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과 즉흥, 이게 바로 재즈
10월 중순을 지나 오랜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대학 동기이자 교직이라는 같은 길을 걷고 있고 말도 잘 통하니 나이와 관계없이 친구이다. 그녀와는 대학 시절 이후로는 뜨문뜨문 연락을 이어갔고 내가 서울로 오게 된 후로는 더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시험 기간이라는 교사의 4대 명절에 약속을 잡는 것을 놓쳐 우리의 만남은 주말 낮에 이뤄졌다. 내가 가보고 싶던 이태원 해방촌에 함께 가자고 했다. 팟캐스트 <비혼세>에서 추천받은 '서울앤쏘울', '비탈'을 꼭 가보고 싶었는데 '비탈'은 일요일은 예약으로 운영되기도 했고 저녁 늦게 열어, 우선 '서울앤쏘울'을 해방촌 투어의 첫 장소로 정했다. 10년을 경기도민이었던지라 서울에서 서울은 강을 건너든 건너지 않든 가깝게 느껴진다. 대중교통의 배차 간격도 짧으니 갈아타는 일도 수고롭지 않았다. 이런 마음은 청명한 하늘과 단풍 때문일 수도 있다. 새로 알게 된 팟캐스트를 들으며 버스 창 밖 경치를 보며 때로는 책을 읽으며 가을을 만끽했다. 버스에서 내려 해방촌으로 향했다. 카카오맵이 알려주는 대로 오르막, 내리막을 걸으며 '이 길이 진짜 맞나?'라는 생각으로 길을 가는데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은 의구심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주민으로 보이는 행인은 '여기 맞아. 이 오르막이 맞아.'라는 표정으로 나를 지나쳐 가는 듯했다. 블랙 미니 원피스에 롱부츠를 신은 상태로 햄스트링의 이완을 느끼며 언덕을 올랐다. 평소 운동량에 비하면 스트레칭 수준이라 괜찮았다.
그리고 '서울 앤 쏘울'에 도착했다. 지중해 느낌의 청록색 페인트가 마음에 들었다.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테이블마다 생화가 꽂힌 화병, 식기류, 밖에서 들어오는 자연광, 주모가 쉼 없이 테이블을 살피며 요리를 하는 오픈 키친의 조화가 '오늘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 혼세님 정말 최고다. 오늘 약속 잡기를 정말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버스에서 읽던『책과 우연들(김초엽)』을 꺼내 이어 읽으려 했지만, 이 순간을 담기 위해 인스타 스토리 업로드만 했다.
파란 하늘과 산등성이, 골목 양쪽으로 줄지어 있는 새로 생긴 가게와 오래된 가게, 상가와 주거지, 근거리의 다닥다닥 붙은 작은 방들과 원거리에 홀로 선 N서울타워(난 아직도 남산타워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고 정겹다, 그러니 앞으로는 남산타워라 칭하겠다). 해방촌에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한 시야에 담길 정도로 공존하며 대립하지 않고 있었다. 이는 묘하게 정감 있으면서도 힙한 분위기를 풍겼다. 해방촌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모르지만, 내 마음대로 가설 중 하나는 '용도에 다른 경계 따위에서 해방한 마을'이라는 것이다.
* 찾아보니 해방촌은 1945년 해방 이후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 북쪽에서 월남한 사람, 한국전쟁으로 피난온 사람들이 정착한 동네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구니 제20사단의 사격장으로 사용되었다가 미군정청이 그 지역을 접수하기는 했으나 통제력이 약해 실향민의 차지가 된 곳으로, 소설 ‘오발탄’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위키백과)
'서울 앤 쏘울'의 메뉴는 건강하면서 흔치 않은 음식들로 구성되었다. 1차로 감자전과 비프 그라탕(파스타 없이), 논알코올음료를 시켰다. 맛은 말해 모해. 2차로는 마라 떡볶이와 글라스 와인을 시켰다. 양도 맛도 가격도 완벽하면서 적당했다. 게다가 서울페이 결제가 가능했다. 해방촌 방문을 위해 미리 용산구 서울페이를 사두었는데 은근 서울페이가 안 되는 곳이 많았던지라, 반가웠다.
