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der & Reader 윤석열 vs 한동훈
*********************************************
연재를 시작하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요. 강골 검사였던 윤석열 대통령은 왜 이해하기 힘든 비상계엄의 감행으로 자신을 무너뜨렸을까요. 20년 검사 동지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어쩌다가 윤 대통령과 서로 비수를 겨누는 지경까지 왔을까요.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윤 대통령과 한 전 대표, 그리고 그들을 낳은 ‘검사’와 ‘정치’의 근원을 파헤쳐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 지점에서 이번 연재물은 출발합니다.
늦깎이 흙수저 검사였던, 그래서 검사의 길을 한 차례 포기해야 했던 윤 대통령이 화려하게 부활해 대표적 특수통으로 자리매김한 과정, 그와 반대로 출발부터 엘리트 검사였던 한 전 대표의 화려한 수사 이력, 그리고 동지적 결합으로 표현할 수 있는 두 사람의 20년 행보를 하나하나 되짚어갈 예정입니다. 그토록 끈끈했던 동지애가 어떻게 배신감과 적대감으로 변질해 결국 영화 ‘친구’와 같은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됐는지도 함께 추적할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그들을 잘 아는 주변 인사들을 두루 만나고 각종 서면을 속속들이 파헤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거나, 덜 알려졌던 일화와 비화들을 생생하게 전할 것입니다. 많은 기대와 동참 부탁드리겠습니다.
*********************************************
1회 프롤로그
“야! 휴게소다”“또 들르게요?” 윤석열·한동훈 10시간 부산행
겨울왕국은 북에만 존재했다. 백색이 지배하던 세상은 위도가 낮아질수록 눈에 띄게 힘을 잃어갔다. 그리하여 눈 속에 감춰진, 앙상한 속살의 영역은 점점 더 넓어졌다.
명이 짧은 겨울 해가 세상의 빛을 훔쳐 서산으로 빠르게 도주하던 2007년 2월 중순의 늦은 오후. 그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넘쳐났다. 수평으로 쌓이고 쌓인 그 자동차들은 화학적 결합이라도 한 듯 빈틈없이 덩어리를 이뤘다. 그중 한 공간을 두 중년 남자가 점유하고 있었다.
무료한 듯 차장 밖을 바라보던 조수석의 사내가 반색했다.
"야! 휴게소다. 5km 앞에 있대."
운전대를 붙잡고 있던 동료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왜요? 또 들르게요?"
"그럼, 당연하지."
서울을 떠난 지 9시간째. 그 고속도로에 존재하던 휴게소란 휴게소는 다 방문한 듯했다. 넉넉잡고 다섯 시간을 예상했던 여행 시간은 이미 배에 가깝게 늘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자동차 덩어리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휴게소로 들어선 그들은 한참을 배회한 뒤에야 간신히 빈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여기서는 뭘 먹으면 좋을까?"
"또 먹어요? 아 몰라요, 마음대로 하세요."
동승자에게는 휴게소가 놀이터인 듯 보였다. 운전자와 달리 그는 유유자적 자동차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간식과 음료수로 요기한 그는 행복한 표정으로 다시 차에 올랐다.
목적지의 이름이 적힌 도로 표지판이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그 곳까지의 잔여 거리는 어느덧 두 자리 숫자로 줄어있었다. 거기 적힌 도시의 이름은 ‘부산’이었다. 동승자가 운전자에게 질문했다.
"부산 가면 뭐 하고 지낼 거야?"
"하던 거 해야죠. 부산이라고 나쁜 놈 없을까 봐요?"
그들은 검사였다. 운전자의 이름은 한동훈, 동승자의 그것은 윤석열이었다.
그들에게도 이런 시절은 있었다. 아니 두 사람 관계의 거의 대부분은 이런 모습이었다. 우정과 동지애가 넘쳐나던 브로맨스는 도대체 어떤 경로를 거쳐 배신과 복수가 난무하는 누아르로 변질된 걸까. 이제부터 그 길을 따라가 보자. 사진 한동훈팬클럽
윤은 왜 한의 부산행에 동참했나
당시 34세이던 한동훈 검사는 그 직업을 가진 지 7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47세로 그보다 13세 연상인 윤석열 검사는 13년의 검찰 구력을 지닌 2년 차 부(副)부장 검사였다.
그들은 왜 따뜻한 사무실이나 온돌방에서의 피한(避寒)을 마다한 채 찬바람 부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부산으로 내려가고 있었을까.
부산행의 이유는 한 검사였다. 그 직전 발표된 검찰 인사에서 그는 부산지검 근무를 명받았다. 실질적인 첫 지방 발령이었다. 연수원 성적이 우수해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던 그는 경향 교류 원칙의 예외적 존재였다. 2년간의 정규 서울지검 검사 생활을 마친 뒤 천안지청으로 발령났지만 그건 서류상의 발령에 불과했다.
그는 수사를 잘했다. 선배들은 그를 아꼈고, 필요로 했다. 그는 이런저런 ‘파견’ 발령을 통해 서울지검과 대검 중수부에서 계속 수사할 수 있었다. 2007년 초까지 한 검사는 1차 SK 수사, 불법 대선자금 수사, 현대차 비자금 사건, 론스타 사건 등 기라성 같은 사건들에 투입돼 맹활약했다. 그러다가 론스타 수사가 일단락되면서 제대로 된 첫 지방 근무 발령을 받은 참이었다.
새 임지 부임을 앞두고 그는 중수부의 각 사무실을 돌면서 선배, 동료들에게 두루 하직 인사를 했다. 차례가 윤 검사에 이르렀을 때였다.
"형님, 저 내려갑니다."
"그래? 언제 가?"
"내일요."
"그럼 같이 가자. 나 운전 못하는 거 알지? 내일 우리 집에 나 데리러 와."
그 유명한 ‘형님 리더십’이 발현된 순간이었다. 한 검사의 마음속에는 고마움과 당혹스러움이 교차했다.
"예? 아닙니다.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 혼자 가면 됩니다."
"뭘 혼자 가. 혼자 가면 심심하잖아. 나도 이참에 부산 구경 좀 하고. 잔소리 말고 나 태우러 와."
더는 토를 달 수 없었다. 한 검사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윤 검사를 태우러 그의 연희동 집으로 갔다. 서울 강남 지역에 살던 한 검사 입장에서는 윤 검사 픽업 때문에 강북으로 올라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돌아도 한참 돌아가는 길이었다.
게다가 ‘형님’은 ‘휴게소 킬러’였다. 휴게소 표지판이 보일 때마다 차를 세우게 하고는 요기를 했다. 넉넉잡고 다섯 시간을 예상했던 하행길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간신히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서울을 떠난 지 10시간이 넘은 시점이었다. 이미 사위는 어두워졌다. 윤 검사는 한 검사의 숙소에 들러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고는 작별의 인사를 남긴 뒤 밤 기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잘 지내고, 수사 잘해라. 멀리 있어도 자주 보자."
청춘 활극은 왜 누아르로 바뀌었나
긴 이야기의 서두를 열기에 안성맞춤인 젊은 날의 한 초상이다. 그때 그들은 젊었고 당당했다. 그리고 우애가 넘쳤다. 단순히 친한 직장 선후배 정도가 아니라 사선(死線)을 함께 여러 번 넘은 동지적 관계였다.
