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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 밀 Feb 27. 2023

마닐레


육아휴직 복귀 후 더 이상 회사에 대한 열의가 생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일이란 것이 내 맘대로 오고 가는 것이 아니기에 최근 갑작스레 몰아치는 일거리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게다가 아버님까지 급 안 좋아지시는 가정사까지 겹치다 보니, 이래저래 글 쓰는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고, 또 며칠 글을 안 쓰다 보니 글쓰기가 귀찮아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스트레스도 받았으나, 생각해 보니 내가 전문적인 글쟁이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요, 매주 2번 정도 글을 올리기는 했으나, 연재소설이나 웹툰처럼 매주 언제 언제 올린다는 말도 해본 적도 없고, 편한 마음에 글을 쓰는 취미를 가졌을 뿐인데 그걸로 다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싶어, 글쓰기가 싫을 때는 안 쓰면 그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참 쉬다가 보면 또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럼에도 오늘 글을 쓰는 이유는 얻어걸린 글감을 놓치기 싫어서이다.




주말에 장인어른의 생신이 있어 토, 일요일 1박 2일로 처가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일요일 늦은 오후.

한가로이 휴일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던 때.


난 거실에서 여느 때와 같이 TV를 틀고,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다.

(왜 그냥 핸드폰을 보는 것이 아니고, TV를 틀어 놓고는 핸드폰을 보는 것인지…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이 행동이 나에게 주는 마음의 안정이란 것이 있나?)


첫째 딸아이는 자기의 방에서 뉴진스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안방에서는 와이프와 둘째가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근근이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으악! 아!!”


갑자기 안방에서 와이프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와이프는 평소에도 소리를 잘 지른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 발생한 사건(대부분 별 일이 아니다.)보다 와이프가 소리 지르는 행동 때문에 놀랄 때가 많다.


당연히 대수롭지 않은 일 일거라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얼굴 한 번 보이고 걱정을 해 주는 ‘척’이 필요하다.


“왜? 무슨 일이야?”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며 묻는다.


와이프의 놀라는 표정도 아닌, 황당하면서도 웃겨하는? 애매모호한 표정과 둘째 딸아이의 자지러지며 웃는 모습.


‘이 상황은 뭐지?’


평소에 보아오던 상황에 짓는 표정이 아니라서 약간 당혹스럽다. 와이프의 상황에 따라 반응하기 위해 간직하고 있던 약 10여 개의 내 반응공식에 없는 표정이다.


“ㅋㅋㅋ. 아… 미쳐… 아.. 진짜… 하하하.”


“아.. 엄마.. 이걸 몰랐어? 꺄르르르르르”


와이프와 둘째 딸이 미친 듯이 웃어댄다.


“왜? 왜? 무슨 일인데?”


갑자기 급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한다.

자기 방에서 춤을 추던 첫째까지 안방으로 와서 상황 파악 중이다.


“아… 오빠? 오빠는 이거 알았어?”


“뭐?”


“아니… 루돌프사슴코 노래를 부르는데… 나 지금까지 만일 네가 봤다면을.. ‘마닐레‘가 봤다면..으로 알고 있었어..”


“응?”


그 이야기를 들은 첫째 딸아이도 미친 듯이 웃는다.

첫째와 둘째의 자지러지는 웃음.


“만일 네가 봤다면을.. 마닐레가 봤다면…으로 알았다고?”


“어…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45년을 살면서… 어릴 때도 노래 부르면서 ‘마닐레‘가 누구일까? 궁금은 했는데, 또 귀찮아서 찾아보지는 않았거든? 그냥 종교에 나오는 어떤 인물이 아닐까.. 생각은 했는데, 그 노래 말고는 마닐레라는 이름을 들은 적은 없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다 생각해서 안 찾아봤는데… 이제야 ‘만일 네‘가 봤다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네. 아.. 미치겠다.. ㅋㅋㅋㅋ”


“하하하. 미치겠다.. 진짜 웃기네.”


나 역시 황당한 상황이지만 웃음이 터지기 시작한다.


별 것 아닌 일이지만 우리 가족 4명은 이 작은 에피소드로 미친 듯이 웃어댄다.


안방에서 와이프와 둘째가 루돌프사슴코 노래를 같이 부르다가, 둘째가 엄마 발음이 이상하다고 이슈를 제기하다가 (만일네..마닐레.. 얼핏 상대방이 들으면 잘못 부른다고 인지를 못할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알아챘다고 한다.


“ㅋㅋㅋ. 아니.. 45년을… 어떻게.. 마닐레로 알 수가 있지? 진짜… 나도 오빠 닮아가나 봐.”


4명의 가족이 미친 듯이 웃으며, 나중에 크리스마스 관련 캐릭터로 ‘마닐레‘를 만들어보자는 둥, 다른 캐럴에 마닐레를 넣어서 불러보는 둥, 30여분을 한참 웃고 재밌게 보낸 것 같다.


별 것 아닌 실수에도 이렇게 재밌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행복하게 느껴진다.




한바탕 소동 후에 다시 소파로 돌아와 핸드폰을 바라본다.

와이프도 아이들과 함께 거실로 나와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아이들과 함께 ‘런닝맨’을 보며 웃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생각.


와이프가 항상 의심하던 나의 학력.

뭐 하나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없고, 자신이 이야기할 때마다 다 잊어버리는 금붕어 기억이라며, 좋은 대학 나온 것 다 뻥 아니냐는 와이프의 의구심.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와이프의 학력이 심히 의심스럽다.

나름 최고의 여자대학을 나왔었다고 하는 사람치고는 아무리 그래도 45년간을 어떻게 ‘만일 네가 봤다면’을 ‘마닐레가 봤다면’으로 알 수 있는가?

살면서 한 두 번쯤이라도 마닐레가 궁금해서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나를 닮아간다고?

결혼을 한 지가 십몇 년 밖에 안 되었는데, 45년을 모르고 지내고선 나를 닮아간다니..


‘런닝맨’을 보며 웃는 와이프를 다시 한번 바라본다. 뭐가 재밌는지 아이들과 깔깔대며 웃는다.


’ 음.. 의심스러워..’


별로 웃기지도 않는 장면인데도 자지러지듯 웃는 와이프를 보니 내 의구심이 더 커져 간다.


와이프에 이어, 나도 배우자의 학력 위조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부부 사이에 의심의 싹이 커지기 시작한다.






P.S. 언젠가 내 그림에 ‘마닐레‘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보고는 싶다. 흐.. 뭔가 재밌는 캐릭터 같지 않은가?


——


글을 수정했다.

나도 지금까지 잘 못 알고 있었다.

만일 ‘내’가 봤다면.. 으로 알고 있었는데,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만일 ‘네’가 봤다면.. 이다. 이런… 남말 할 처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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