는 반대되는 사상을 표현했고, 철학, 의학, 법학이 지향해야 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거나 거슬러 표현을 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일부 교수들은 그림을 보고, 자신의 학문을 모독했다고 난리를 부렸고, 심지어 국회로 몰려가 청원을 넣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정치인들이 나서 이 그림의 주문을 클림트에게 준 교육부를 비난했다. 언론에서는 이 그림에 대한 논란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곤 했다.
결국 논란과 갈등이 심해지자, 비엔나 대학에서는 이 그림의 설치를 최종적으로 거부했다. 교육부에서는 이 그림을 새로 건설되고 있는 현대미술관(Modern Galerie)에 걸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클림트를 옹호하는 사람들로부터 난리가 일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클림트가 반발을 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현대미술관으로 보내지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클림트는 돈을 돌려줄테니 주문을 취소해달라고 청원을 했고, 그의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돈을 모았고, 이를 정부에 돌려주려 했다. 하지만 교육부는 주문이 이미 된 것이니, 그림은 정부소유라고 주장을 했고, 클림트의 집에 있는 그림을 받으러 집달관을 파견했다. 이 상황는 결국 클림트가 집으로 온 집달관들을 총으로 위협하는 상황까지 가면서 종료가 되었다. 결국 정부는 돈을 돌려받고, 주문을 취소해 주었다. 그리고 이 그림들은 나중에 클림트의 후원자인 아우구스트 레더러와 콜로만 모저 등에게 판매되었다.
하지만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의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게 되었고, 이들은 레더러 등이 가지고 있는 그림을 압수하여 비엔나 근교 이멘도르프 성(Schloss Immendorf)에 그림을 모아두었다. 문제는 1945년 5월 독일이 패망할 무렵, 이 이멘도르프성이 독일군과 연합군의 주요 교전 장소가 되면서 클림트의 그림들을 비롯한 많은 미술품이 소실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 그림은 흑백사진과 자료들 이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2021년 구글의 아트프로젝트 팀은 비엔나의 벨베데레 미술관의 큐레이터들과 협업을 통해 AI를 동원하여 클림트의 비엔나 대학 천정화 흑백사진에 컬러를 입히는 작업을 해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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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_Klimt, University of Vienna Ceiling Paintings or Faculty Paintings: Philosophy, 비엔나대학 대강당 천정화: 철학, 1899-1907
철학은 1900년 3월 제7회 비엔나 분리주의전시회 에서 오스트리아 정부에 제출된 세 그림 중 첫 번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파리세계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지만, 자국의 많은 미술 비평가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클림트는 이 그림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왼쪽에는 생명의 시작, 결실, 쇠퇴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있다. 오른쪽에는 신비로운 지구가 있다. 아래에서 빛의 인물이 나타나는데 지식이다."비평가들은 방향 없는 황홀경에 떠도는 남녀를 묘사한 데에 불쾌감을 느꼈다. 이 그림의 원래 주제는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였지만, 클림트는 대신 낙관주의나 합리주의가 아닌 "점성적인 공허함"을 의미하는 몽환적인 인간 덩어리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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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_Klimt, University of Vienna Ceiling Paintings or Faculty Paintings: Medicine, 비엔나대학 대강당 천정화: 의학, 1899-1907
의학은 1901년 3월 제10회 분리주의 전시회에서 선보인 두 번째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오른쪽에 반나체 인물 기둥이 특징이며, 이는 생명의 강을 나타낸다. 그 옆에는 공간에 떠 있는 젊은 알몸 여성이 있었고, 그녀의 발치에는 생명을 나타내는 신생아가 있다. 해골은 생명의 강에서 죽음을 나타낸다. 떠 있는 여성과 신체의 강 사이의 유일한 연결 고리는 뒤에서 본 여성의 팔과 남성의 팔이다. 그림의 아래쪽에는 히기에이아가 팔에 아스클레피오스의 뱀을 두르고 손에 레테의 잔을 들고 인류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다. 클림트는 의학의 역할이나 치유 과학을 기념하는 것이 전혀 없이 생명과 죽음의 모호한 통일성을 전달했다. 1901년 이 그림이 전시되자 클림트는 비평가들의 공격을 받았다. Medizinische Wochenschrift의 사설은 화가가 의사들의 두 가지 주요 업적인 예방과 치료를 무시했다고 불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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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_Klimt, University of Vienna Ceiling Paintings or Faculty Paintings: Jurisprudence, 비엔나대학 대강당 천정화: 법학, 1899-1907