두 콤비는 20년간 호흡을 함께하면서 대한민국 검찰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두 사람의 돈독함이 남달랐던 건 영광의 순간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도 함께 겪었기 때문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과정에서 밉보여 좌천된 형을 동생은 살뜰히 챙겼다. 동생이 문재인 정권의 표적으로 찍혀 수사를 받아야 했을 때 형은 동생을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부산고지검 방문 자리에서 한동훈 부산고검 차장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한 차장은 문재인 정권의 표적이 돼 지방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그는 채널A 사건이 터지면서 법무연수원으로 재차 쫓겨난다. 연합뉴스
그들의 브로맨스는 형이 거짓말처럼 대통령이 되고 동생이 법무부 장관과 여당 대표가 되면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청춘 수사 활극’의 결말은 ‘그리하여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로 마무리될 듯 보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월 4일 신임 국민의힘 지도부 초청 만찬 자리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어느 순간 장르가 바뀌었다. 스크린의 명도와 채도가 급속도로 낮아지더니 영화는 ‘정치 누아르’가 돼버렸다. 두 사람의 사이가 조금씩 벌어지고 있다는 믿기 힘든 소식이 전해지더니 지난 총선을 전후해 그 갈등이 표면화했고, 급기야 비상계엄 사태를 맞아 서로의 목에 비수를 겨누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상계엄 선포 직후 형의 수하들은 동생을 정적들의 이름과 함께 체포 명단에 올렸다. 심지어 형의 심복의 심복이었던 ‘예비역 장군 보살’은 수첩에 동생의 이름을 ‘백령도’ ‘사살’ 등 무시무시한 단어들과 함께 나열했다. 동생은 휘하 의원들을 이끌고 헬기와 소총이 난무하던 국회로 달려가 비상계엄을 단번에 깨뜨렸고, 결국 형을 탄핵 심판대에 세웠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2024년 12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 관련 입장을 밝히기 전에 생각에 잠겨 있다. 뉴스1
그 속에서 두 사람이 함께한 20년 세월은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검사’와 ‘정치’로 대표되던 하나의 시대가 그들과 함께 종막을 고했다.
검사, 정치, 그리고 ‘검사 정치’
이 연재물의 앞부분은 ‘검사’가 주제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검찰 전성시대, 그중에서도 특수부 전성시대를 함께 구가했던 상징적 존재들이다.
윤 대통령이 검사로 임관한 건 1994년 2월이었다. 고압적 권위주의 군사정권, 그리고 정권의 손과 발이었던 정보기관과 경찰의 위세에 눌려 명목상의 권위만 유지하던 검찰이 밖으로는 사회 민주화, 안으로는 슬롯머신 사건 수사를 계기로 일약 권력의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검찰 내부에서도 공안에서 특수로 권력의 열쇠가 넘어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한 전 대표가 임관했던 2001년은 그런 흐름이 더욱 공고해진 때였다. 게다가 한 전 대표는 한국 특별수사의 한 원형을 제시했던 1차 SK 수사팀에서 처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인물이다.
두 사람의 현재, 그리고 관계 변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수부 전성시대와 그 속에서의 족적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검사 시절 이야기가 전반부를 차지하는 이유다.
그리고 ‘정치’ 영역의 이야기가 후반부를 구성한다. 두 사람의 정치 역정은 매우 짧다. 윤 대통령의 경우 검찰을 떠난 이후에 한정한다면 4년이 채 되지 않는다. 한 전 대표는 법무부 장관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걸은 기간이 겨우 1년 남짓이다.
하지만 그 기간은 과거 20~30년에 맞먹을 정도로 극적이었다. 그리고 이면의 이야기는 여전히 상당 부분 비밀의 영역에 존재한다. 도대체 정치인 윤석열과 정치인 한동훈은 어떤 길을 걸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검사’와 ‘정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검사 정치’라는 신조어는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다분히 셰익스피어적인 이 비극의 책임을 상당 부분 거기에 지울 수 있는 걸까.
아직은 정리하는 게 이를 수도 있는 의문들이다. 조심스러운 것 역시 사실이다. 한 명은 비록 구속됐지만 여전히 현직 대통령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차기 대선에 등판할 가능성이 있는 예비 대선 주자다.
1월15일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이 공수처에서의 조사를 마치고 서울구치소로 이동하고 있다. 뉴스1
그렇다고 해서 정리 작업을 미룰 이유도 없다. 오히려 탄핵심판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지지 않고, 차기 대선의 공이 울리지 않은 지금이 바로 그 한 시대를 정리하고 넘어갈 적기일 수 있다. 연재물은 이런 생각에 기반해 시작됐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가 볼 계획이다.
이야기는 1990년대 초, 검사 윤석열이 탄생하던 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계속)
*******************************************
2회 폭탄주와 예의-청년 윤석열의 두 얼굴
“폭탄주가 약! 혈뇨 싹 낫더라” 이성윤 기겁하게 한 연수생 尹
1992년 봄, 개나리가 만발한 서울 서초동 법원 청사 북쪽에 일군의 젊은이가 있었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그 공간에 입성한 사법연수원생들이었다. 연수원 23기 타이틀을 부여받고 인생의 가장 찬란한 봄을 만끽하던 그 무리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윤석열 연수생이 있었다.
1992년 사법연수원에 입학하기 직전의 윤석열 대통령. 사진 국민의힘
그리고 그의 정적이 되는 이성윤 연수생도 있었다.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문재인 정권의 편에서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과 사사건건 맞섰고, 이후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도 대통령이 된 옛 연수원 동기를 매섭게 공격했던 바로 그다.
윤 대통령의 정적 중 한 명인 이성윤 더불어민주당 의원. 뉴스1
하지만 연수원 시절에만 해도 두 사람은 친했다. 윤 연수생이 32세, 이 의원이 30세. 늦깎이 연수생들인 두 사람은 동병상련이었다. 게다가 같은 반, 같은 조였다.
당시 사법연수생은 300명 정도였는데 인원이 많아 몇 개의 반으로 나뉘었다. 한 개의 반은 또다시 15~20명으로 묶인 몇 개의 조로 구성돼 있었다. 두 사람은 5반이었고, 그 반에서도 같은 조에 속해 있었다.
그 조에는 두 사람 이외에도 윤석열 정부 네 번째 공직 낙마자가 됐던 송옥렬 전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자, 윤석열 정부 국가인권위 비상임위원을 역임한 윤석희 변호사 등이 소속돼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리고 함께 공부하면서 인생의 봄을 만끽했다.
그러나 이성윤 연수생에게는 그들과의 교류 과정에서 매우 힘든 점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그것과 관련해 그가 윤 연수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 그거 괜찮아졌어요?"
"뭐?"
이 연수생이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 그 왜…. 혈뇨(血尿) 말이에요."
윤 연수생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 그거? 다 나았어."
"아니 어떻게 나았소? 병원 다녔어요?"
윤 연수생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아니. 역시 술이 약이더라. 폭탄주를 계속 마셨더니 싹 낫더라고. 하하하."
이 연수생을 괴롭힌 건 바로 폭탄주였다. 그는 기독교인인 데다가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조에는 애주가가 많았고, 모였다 하면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셨다. 그 선두에 섰던 게 윤 연수생이었다.