다음으로 근처의 '쉘터 서울'을 갔다.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전신샷을 찍을 수 있는 카페로 뷰가 좋다고 하여 저장해 둔 곳이었다. 프릳츠 커피를 제공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테라스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다가 얼른 하나를 차지하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론 사진 마음에 들 때까지 찍어주기를 포함하여.
낮에는 반팔을 입어도 괜찮을 정도로 기온이 높았는데 점차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기온이 내려갔다. 우리는 실내 '칵테일바'로 향했다. 해방촌을 검색하며 꼭 가볼 곳으로 저장해 두었던 '헤엄'을 찾아갔는데, 아쉽게도 긴급 휴일이라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헤엄은 인스타로 공지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문자나 네이버로 예약을 해야 한다고 (아마도) 사장님께서 서성이는 우리에게 얘기해 주셨다. 다음 방문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헤엄을 찾아가는 길에 우리는 즉흥으로 '인생네컷'도 찍었고(둘 다 인생 처음이었다. 학창 시절 스티커 사진 찍은 이후로), 식료품점도 방문했고, 화영연화 분위기의 장소 앞을 서성이며 느낌 있는 사진을 찍었다.
J형 인간이자 카카오맵 신봉자인 나는 다시 카카오맵 평점 4.5 이상의 근처 바를 검색했고 '록시'를 찾았다. 꽤 오래 걸었는데 해방촌이 아닌 경리단길에 속한 곳이었다. 가는 길에 횡단보도에서 엄청 큰 악기와 함께 서있는 외국인을 보았는데, 이게 복선이었다. 지하에 있는 바의 어두운 분위기와는 다르게 칵테일은 상큼했다. 음악이 좋긴 했지만 음악 소리가 대화를 방해할 정도로 커서 오래 머무르기는 힘들었다. 요즘 카맵 평점에 대한 신뢰가 조금씩 내려간다 (물론 네이버보다는 10배 이상 신뢰함). 오늘 투어의 마지막 장소로 다른 곳을 물색했다. 좋은 장소를 찾는 역할은 친구에게로 넘어갔다. 마찬가지로 J형인 그녀도 근처에 좋은 '재즈바'가 있는 것 같다며 평을 찾아보고 문자로 방문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가능하다는 답장을 받은 우리는 '부기우기'라는 바로 향했다.
'부기우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반했다. 우리 둘 다 재즈를 좋아하고, 적당한 집중이 필요한 일을 할 때 jazz streaming을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래된 사이라고 해서 취향까지 알기는 어려운 게 당연하다. 그런데 우연히 알게 되니 유대감이 더 깊어진 느낌이었다. '왓츠 인 마이 백' 혹은 '지금 듣는 음악이 무엇인지를 행인에게 묻는 콘텐츠' 같은 것의 조회수가 높은 이유는 새로운 물건이나 취향을 알 수 있다는 것도 있지만 나와 같은 점을 타인에게서 찾았을 때의 기쁨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 〈소울〉을 여러 번 볼 정도로 좋아하는데, 라이브로 재즈를 들으니 '즉흥성'이라는 매력이 추가되어 재즈가 더 좋아졌다. 가사 없이 연주하는 팀의 공연을 연달아 보았는데 가사가 없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무대의 콘트라베이스를 든 외국인이 아까 록시를 가면서 횡단보도에서 잠깐 마주쳤던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곳에 올 운명이었나 보다.
2022년 10월의 만남은 계획과 즉흥으로 이태원의 곳곳을 만끽하게 했다. 날씨의 탓도, 오랜만에 만난 탓도, 지금까지 나누지 않았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 탓도 있을 것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더 완벽한 하루였다. 오늘의 만남이 바로 재즈! 순간들이 좋아서 기억에 더 남기려고 했다. 이틀이 지난 오늘은 글로 남긴다. 이날 느낀 행복으로 또 현생을 살아가겠지. 현생 중에도 이런 기억을 더 자주 남겨야지. 할 일을 미루고 이 글을 쓰는 일도 행복을 되새김질하는 일이니까, 오늘의 행복은 할당량을 채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