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자국을 남기는, 책자국
2019년 9월 혼자 훌쩍 떠난 제주의 동쪽 끝 작은 마을, 종달리에서 책자국을 만났다.
주인 부부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배려들과 조용히 흘러나오는 가사 없는 음악과 시끌벅적 대화를 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책을 읽고자 찾아온 사람들, 그리고 예쁜 잔에 나오는 맛있는 커피는 이곳에 평생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그 시기는 제주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대기를 하는 시간에도 우리 반 아이의 자소서를 최-최-최-종까지 첨삭해준 다음이었기에 후련한 마음이 큰 시기였다. 그럼에도 여유로움을 누리지 못했다. '이다음에는 어디를 가볼까? 이 주변의 맛집은 어디일까? 내일은 어딜 가야 후회가 없을까?' 등의 고민으로 스마트폰을 검색하면서도, '이런 곳을 또 만나기 어려울 텐데 검색은 그만해야 하는데.'라며 이런 생각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그 시기 제주에서 어디를 갔더라도 행복했을 텐데 좀 더 책과 음악과 커피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든다.
책자국의 북 큐레이션을 보는 일도 좋았다. 몇 년째 독서 권태기가 왔다는 핑계로 읽기 쉽고 머리 아프지 않은 책을 읽었는데, 주인장님의 다양한 분야의 책에 관한 추천사를 보면 독서 욕구가 올라갔다. 결국은 내가 이해하기 쉬운 책이나 그래픽 노블을 샀지만, 책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기에 책에 대한 타인의 생각을 읽는 일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책자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은, 책자국에 남긴 사람들의 방명록이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다른 사유를 하는 타인이 적은 글이었지만, 어느 것 하나 공감 가지 않는 글이 없었다. 책자국을 지나간 사람들의 자국은 글의 길이나 글조에 상관없이 울림이 있었다. 책자국에 그런 손님들만을 끄는 무언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2020년에는 종달리에 더 오래 머물며 책자국 근처 숙소에 머물렀다. 머물렀던 숙소도 참 좋았다. 그렇게 충전을 하고 다시 현생으로 돌아갔다.
2021년은 내 인생의 큰 변곡점이 생겼다. 대학원 연구실로 출근하게 되었고, 수업을 하지 않고 듣게 되었다. 꿈꾸던 바였고, 하고 싶던 일들을 여유롭게 해 나갈 수 있는 시기가 왔다. 그런데도 나는 또 여유가 없었다. 욕심을 부렸다. 남들처럼 투자도 잘하고 싶었고, 내 연구도 잘하고 싶었다. 길을 다니면서는 무언가를 알려주는 팟캐스트나 유튜브를 들었고, 식단과 운동 계획을 지켰고, 어깨는 펴고 다리는 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누구도 보채지 않는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지키지 못하면 좌절해버렸다.
내 인생에 진짜로 여유가 있었던 적이 있었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간 제주에서조차 효과적인 선택을 하고 싶어 했다. 숨 돌릴 새 없는 현생을 피해 갔으면서도.
결국, 현생이란 것은 현재인데, 여행하는 나도, 여행하지 않고 일상을 보내는 나도 나인데.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보겠다는 마음은 영수증의 글자처럼 흔적 없이 증발해버렸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간직했다가 펴겠다고 황진이가 말했듯, 책자국에서의 그 한적함을 떼어다가 여기에 놓고 싶을 때가 있다. 그곳이 주는 울림을 나는 마음에 자국으로 남겼다. 자국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른 물건이 닿거나 묻어서 생긴 자리. 또는 어떤 것에 의하여 원래의 상태가 달라진 흔적'이라고 한다. 책자국의 문을 처음 열었을 때를 떠올리며 나는 내가 조금은 전보다 달라졌다고 믿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