그는 두주불사의 폭탄주 애호가였다. 이 연수생이 보기에는 그의 혈뇨도 말술로 인해 발생한 증상이었다. 그의 걱정에 대해 윤 연수생이 병인(病因)으로 병을 치료했다는 역발상의 농담성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이성윤 의원의 저서 『그것은 쿠데타였다』에 나오는 일화를 재구성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유명한 애주가다. 2021년 7월 대선 주자 시절의 윤 대통령이 부산 서구의 한 식당에서 지역 국회의원들과 함께 소주를 마시고 있다. 송봉근 기자
말술은 다변, 박학다식, 보스 기질 등과 함께 윤 대통령을 대변하는 특징으로 지목된다. 물론 그의 애주 성향은 대학 시절부터 일찌감치 형성된 것이지만 연수원에 입소하고 사회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가 잘나갈 때 술은 그의 호탕함과 인간미를 대변해 주는 매개체로 자주 인용됐다. 하지만 지금은 판단력 저하와 국가 경영 저해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면서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9수생 윤석열, 10수 위기 넘기고 사시 합격
윤 대통령은 잘 알려진 대로 사시 9수생이었다. 1차 시험은 서울대 법대 4학년 때 일찌감치 합격했지만 2차 시험이 문제였다. 여덟 번 낙방하고 아홉 번째에 겨우 합격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서울대 법대 졸업식 사진. 사진은 윤 전 총장의 초ㆍ중ㆍ고 및 대학 동문들로부터 입수했다. 김기정 기자
10수가 될 위기도 있었다. 1991년 6월 절친한 대구 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함진아비를 해달라”고 부탁해 왔는데 하필 함 들어가는 날이 2차 시험 사흘 전이었다. 정중히 거절했고 친구도 이해했지만,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결국 6월 29일 오전 공부를 마친 뒤 고속버스 편으로 대구에 내려갔다. 본분을 100% 수행한 건 물론이고 뒤풀이 잔치에까지 참석한 뒤 다음 날 새벽 버스 편으로 다시 상경했다.
‘이번에도 어렵겠구나’ 하고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놓은 채 7월 2일 열린 2차 시험에 응시했는데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는 훗날 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오히려 그날의 대구행을 행운으로 돌렸다.
"그때 대구를 오가면서 버스 안에서 평소에 안 보던 형사소송법 뒷부분을 우연히 넘겨 보게 됐는데 거기서 시험 문제가 나왔어."
그리고 이듬해 봄 그는 사법연수원에 입소해 예비 법조인이 됐다. 법무부 장관 시절 그와 사사건건 부딪혔던 박범계 민주당 의원, 윤 대통령이 포함된 국정농단 특검팀에 의해 구속기소 됐던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전 의원이자 유튜버 강용석 변호사, 진보 판사로 유명했던 이정렬 변호사, 국회의원 출신의 주광덕 남양주시장 등이 연수원 23기라는 타이틀과 2년의 세월을 공유했다.
윤 대통령은 1994년 연수원 수료 후 검사로 임관했다. 서른넷의 다소 늦은 나이였다. 이때부터 한 차례 사표를 던졌던 2001년까지의 기간을 그의 ‘검사 1기’로 분류할 수 있다. 특수통으로 거듭난 이후의 이야기와 무용담은 많이 알려졌지만, 이 무렵의 이야기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윤석열과 한동훈’ 팀은 그의 ‘흙수저 검사’ 시절을 함께 보낸 주변인들을 만나는 한편, 먼지 앉은 옛 자료들에서 세월의 더께를 걷어내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이야기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정치적 고향’ 대구, 그리고 두 귀인과의 숙명적 만남
윤 대통령은 사법시험이나 연수원 성적이 최상위권은 아니었다. 그래서 검사들이 선망하던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하지 못했다. 1994년 3월 그가 네 명의 신임 검사와 함께 검사 경력의 첫발을 내디딘 곳은 대구지검이었다.
윤 대통령이 초임 검사로 일했던 대구지검 청사. 중앙포토
대구는 그의 고향이 아니다. 선친의 고향(충남)도 아니다. 하지만 그 도시는 인생의 고비마다 그를 품어줬다. 검사 생활을 시작한 곳이 대구였고, 첫 특수부장 타이틀을 선사한 곳도 대구였다.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과정에서의 외압을 폭로했다가 윗분들을 난감하게 만든 죄로 쫓겨났을 때도 대구(대구고검)는 그를 감싸안았다.
사실상의 정치 입문 선언을 한 곳 역시 대구였다. 2021년 3월 3일 ‘대구고·지검 순시’라는 명목으로 그곳을 찾아 박정희의 재림을 방불케 할 정도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그는 바로 다음 날 사의를 표명한 뒤 정치인이 됐다.
2021년3월3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방 검찰청 순시의 일환으로 대구고지검에 도착하고 있다. 이날의 대구 방문은 사실상의 정치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 실제 윤 총장은 이튿날 총장직에서 물러나면서 공식적으로 정치인이 됐다. 뉴스1
그런 대구와 윤 대통령의 첫 만남은 어땠을까. 그는 거기서 ‘귀인’을 두 명이나 만났다. 한 명은 대구지검 형사2부에 입부했을 당시 부장검사였던 정상명 전 검찰총장이다. 중앙무대에서 활약하던 정 전 총장은 TK(대구·경북)라는 이유로,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PK(부산·경남)들에 밀려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그는 윤 검사를 아끼고 예뻐했다. 훗날 검찰총장 시절 윤 대통령을 대검 중수부에 배치해 특수통으로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정 전 총장은 지금도 윤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변호인단의 일원으로, 그를 보살피고 있다.
정상명 전 검찰총장. 뉴스1
또 다른 한 명은 핵심 ‘찐윤’인 정점식 국민의힘 의원이다. 윤 대통령과 정 의원은 서울대 법대 동문이면서 1994년 대구지검에서 함께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사법연수원은 정 의원이 20기로, 23기인 윤 대통령보다 선배지만 정 의원이 군 법무관 생활을 마치고 임관하는 바람에 검사 생활 시작 시점은 같다. 나이는 윤 대통령이 정 의원보다 다섯 살 위고 서울대 입학도 훨씬 빠르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은 사석에서 정 의원을 ‘정공(公)’, 또는 ‘정형’으로 불렀고, 정 의원은 윤 대통령을 형으로 지칭하며 존대했다.
정점식 국민의힘 의원. 뉴스1
하숙집 주인, 예의 발랐던 ‘윤 검사’를 회고하다
그의 타향살이는 어땠을까. 매일신문 2022년 2월 28일자에 권병직(84)·박정자(84)씨 부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들은 윤 대통령의 초임 검사 시절 하숙집 주인이었다. 다음은 그들이 회고한 하숙생 시절의 윤 대통령이다.
"복덕방에 ‘우리 문간방이 비었는데 자는 사람 한 명만 구해주세요’라고 의뢰했지. 그랬더니 며칠 있다가 이래 막 덩치 큰 사람을 데리고 왔는기라. 검사라고 그러데. 살림살이도 별로 없었다. 바닥엔 이불, 벽엔 정장 한 벌이랑 와이셔츠 정도만 걸려 있었는데 트랜지스터라디오 하나 갖다 놨던 게 기억난다. 아침마다 북엇국을 그렇게 맛있게 먹었어."
그들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2년 동안 겪었는데 지금 보태는 것도 빼는 것도 없이 인간으로서 가진 덕목은 거진 다 갖춘 사람이었어. 성격, 인성 좋고 예의도 바른 거야 사람이. 가정교육을 굉장히 잘 받았더라고. 인정도 있고 의리도 있고 하여튼 젊은 사람이 그렇게 원만하더라카이."
칭찬 세례는 숨 쉴 틈이 없었다.
