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 휴가라니요.
라떼와는 다르게 요즘 여학생들은 생리통이 심할 경우, 한 달에 한 번 결석을 하고 그것을 출석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를 생리통으로 인한 인정결석(이하 ’ 생리결‘)이라 한다. “아무리 아파도 학교에서 쓰러져라, 나도 그럴 테니.”라고 등교 첫날 말씀하셨던 담임 선생님이 떠오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물론 이 제도는 교사들도 쓸 수 있지만 지금까지 아무리 아파도 이것을 실제로 이용하는 교사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고등학교 담임교사로 10여 년을 보내며 정말로 생리통이 심한 학생을 만난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없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생리결을 쓰지 않으나, 매달 빼먹지 않고 쓰는 학생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생리불순’이다. 주기가 너무 불규칙해서 걱정이 될 정도. 하지만 그녀들의 생리불순을 진지하게 걱정해 주기에는 할 일이 차고 넘치니 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형태의 결석이든 무단(미인정)이 아니라면 학부모가 담임교사에게 등교 전에 사정을 문자 혹은 전화로 알려야 하는데 나는 출근 전에는 문자를 받고 있다. 여느 때처럼 출근하기 싫은 K-직딩 모드였던 아침, 한 학부모로부터 받은 문자는 다음과 같다.
“선생님. OO이생리후가 쓰려고합니다.”
그날은 나도 생리 중인 날이었다. 띄어쓰기, 맞춤법 모두 제대로 된 것이 없었지만 가장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휴가’라는 단어였다. 나는 단어 선택에 예민한데 어떤 단어의 사용에 곧 그 사람의 무의식이 담겨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칼퇴’라는 단어에는 ‘정시 퇴근’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마음이 담겨 있다. 지금 이 학부모의 마음에는 ‘생리결’을 따박 따박 챙기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는 ’ 휴가’로 여기는 마음이 담겨있다. 물론 그러한 마음을 가진 학생의 투정이 그 배경이겠지만 이를 이기지 못한 부모도 나에겐 다르지 않다. (실제 저 학생은 생리통이 심하다는 날 눈썹 문신을 하고는 다음 날 애봉이가 되어 나타났다.)
나는 초등학교 6년을 개근했다. 워낙 건강 체질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아파도 꼭 학교에는 가야 한다는 성실을 어머니로부터 강요받았다. 일단 학교에 가서 엎드려 있더라도 아픔을 참고 견디었다. 종종 아파서 학교에 오지 않는 친구들을 보면 어느 정도로 아파야 학교에 안 올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고, 인간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는 없는 것일지 답이 없는 고민을 했다. 유전인지 양육인지 모를 성실함을 물려받은 나는 웬만한 아픔은 견딜 수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성실함이 무기인 성인으로 자랐다.
성실함이 삶을 살아가는 데 무기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최소 상위권을 노릴 수 있는 공부의 양을 채울 확률이 높다. 일명 ‘양치기’라고 하는데, 많은 양의 수능 기출문제를 풀 수 있는 근력이 있는 것이다. 둘째, ‘오늘은 하지 말까.’라는 유혹이 없다. 매일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것이 ‘당연’ 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먹는다면 매일 꾸준히 그것을 실행에 옮겨 성취할 가능성이 높다. 예외 없는 매일의 꾸준함이 만들어내는 마법에 대한 성공 스토리는 너무 많으니 이 글에는 담지 않겠다. 즉, 공부든 공부가 아닌 무엇이든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기본 체력이 바로 성실함이다. 우공이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잘하는 것과 꾸준히 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수능 이후 빵집에서 알바를 할 때도 생기부를 가져오라고 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출결’을 보기 위해서. 부모의 IQ를 물려줄 수 없다면 적어도 아이들에게 성실하게 학교에 다니는 것 만이라도 훈육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내 자식을 위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