법학 역시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사형수 한 명이 세 명의 여성 분노와 바다 괴물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배경에는 진실, 정의, 법의 세 여신이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에우메니데스로 묘사되어 사형수 한 명을 문어의 치명적인 포옹으로 처벌한다. 법학에서의 갈등은 "심리적 성적"으로 여겨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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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회화는 발표되었을 때 비평가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각 그림이 서로 다른 문화적 금기를 깨고 "현실을 승화시키고 더 유리한 면만을 보여주는"(네레트) 시대의 추세와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또한 클림트가 종종 직면했던 표준적인 음란물 혐의를 받았다. 87명의 교수가 벽화에 항의했고 1901년에는 검찰에 불려나와 이 문제가 오스트리아 의회에까지 이르렀는데, 이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문화적 논쟁이 제기된 것이었지만 결국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오직 교육부 장관만이 클림트를 변호했고, 클림트가 1901년 미술 아카데미 교수로 선출되었을 때 정부는 이 조치를 비준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는 교수직을 제안받지 못했다. 이것은 또한 클림트가 국가로부터 의뢰를 받은 마지막 때였으며, "검열에 지쳤다...나는 모든 국가 지원을 거부하고,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후기 작품인 Goldfish(to my critics)(1901–1902)는 관람자에게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 미소 띤 아름다운 여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대학 그림의 '음란물'과 '변태적인 과잉'을 공격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대응이었다. 분노에 사로잡힌 클림트는 이 그림에 "To my critics"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어했지만 친구들의 만류에 부딪혔다.
1903년 클림트의 작가이자 지지자인 헤르만 바르(Hermann Bahr)는 학부 회화부의 비판에 대응하여 클림트를 공격한 기사들을 모아 서문과 함께 《클림트에 대하여(Eggen Klimt)》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그는 클림트의 작품에 대한 반응이 터무니없다고 주장했다.
이 그림들은 1904년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루이지애나 매입 박람회에 전시되도록 요청받았지만 , 교육부는 반응이 어떨지 두려워하여 거부했다. 1903년 11월 11일, 교육부의 예술위원회는 대학 대강당 패널에 대한 프로젝트를 검토했다. 마치의 작품과 달리 클림트의 작품은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대강당에 전시하지 않고 Österreichische Galerie에 전시하기로 제안되었다. 클림트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1905년 4월 3일 그는 앞서 언급한 교육부에 편지를 썼다. 위원회에서 사임하고 자신의 작품을 보관하고 싶어했지만, 교육부는 작품이 이미 국가 소유라고 주장했다. 클림트가 철거 직원을 산탄총으로 위협했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그림을 보관할 수 있었다. 클림트는 그의 주요 후원자 중 한 명인 아우구스트 레더러의 지원을 받아 30,000크라운의 선금을 갚았고, 레더러는 그 대가로 철학을 받았다 . 1911년 의학과 법학은 클림트의 친구이자 동료 예술가인 콜로만 모저가 구입했다. 의학은 결국 유대인 가족의 소유가 되었고, 1938년 이 그림은 독일에 압수되었다. 1943년 마지막 전시가 끝난 후 보호를 위해 니더외 스터라이히의 성인 슐 로스 임멘도르프(Schloss Immendorf)로 옮겨졌다 .
1945년 5월, 후퇴하던 독일 SS 부대가 성이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성에 불을 지르면서 이 그림들이 파괴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미술사학자 티나 마리 스토코비치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성은 파괴되었지만 그림들이 파괴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준비 스케치와 몇 장의 사진 뿐이다. 파괴되기 직전에 찍은 Medicine의 완전한 그림은 단 한 장의 사진만 남아 있다.
2021년 말까지 구글과 비엔나 레오폴드 미술관의 협업을 통해 클림트의 작품을 기반으로 한 3개 작품의 가능한 색상을 딥러닝 기술을 사용하여 복원했다. 그 결과 클림트의 예술에 대한 전문가가 결과물을 보정해야 했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