"출근길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빠뜨린 적이 없었어. 그리고 가끔 고급 중식당과 한정식집에 우리를 데려가서 음식을 대접했어. 하루는 윤 검사가 퇴근하면서 전화로 나오시라고 해서 가봤더니 식탁 테이블 빙빙 돌리는 데였어. 그런 곳은 생전 처음 가봤지. 나가는 날에 우리 내외가 너무 섭섭해가지고 막 내다보는데 윤 검사가 ‘선생님 잠깐만 앉으세요’ 이러는 거야. 그러더니 갑자기 큰절을 넙죽 하는 거야. ‘그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하면서. 그런 하숙생이 어디 있노. 감동했지."
선뜻 믿기지 않는가? 윤 대통령이 그토록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는 게. 하지만 그의 예의 바름에 대한 증언은 적지 않다. 앞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소개하겠다.
물론 인제 와서 소싯적 예의 바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걸 근거로 본바탕이나 됨됨이를 논하기에는 그가 너무 멀리 온 것 아닐까.
"우리나라가 교육에 온 힘을 쏟아서 결국 선진국이 됐잖아. 이제 정치만 좀 잘하면 된다. 윤 검사가 법과 원칙대로 잘 해가지고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
하숙집 부부가 대선 후보 시절의 윤 대통령에게 남긴 바람이다. 그를 뽑았던 모두의 염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그들이 바라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될 위기에 처해있다.(계속)
*******************************************
3회 초임 검사 尹, 수사 재능을 발견하다
尹은 정말로 수사 잘했나…특수통 싹 발견한 ‘95년 대구’
"검사님, 안녕하십니까?"
"아, 박 경장 어서 와요. 어쩐 일로?"
"아, 네.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1995년 대구지검 형사2부 윤석열 검사의 사무실에 한 경찰관이 쭈뼛거리며 들어섰다. 윤 검사는 그와 자주 만나 안면이 있는 듯 그를 자리에 앉혔다. 윤 검사 사무실은 그 무렵 대구지검의 ‘참새 방앗간’이었다. 당시 그곳에서 함께 근무했던 전직 검사 A의 전언이다.
"윤석열 검사실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북적했어. 초임인데도 수사를 열심히 하고 잘하니까 체포돼서 온 나쁜 놈들로 늘 넘쳐났지. 형사2부는 식품·보건·위생이 주요 수사 대상이었는데 강력 사건도 같이했어. 그래서 윤 대통령이 당시 깡패도 많이 잡아넣었어."
대검찰청 검찰체험관에 마련돼 있는 전시용 검사실의 모습. 실제 검사실은 물리적 ·심리적으로 이곳보다 훨씬 어둡다. 사진 대검찰청
윤 검사는 실적이 좋았다. 후술하겠지만 일반 형사·강력 사건뿐 아니라 특별수사의 기본인 인지 수사 영역에서도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경찰이 불구속 송치한 사건을 적극적으로 추가 수사해 구속하는, 이른바 직구속 건수가 당시 대구지검 검사 중 몇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 피의자들만 그의 방을 채운 건 아니었다. 윤 검사는 민원인들의 이야기도 잘 들어줘서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려고 온 사람들도 많았고, 친화력이 좋아서 동료 검사들도 그의 방에 자주 들렀다. 심지어 경찰들한테도 인기가 좋았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윤석열 캠프에서 배포한 윤 대통령의 젊은 시절 사진. 사진 윤석열캠프
검사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경찰관들에게 인기를 얻은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서두의 사연으로 돌아가 보자.
"그래, 어쩐 일로 온 거예요?"
윤 검사의 물음에 박 경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새로 오신 제 상사가 제가 수사 중인 사건과 관련해서 주요 피의자를 수사하지 말라고 외압을 행사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 사건이 엉터리로 올라오면 수사 지휘를 강하게 해서 제대로 수사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음, 그런 일이 있군요. 그러면 이렇게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A의 추가 설명을 들어보자.
:그때 경찰관들이 경찰 윗선으로부터 압력이나 청탁이 많이 들어오니까 검사한테 면담을 신청해서 ‘나중에 사건이 송치되면 수사 지휘를 잘 좀 해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 ‘검사가 안 된다고 한다’는 핑계로 외압에서 벗어나려는 거였지. 윤 대통령이 그때 그런 이유로 찾아오는 경찰관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조언도 참 잘 해줬거든. 그래서 경찰관들이 좋아했어."
초임 검사, 대형 참사에서 ‘전체 보는 법’을 배우다
그렇게 그가 초임 검사로 착실히 실력을 다져나갈 무렵, 대구에서 큰 사고가 터졌다. 1995년 4월 28일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의 대구 도시철도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도시가스 폭발사고가 그것이다. 인근 영남중학교 학생 42명을 포함해 101명이 사망하고 202명이 부상한 초대형 참사였다.
1995년 가스폭발로 대형 참사가 발생했던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지하철 1호선 공사장의 처참한 모습. 중앙포토
대구지검은 10여 개 검사실을 투입해 대대적으로 수사했다. 이 사건도 윤 검사에게는 배움의 시간이었다. 당시 그는 수사하면서 상급 기관에 올릴 보고서와 보도자료 작성 작업을 병행했다. 큰 그림을 보는 능력을 키울 기회였다.
보고서나 보도자료는 전체 수사 상황을 파악해야만 쓸 수 있다. 당시 10여 개 검사실이 각자 파트를 나눠 수사했던 만큼 자기 파트만 알아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A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본인 몫의 수사를 하는 한편, 짬짬이 다른 검사실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전체 수사 상황을 파악해야만 할 수 있었던 일이었어요. 윤 대통령은 ‘초임 검사인데도 사건의 판세를 다 파악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그 역할을 부여받은 거였지. 실제 임무를 잘 수행해냈어요."
직구속 1위…특수 검사 재능 발견
하지만 역시 대구에서의 가장 큰 수확은 인지 수사에 대한 재능을 발견한 것이었다. 윤 검사는 어느 날 범죄 심증이 강해 여러 번 검경의 수사를 받았지만, 번번이 무혐의로 풀려난 한 피의자의 기록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그걸 숙독하던 그의 눈에 이상한 대목이 포착됐다. 기록 앞부분에 나온 내용과 뒷부분에 나온 내용이 서로 모순되고 배치됐다. 윤 검사는 본격적으로 그가 연루된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결국 범죄 증거를 확보해 그를 기소했다.
그때부터였다. 윤 검사는 계장 2명과 함께 유사 사안, 그러니까 범죄 심증이 강했지만 처벌하지 못했거나 불구속으로 송치된 사건들의 기록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A의 전언이 이어진다.
"윤 대통령이 그런 식으로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간 횡령·배임·사기 등 사기꾼들을 보완 수사해서 꽤 많이 직구속(*불구속 송치 사건을 검사가 적극 보완 수사해 직접 구속한 경우)했어. 아마 그때 직구속 건수로는 대구지검 검사 중에서 1등이었을 거야. 그때 특수의 기본이 되는 경제범죄 수사 재능을 발견한 거였지."
윤 대통령, 정말로 수사 잘했나
뒷날 윤 대통령은 수사 능력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물론 당대의 특수통으로 불린 만큼 수사를 잘했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2006년 12월 7일 ‘론스타 사건’ 중간 수사결과 발표 당시의 윤석열 대통령(맨 왼쪽). 특수통으로의 입지를 굳히던 시절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대검 중수부에서 그와 함께 근무했던 변호사 B의 평가다.
"윤 대통령이 자백을 아주 잘 받아냈어. 윽박지르고 협박하고 해서 받아내는 게 아니라 정중한 태도로 설득해서 자백 받아내는 걸 아주 잘했지."
검찰 간부 출신의 C는 윤 대통령의 실무 능력에 대해서도 호평했다.
"외모만 보면 윤 대통령이 컴퓨터를 잘 못 다룰 것 같지? 손도 솥뚜껑만 하고 그래서? 아니야. 단축키를 수시로 써가면서 엄청 빠르고 정확하게 서류를 작성해. 자백 받아내는 것만 잘하는 게 아니라 ‘페이퍼 워크’에도 강해. 검사로 유명해진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하지만 이견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역시 특수통 검사였던 D의 이야기다.
"윤 대통령 세대 특수검사들은 좀 주먹구구식이었지. 증거를 철저히 수집해서 상대를 꼼짝 못 하게 하기보다는 윽박지르고 어르고 달래서 자백을 받아내는 데 주력했어. 게다가 윤 대통령은 디테일이 많이 약했어. 그래서 뒤를 받쳐줄 수 있는, 한동훈 같은 조력자가 꼭 필요했지."
어쨌든 초임 검사 시절의 그는 당시 기준으로 수사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특히 경제범죄 분야에서 기본기를 닦으면서 이후 특수부와 대검 중수부에서 맹활약할 수 있었던 발판을 마련했다.
칼국수 만들던 검사…술은 오직 소주 폭탄주
수사 외적으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훗날 후배들은 하나같이 “그가 요리를 잘하며 손님들을 불러 그걸 먹이길 좋아한다”고 입을 모았다. A에 따르면 초임 검사 시절부터 이미 그런 특징은 발현되기 시작했다. 윤 검사는 당시 하숙집에 들어가기 전 잠시 관사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동료들을 관사로 불러서 전·찌개 등을 만들어 소주와 함께 먹었다고 한다. 칼국수를 만든 적도 있었다. 그것도 직접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고 그걸 밀어서 면을 만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4년 5월 24일 오후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출입기자단 초청 만찬 간담회에서 직접 계란말이를 만들고 있다. 윤 대통령은 검사 시절부터 요리를 만들어 손님들에게 접대하는 걸 즐겼다. 사진 대통령실
당시 젊은 검사들은 관사나 집에서 회식한 경우가 많았다. 월급이 180만원 정도에 불과해 비싼 외부 음식을 양껏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차만 외식하고, 2차는 관사나 누군가의 자택에 가서 부족한 주량을 채우기 일쑤였다. 큰 사건 수사가 끝나면 근처 중국음식점에서 요리 한두 개를 시킨 뒤 검사실에서 소주와 고량주 회식을 즐기기도 했다. A는 “윤 대통령은 양주나 와인은 안 먹는다. 오로지 소주, 그리고 폭탄주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과의 첫 인연
당시 대구지검에는 정상명 전 검찰총장, 정점식 국민의힘 의원(2회 참조) 이외에도 그와 운명적으로 엮인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이다. 역시 A의 설명이다.
"박 장관은 1991년에 검사로 임관해서 대구지검이 세 번째 임지였어. 그러니까 ‘3학년 검사’였지. 1994년에 임관한 윤 대통령보다는 제법 선배였지. 게다가 대구 출신으로 고려대를 졸업했기 때문에 윤 대통령과는 지연·학연도 없었어. 그래도 다들 젊을 때였으니 같이 어울리면서 상당히 친하게 지냈어. 윤 대통령이 비록 세 살 위지만, 검사 경력이 꽤 차이 나는데도 박 장관이 당시 윤 대통령을 형이라고 불렀어."
박 장관은 그로부터 근 20년 뒤 윤 대통령이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때문에 정권과 윗선에 밉보여 대구고검으로 쫓겨갔을 때 대구고검장으로, 그를 맞아준 인연도 있다. 윤 대통령은 인연이 겹친 그를 지난해 2월 한동훈 전 장관의 후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면서 보은했다. 하지만 복이 화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다.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이 2024년12월 7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성재(맨 오른쪽) 법무부 장관에게 내란 공범이라며 항의하고 있다. 박 장관은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현재 직무가 정지돼 있다. 김성룡 기자
박 장관은 비상계엄 다음날인 지난 4일 밤 서울 삼청동 대통령 안가(안전가옥)에서 김주현 대통령실 민정수석,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이완규 법제처장과 회동한 것으로 밝혀져 야당으로부터 ‘내란 공범’이라 비난받고 있다.
윤 대통령은 1996년 다사다난했던 대구에서의 초임 검사 시절을 마무리하고 두 번째 임지로 이동했다. 외가가 있던 강릉이었다. (계속)
********************************************
4회 노래방과 팥빙수, 그리고 무장공비
“분명히 책임진다고 했는데…” 尹 검사, 노래방서 버려지다
1996년의 어느 날 아침. 덩치 큰 중년 남성이 강릉시 교동의 좁은 골목길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양복과 구두를 갖춘 성장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후줄근해 보였다. 양복 상의는 구깃구깃 주름이 잡혀 있었고 그걸로 간신히 감춘 와이셔츠의 상태는 자심(滋甚)했다.
안색에서 붉은 기가 채 가시지 않았고, 내쉬는 날숨마다 알코올기가 가득 묻어났다. 이른 아침부터 땀깨나 흘리며 그가 향한 곳은 그 길 끝 고지대에 있던 공공기관이었다. 춘천지검 강릉지청이라는 현판이 나붙은 그 건물로 들어선 그는 검사실로 직진했다. 그리고 문을 열어젖히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그렇게 버려두고 가는 법이 어디 있어요?"
내부의 인사들이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 웃음이 간신히 잦아든 뒤 그중 한 사람이 대꾸했다.
"윤 검사, 버려두다니? 그 친구가 챙긴다고 했는데 아니었어요?"
숙취가 채 가시지 않은 후줄근한 차림의 그 남성은 그곳에서 근무하던 윤석열 검사였다. 당시 만 36세이던 그는 대구지검에서 초임검사 생활을 마친 뒤 1996년 3월부터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임관 후 두 번째 임지에서 일하던, 이른바 ‘2학년 검사’였다. 그런데 그는 왜 그날 아침부터 ‘방기(放棄)’ 논란을 제기하면서 선배들이 배를 잡게 했을까.
절반의 고향 강릉… 외할머니가 소개해 준 ‘권성동 어린이’
강릉은 남의 땅이 아니었다. 외가가 강릉시 금학동에 있었다. 외가 역시 명문이다. 윤 대통령의 외외이조부, 즉 외할머니의 오빠가 11, 12대 국회의원인 이봉모 전 의원이다. 윤 대통령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방학만 되면 외갓집으로 내려와 강릉 시내와 동해에서 뛰놀았다.
어릴 때 추억이 배어 있는 장소에서 시민들을 모시고 대통령 선거 유세를 하게 돼 영광입니다. 강릉의 외손이 강릉과 강원도를 확 바꾸겠습니다.
2022년 2월 28일 국민의힘 대선후보 시절의 윤 대통령이 강원도 강릉시 월화거리 광장에서 시민과 악수하고 있다. 뉴스1
지난 대선 유세 때 그는 강릉 중앙시장에서 자신이 강릉의 외손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강릉에서 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의 대상과 만나게 된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옆집 아이를 소개해 줬다.
"고등학교 선생님 아들인데 얘가 똑똑하고 공부도 잘한대. 같이 놀거라."
그 친구가 국민의힘 원내대표인 권성동 의원이었다.
성장하면서 교류가 끊겼던 권 의원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건 1992년의 일이었다. 다음은 윤 대통령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발언이다.
"사법시험에 패스한 뒤 수원지검에서 검사 시보를 하고 있었어요. 가을쯤인 듯 싶어요. 잠깐 바람 쐬러 나가다가 복도에서 누굴 스쳤는데, 익숙해 보였어요. 마침 눈이 마주쳐서 마주 보고 있다가 서로가 ‘강릉!’이라고 외쳤죠. 바로 악수한 뒤에 근처 돼지갈빗집에서 술 한 잔 했어요."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1월 16일 의원총회에서 윤석열 대통령과의 어린 시절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멈추고 있다. 뉴스1
검사 단 네 명… 가족처럼 지낸 강릉지청 시절
그렇게 절반의 고향이던 강릉이 운명처럼 윤 검사의 두 번째 임지가 됐다. 대형 검찰청인 초임지 대구지검과 달리 강릉지청은 춘천지검에 딸린 작은 지청이다. 평검사는 총 네 명이었고, 다들 젊었다. 결혼한 검사도 있었지만, 가족은 대부분 대도시에 두고 단신 부임한 경우가 많았다. 평일에는 총각이나 마찬가지였던 그들은 가족처럼 지냈고, 자주 모여 술과 음식으로 회포를 풀었다. 당시 강릉지청에서 일했던 전 검찰 간부 E씨의 이야기다.
"검사 네 명이 돌아가면서 밥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반찬을 들고 모였어. 그렇게 관사에서 밥 먹고 술 먹으면서 놀았지. 간혹 강릉지원 판사도 오고, 젊은 변호사들도 와서 같이 어울렸어. 그때도 윤 검사는 술을 잘 먹고 친화력이 좋으니까 인기가 좋았어."
여기서 소싯적 예의 바름에 대한 증언이 하나 더 등장한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전직 검찰 간부 F씨의 전언이다.
"식당에서 회식하면 좌장, 주로 지청장이겠죠. 지청장이 술에 취해서 식당 종업원을 험하게 대할 때가 있었어. 윤 검사가 그럴 때 종업원을 몰래 밖으로 불러내. 그러고는 2만원 정도 주면서 ‘미안해요. 그래도 높은 분이니 잘 모셔 주세요’라고 다독였지. 그때만 해도 그런 인정이 있었던 사람이었죠."
윤 검사, 노래방에서 버려지다
이쯤에서 서두에 등장했던 문제의 그날로 돌아가 보자. 그 전날 그들은 밖에서 회식했다. 폭탄주로 몸과 마음이 모두 불콰해진 그들은 2차로 노래방에 갔다.
한 노래방의 내부 모습. 중앙포토
노래방에서도 폭탄주는 계속 돌았다. 그리고 그날 윤 검사는 과음했던지 인사불성이 됐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노래방 소파에 몸을 뉘더니 큰 대자로 뻗었다. 노래를 마친 검사들이 머리를 맞댔다.
"어떻게 하지?"
그를 처리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거구였기 때문이다. 한 검사가 그를 둘러업으려고 시도했다가 곧바로 포기했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노래방 종업원이었다.
"손님들, 저분은 제가 책임지고 모셔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귀가하세요."
검사들은 내심 잘됐다 싶어서 그를 그 종업원에게 맡긴 뒤 귀가했다. 이후 상황을 E씨가 설명했다.
"분명히 종업원한테 맡기고 나왔는데 다음 날 윤 검사가 출근해서는 ‘왜 나를 안 데리고 갔느냐’고 반농담조로 항의했어. 알고 보니 그 종업원도 윤 검사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시도했다가 너무 크고 무거우니까 결국 못했나 봐. 그래서 그냥 노래방에 버려두고 퇴근한 거지. 윤 검사는 아침에 눈 떠 보니 노래방 소파 위에서 자고 있었던 거고."(웃음)
그가 술만 좋아한 건 아니었다. 단것도 좋아했다. 강릉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F씨가 말했다.
"지금 경포해수욕장에 아주 유명한 호텔이 있잖아요. 스카이베이호텔. 우리가 강릉에서 일할 때만 해도 그 자리에 코리아나호텔이 있었거든. 거기서 팥빙수를 팔았는데 윤 검사가 그걸 그렇게 좋아했어. 여름이면 택시 타고 거기까지 가서 팥빙수 한 그릇 먹고 돌아오곤 했지."
경포해변에 있는 스카이베이 호텔. 원래 강릉 코리아나호텔이 있던 자리에 새로 들어섰다. 중앙포토
형사·마약·공안·공판 다 했다
그렇다고 그가 강릉에서 검사로서의 본분을 게을리했던 건 아니다. 강릉은 검사로서의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처음 알린 곳이다. 1996년 7월 13일 강원도민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춘천지검 강릉지청 윤석열 검사는 12일 대마초·양귀비 등 마약류 불법 재배자 15명을 적발해 이 중 김모(61), 신모(48·농업) 표모(65)씨를 대마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그의 이름을 입력해 검색한 결과 찾아낸 가장 오래된 기사다. 같은 신문 9월 6일 자에서는 이런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허위학력과 경력을 공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 된 홍희표(58) 국회의원에게 징역 10월이 구형됐다. 춘천지검 강릉지청 윤석열 검사는 5일 춘천지법 강릉지원 형사합의부 심리로 열린 구형공판에서 이같이 구형했다."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다.
"춘천지검 강릉지청 윤석열 검사는 17일 이모(44)씨를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 16일 새벽 0시30분쯤 강릉시 교동 춘천지검 강릉지청에서 검찰 직원 윤모·김모씨가 약식명령에 따른 벌금을 납입하지 않은 자신을 관계법에 따라 강릉교도소로 유치하려고 하자 주먹을 휘둘러 윤씨에게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힌 혐의다."
이후 그가 특수통으로 큰 칼 휘두르며 처리했던 초대형 사건들과 비교하면 지극히 소소한 사건들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때 그는 아직 특수통이 아니었고, 검사가 네 명뿐인 작은 지방 검찰청에서 형사, 마약, 공안, 공판 검사 역할까지 모두 했던 시절이다. 그렇게 그는 작은 사건들을 하나둘 처리하면서 다방면에서 검사로서의 노하우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6년 9월 18일 미처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사건을 만나게 된다.
청천벽력,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서장님, 윤석열 검사입니다. 어제 상황은 어땠습니까?"
전화기 건너편에서 강릉경찰서장이 소리 높여 답했다.
"아, 윤 검사님. 어제요? 그러니까 이광수가 ‘나를 죽이시오’라고 소리소리지르더라고요."
"그래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래서 내가 북한 사투리로 ‘내 아버지가 신의주 사람이오’ 하면서 다독였죠. 그러니까 좀 누그러지더라고요."
"아 아주 잘하셨네요. 역시 서장님, 대단하십니다. 그랬더니요?"
"이광수가 좀 누그러들더니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내 말을 듣더라고요. ‘옷 갈아입고 나오시오’ 하면 옷 갈아입더라고."
1996년 강릉 해안으로 접근하다 암초에 걸려 좌초한 북한 잠수함을 군 당국이 인양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6년 9월 14일 미명에 함경남도 락원군에서 상어급 잠수함 한 대가 은밀하게 출항했다. 이튿날 강릉 해안 300~400m 지점에 멈춘 그 잠수함에서 정찰조들이 빠져나오더니 잠수와 수영을 통해 육지에 상륙했다. 수중에서 대기하던 그 잠수함은 17일 그들을 태우고 귀환하기 위해 해안으로 접근하다가 암초에 걸려 좌초했다. 그걸 9월 18일 새벽 택시운전기사 이진규씨가 발견하고는 당국에 신고했다.
군경은 대대적인 수색 및 체포 작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잠수함 내부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몇 명이 거기 승선했으며 몇 명이 상륙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우왕좌왕하던 당국 입장에서는 천운과도 같은 일이 바로 9월 18일 오후에 벌어졌다. 잠수함에 타고 있던 북한 공비 한 명이 경찰에 생포된 것이다.
그는 해당 사건의 유일한 북측 생존자인 잠수함 조타수 리광수였다. 그는 당일 오후 4시30분 거동수상자를 발견했다는 농부 홍성은씨 부부의 신고로 출동한 강릉경찰서 강동파출소 소속 최우영 경장과 전호구 경장에게 체포됐다. 그는 당국의 끈질긴 설득 끝에 입을 열었고, 그 결과 당초 10여 명 정도로 예상됐던 승조원 수가 총 26명에 이른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당시 유일하게 생포됐던 리광수(왼쪽)가 1996년10월 29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휴전선을 통해 귀순한 북한군 중사 곽경일. 중앙포토
이 중 11명은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한 자체 처형으로 사망했고 모두 사체로 발견됐다. 군경은 11월 5일까지 대대적인 추격 및 소탕 작전을 벌여 13명을 사살했다. 한 명은 끝내 행방을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이름이 이후 북한에서 발행된 선전물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그 역시 사망한 것으로 정리됐다. 하지만 우리 역시 군경 13명과 민간인 5명(예비군 1명 포함)의 사망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강릉 무장공비들을 추적하던 군인들이 작전 회의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공비 소탕 및 정보 수집은 정보기관과 군경의 몫이었지만 검찰 역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강릉지청 검사들은 국군 기무부대, 안기부 지소, 경찰 등으로 담당을 나눠 진행 상황을 조사한 뒤 정리해 보고서를 올려야 했다. 그때 윤 검사가 맡은 곳이 강릉경찰서였다. 이광수를 체포해 압송한 바로 그곳이었다. E씨는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때만 해도 검사가 경찰서장 만나는 게 가능하던 시절이었어. 윤 검사가 당시 강릉서장을 자주 만나고 잘 구슬러 가면서 역할을 아주 잘했어. 친화력이 있으니까 가능했던 거지. 매일 리광수에 대한 수사 상황을 체크해 정보보고를 했는데, 아주 성실하게 잘했던 걸로 기억해."
다사다난했던 강릉에서의 1년을 마친 뒤 윤 검사는 차츰차츰 중앙 무대와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수원지검 성남지청에서 2년을 근무한 그는 마침내 1999년 3월 ‘꿈의 무대’인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에 입성했다. 그것도 무려 특수부였다. (계속)
*********************************************
5회 특수부와 공판부, 영광과 분노
“변호나 똑바로 해 이 XX야”…법정서 터졌다, 尹 폭언·막말
2001년의 어느 날 서울지법(현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 피고인석에 한 젊은 남성이 잔뜩 주눅든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있던 그는 간혹 고개를 들었다가 황급히 내리길 반복했다. 잠시나마 그의 시선이 향했던 곳에는 법복을 입은 판사가 염라대왕처럼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의 왼쪽에는 저승사자가 있었다. 역시 법복을 입은, 덩치 큰 검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사건 기록을 넘기다가 때때로 그를 노려봤다.
재판 장면이 공개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이례적 경우 중 하나인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재판 출석 모습을 참고해 법정의 내부 모습을 엿보자. 사진을 기준으로 왼쪽 윗부분에 재판장을 비롯한 판사들이 앉아 있고, 오른쪽 윗부분에 변호사들이 앉아 있다. 검사석은 맨 왼쪽 가운데 법정 경위 옆으로 살짝 보인다. 중앙포토
그의 구원자는 오른쪽에 있었다. 그 구원자, 변호인이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피고인은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혐의를 인정합니까?"
"인정하지 않습니다."
"피고인은 그 여성과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진 것이지 강제로 그렇게 한 건 아닌 것이죠?"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강간이 아니라 화간(和姦)이었던 것이죠?"
"네, 그렇습니다."
변호인 신문이 끝난 뒤 마이크는 검사에게 넘어갔다. 검사석에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기록을 넘기던 이는 윤석열 서울지검 공판부 검사였다. 한참 동안 기록을 뒤적이던 그는 마침내 무엇인가를 찾아낸 듯 한 대목을 펼친 채 피고인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고인은 완강하게 “강간이 아니라 화간이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문답의 반복 끝에 윤 검사가 폭발했다.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사건 기록을 손에 쥐고 피고인에게 다가간 뒤 그걸 들이밀었다. 그리고 일갈했다.
"이래도 화간이냐?"
그와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검사가 일갈 이후 취한 행동에 판사, 변호인, 피고인은 물론이고 방청객까지 깜짝 놀랐다.
다음은 당시 그와 함께 공판부에서 근무했던 전직 검찰 간부 G가 전한 당시 상황이다.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이 계속 혐의를 부인하면서 화간이라고 우긴 모양이야. 하도 완강하게 우기니까 윤 검사가 법정 안에서 사건 기록을 다시 살펴본 거야. 거기에는 그 피고인이 강간범임을 입증할 진술과 증거가 명확하게 나와 있었지. 그래서 윤 검사가 공판 중간에 기록 뭉치를 쥐고 그 부분을 펼쳐서 피고인에게 직접 보여주면서 ‘이래도 화간이냐?’고 따져 물었어."
그의 말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래도 혐의를 부인하자 윤 검사가 급기야 그 서류를 피고인의 얼굴에 대고 문대버렸어."
난리가 났다. 이후 상황에 대한 G의 말이 이어진다.
"그때 피고인 측 변호인이 ‘아니 지금 뭐하는 거냐’고 항의했는데 윤 검사가 굴하지 않고 맞받아쳤지. 그런 상황이 이어지다가 변호인이 감정이 격해져서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목소리를 높였어. 그 변호인이 형사합의부 부장판사 출신 전관이었거든. 그런데 그게 일을 더 키웠어. 윤 검사가 열 받았는지 “변호나 똑바로 해, 이 XX야”라고 막말을 해버렸어."
재판을 계속 진행하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재판장은 휴정을 선언했다. 휴정 이후 상황은 어땠을까. G가 말을 이어나갔다.
"휴정 이후에 윤 검사가 나한테 오더니 사정 설명을 하면서 ‘나는 재판 못 들어가겠으니 대신 좀 들어가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오후 재판에는 내가 들어갔어. 그랬더니 재판장이 나한테 ‘윤 검사님 화 많이 나셨어요?’라고 묻더라고."
막말과 폭언, 발현하다
어느새 윤석열 대통령의 특징으로 못 박혀버린 요소 중에 막말과 폭언이 있다. 위 사례는 적어도 취재팀이 확인한 내용 중에서는 그런 특징의 발현이 목격 또는 증언된 거의 최초의 사례다.
물론 G의 말에 과장이 섞였을 거라는 변론도 있다. 전직 검찰 간부 A씨는 “윤 대통령은 대외적으로 굉장히 예의 발랐던 사람이라 공개 법정에서 그렇게까지 했을 리는 없다. 말한 사람이 다분히 과장을 섞어서 이야기한 것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취재팀이 문의했던 전직 검찰 간부 중에서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답한 이가 적지 않았다. 실제 윤 대통령의 격노와 막말, 폭언은 ‘목격례’가 많다. 그리고 그런 특징을 국정 운영이 원활하지 않았던 중요 사유로 지목하는 이들도 있다.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유사 사례들은 연재가 이어지는 동안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그렇지만 그날의 저 행동에만 한정할 경우 애써 그를 변호할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 당시 그는 화가 많았을 수 있었다. 그 직전까지 서울지검 특수부 소속이던 윤 검사는 당시 공판부로 적을 옮긴 상황이었다. 크게 물을 먹었다고 볼 수 있다.
2007년 모의 국민참여재판이 열린 한 법정 내부 모습. 공판검사는 사진 속 검사처럼 법복을 입고 재판에 임한다. 중앙포토
공판검사는 말 그대로 공판을 전담하는 검사다. 다른 검사들이 사건을 기소하면 그 사건의 공소유지만 담당한다. 직접 사건을 수사해 기소하거나 경찰에서 넘어온 사건의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흔히 생각하는 검사의 역할과는 업무가 좀 다르다. 물론 그 역시 검사의 업무이며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역할일 수도 있지만, 공판부가 선호 직역이 아니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더구나 윤 검사처럼 특수부에서 큰 칼을 휘두르며 나쁜 놈들 때려잡던 검사에게는 여간 갑갑한 일이 아니었을 게다.
그는 왜 공판부 검사가 됐을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자.
윤석열 검사, 꿈에 그리던 서울지검 특수부 입성
1999년 3월 그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서울지검에 입성했다. 1994년 대구지검에서 임관한 뒤 강릉지청, 성남지청을 거쳐 5년 만에 꿈의 무대에 입성한 것이다. 그것도 무려 특수부였다.
서울중앙지검 청사. 윤석열 대통령이 입성했던 1999년에는 서울지검으로 불렸다. 김상선 기자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검찰의 꽃은 공안이었다.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나라의 검찰답게 간첩 잡고 ‘불법 시위’를 엄단하며 선거를 ‘관리’하던, 그리하여 정권의 유지에 봉사하던 공안 검사는 검찰 내부에서 가장 각광받는 보직이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종막을 고하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반적인 사회 민주화 움직임 속에서 간첩 사건은 예전만큼 ‘영양가’가 높지 않게 됐고, 선거에 관여할 수도 없게 되면서 검찰이 옴치고 뛸 영역 역시 좁아졌다. 공안의 약화는 필연이었다. 특히 그 스스로 공안당국의 최대 피해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뒤 이런 흐름은 급속도로 강해졌다. DJ의 공안 검사들은 스스로를 ‘신공안’이라 부르며 과거의 ‘구공안’과 차별화하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992년의 중부지역당 사건을 보도한 중앙일보 지면. 공안이 기울기 전 마지막으로 쏘아올린 불꽃이었다. 중앙포토
공안이 약해지면서 생긴 공백을 특수가 잠식하기 시작했다. 독재정권 시절 감히 권력자들은 건드리지 못하고 주변부 수사나 담당했던 특수부가 민주화와 이로 인한 사정 정국 조성을 계기로 수사 대상자들의 ‘급’을 급속도로 높여나갔다. 6공 황태자 박철언 전 의원을 잡아넣은 슬롯머신 사건(1993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피고인으로 법정에 세웠던 ‘12·12, 5·18’ 및 ‘전·노 비자금’수사, 초유의 현직 대통령 아들 구속으로 이어진 김현철 사건(1997)을 거치면서 대검 중수부와 서울지검 특수부는 검찰의 핵심 중 핵심으로 우뚝 섰다.
1997년 심재륜 당시 대검 중수부장이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를 구속기소하면서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검찰 내부 권력이 공안에서 특수로 넘어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중앙포토
윤 검사가 서울지검 특수2부에 배속됐던 1993년 3월은 검찰 내 권력 교체가 일단락되고 특수부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무렵이었다.
살아 있는 권력 실세 구속한 6년 차 검사
"박희원 경찰청 정보국장을 소환조사 중입니다. 오늘 중 구속영장을 청구할 예정입니다."
김대중 정부의 경찰 실세였던 박희원 경찰청 정보국장이 구속수감되고 있다. 그는 현직 치안감으로는 사상 세 번째로 구속기소된 인물이었다. 중앙포토
1999년 5월 19일 서울지검 기자실에 깜짝 뉴스가 전파됐다. 몇 가지 측면에서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경찰청 정보국장은 실세 중 실세였다. 정보를 쥐는 자가 국가를 손에 쥐던 시절 정보기관도, 검찰도 정보에 있어서만큼은 경찰을 당해낼 수 없었다. 당시 이미 인원이 10만 명에 육박하던 경찰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가가호호 숟가락 숫자까지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무수한 정보가 취합돼 청와대에 매일 올라갔다. 그걸 최종 정리하던 이가 바로 정보국장이었다. 그렇게 힘센 정보국장을 소환한 건 이제 겨우 6년 차이던, 그리고 서울지검 입성 2개월에 불과했던 윤석열 검사였다.
윤 검사는 초임지인 대구지검에서 익혔던 장기를 발휘했다. 경찰 수사 기록 중 미진한 부분을 파고들어 경찰이 놓친 부분을 파헤친 것이다. 그는 성북경찰서에서 올라온 아파트 관리 비리 의혹 사건 서류에서 ‘고의 부실 수사’ 냄새를 맡았다.
경찰은 사건의 핵심인 아파트관리업체 대표 김모씨는 입건조차 하지 않고, 그 회사의 용역업체 관계자만 불구속 입건했다. 윤 검사는 김씨를 불러 추궁한 끝에 “박희원 국장에게 2000여만원을 주고 수사 무마 부탁을 했다”는 진술과 박 국장의 이름이 적힌 뇌물 장부를 확보했다. 박 국장은 김씨한테 돈을 받은 뒤 성북경찰서장에게 “잘 처리해 달라”고 전화를 넣었고, 그 결과 김씨는 사법처리를 면할 수 있었다.
증거는 명확했지만 사안은 민감했다. 경찰 실세였던 박 국장은 정권의 사람이었다. 정권 실세들의 직간접적인 방해 공작이 검찰 곳곳에 내리꽂혔다. 경찰도 노골적으로 ‘수사 의도’를 의심했다. 공교롭게도 경찰은 그해 연초부터 ‘수사권 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검찰과 일전을 불사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온갖 논란과 방해 공작을 불식시킬 정도로 깔끔했다. 박 국장은 명확한 물증 앞에서 영장실질심사도 신청하지 못할 정도로 완패했다. 경찰도 고위 간부의 수뢰 비리에 대한 사과 성명을 내면서 패배를 자인했다.
이 사건은 그의 경력을 빛나게 해 준 서막 같은 사건으로, ‘윤석열 연대기’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마다치 않는다는 ‘윤석열 신화’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시발점이기도 하다.
윤 검사는 이후에도 면세점 운영과 광고 발주 업무와 관련해 업체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챙긴 혐의로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비롯해 전·현직 간부 6명을 구속기소 하는 등 순조로운 행보를 이어나갔다. 그랬던 그가 왜 공판부로 밀려나고 부산지검으로 날아가 결국 사표를 내야 했을까. 다음 회에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