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릭스를 들고 나타난 나의 구원자
서울을 떠나와서 아쉬운 점이 몇 가지 있지만 그중 가장 아쉬운 점은 운동하고, 식단 하고, 술도 같이 즐기는 동네 친구가 곁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네 운동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E)와 나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서로가 귀한 존재임을 알았다. 술을 좋아하니 끊을 생각은 없고,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먹은 만큼 지방을 태우기에 열심인 사람. 우리는 거의 매일 함께 걷고 뛰고 종종 술을 마시고, 다음 날 공복 유산소로 회개했다. 날이 좋으면 술과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피크닉을 즐기고, 다음날 또 걷고 달렸다. 방콕으로 이사를 한 후, 운동으로 땀을 흘리고 난 금요일 저녁이면 종종 E의 부재를 실감했다.
거기서 한 잔 각인데.
근처 새로 생긴 술집들의 위치를 이미 걸으며 봐둔 E와 함께라면 걸어갔다가 걸어서 돌아오는 것은 디폴트였고, 다음날 회개 유산소 운동을 함께 하는 것도 무언의 약속이었다. 운동과 술과 식단을 모두 하는 체력이 나만큼 좋은 동네 친구, 여기에선 아직 만나지 못했다. 쓰고 나니 유니콘인가 싶어서 삶에서 잠깐이라도 존재했음에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크로스핏 짐을 다닌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에 K를 만났다. K는 나보다 여덟 살 어린 태국인이다. 우리는 짐에서 같은 시간에 하이록스를 참여하고 난 후 스몰 토크를 하다가 친해졌다. 크로스핏을 한 탕하고, 이어서 하이록스까지 하는 나를 보고 감지를 한 것이었을까? 한국인 보스가 있어서 한국말을 조금 안다는 K는 ‘안녕하세요, 언니.’ 등으로 분위기를 풀고 이것저것 영어로 물어왔다. 나야말로 운동을 함께하는 태국인 친구가 있었으면 싶었기 때문에 K의 다가옴이 싫지 않았다. 수요일에 말을 튼 K와 나는 금요일 크로스핏을 마치고 함께 술을 마셨다. 나는 화요일에 알게 된 같은 짐에 다니는 한국인과 함께 갔고, 그녀는 이 짐에 그녀보다 오래 다닌 남사친과 함께 왔다. 같은 짐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넷이 함께 불금을 즐기게 되었다. K가 친구들과 자주 술을 마신다는 현지 감성 충만한 술집에서 만났는데, 그 장소에 그녀는 핸드릭스 진과 에일 캔을 챙겨 등장했다.
핸드릭스라니. You must be kidding.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위스키가 핸드릭스라고 말했다. 나는 술 중에서는 위스키를, 위스키 중에서는 진을, 진 중에서 핸드릭스를 가장 좋아한다. 1초 만에 답할 수 있다. 다른 버전도 아니고 그냥 핸드릭스 오리지널. 다만 방콕에서는 한국보다 약 2배 정도로 비싸서 그보다는 저렴한, 대신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진들을 골라 사 마시고 있는 중이었는데, 운명일까.
금요일 밤을 불태우고 토요일에는 약한 숙취를 안고 예약해 둔 아유타야 선셋 투어를 다녀왔다. 갈까 말까, 싶었지만 갔다. 내 주량을 조금 넘긴 했지만 깔끔하게 거의 진만 마셨기 때문에 투어를 못 다녀올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역시나, 갈까 말까 할 땐 가는 게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인을 만득이라 소개한 인상 좋은 태국인 가이드 푸 씨는 유머, 친절, 사진 센스 삼박자를 갖춘 베테랑이었고, 아유타야는 울렁거리는 숙취를 가라앉힐 정도로 고즈넉했다.
그렇게 고요한 혼자만의 토요일을 하루 갖고 다음 날은 다시 K와 함께 했다. 그녀는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었는데, 그것을 함께할 친구를 어떻게든 만드는 인플루언서였다.
혹시 여기 가봤어?
아니, 나 거기 가고 싶었어.
그래? 그럼 이번 주 금요일에 뭐 해?
약속 없는데 같이 가자. (차도 있고 오토바이도 있음)
그래서 그녀와 그 주 일요일도 함께 했다. 일요일 하루에 to go list에서 세 장소를 제거할 수 있었다. 아침에는 ‘벤짜끼띳 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점심에는 사워도우 샌드위치로 유명한 ‘바텔 스쿰빗 지점’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방콕 차이나타운’과 ‘달랏 너이’를 구경했다. 추가로, 쭐라롱껀 대학 근처에 있는 ‘반탓통’이라는 지역도 방문했다. 그곳에서는 너무 맛있는 찜쭘을 먹게 되었다. 낮잠도 한숨 자지 않고 잠깐 씻고 준비한 시간을 빼면 거의 12시간을 함께 했다. 이날은 2.5만 보 정도를 걸었는데 그녀도 걸을 수 있었다. 합격 메달 드립니다.
심지어 점심을 먹은 바텔에서 사워도우 빵이 매진이라 못 사고 돌아섰는데, 그녀는 나의 콘도에 그녀가 가장 좋아한다는 빵집의 사워도우 빵을 들고 방문했다. 차이나타운을 비롯한 이곳저곳을 그녀의 차로 이동하기 위해 차를 끌고 왔다. 그녀는 콘도에 방문한 첫 태국 친구가 되었다. K는 나를 만나서 너무 좋다고 말하는데, 내가 할 말이라서 불안해졌다. 데자뷔다. 너무 빨리 타오른 이 관계가 재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스쳤다.
그런들 어떠하리.
인간관계도 생물처럼 변한다. 연인이든 친구든, 이제는 평생 인연이라 생각하며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대신 현재의 나, 그리고 함께 보내는 시간에 집중한다.
오늘 아침 DM이 울렸다. 함께 가고 싶은 파티가 겹친 K와 나는 얼리버드 티켓을 함께 구매했다. 그녀는 얼굴에 바를 펄 장식을 샀다며 링크를 보내왔다. 드레스코드에 맞춰 입을 옷에 대한 고민도 시작됐다. 이것도 데자뷔. 파티 날보다 파티를 준비하는 이런 시간들이 더 즐거운 것인데, 30대 말 방콕에서의 설렘이 시작되고 있다.
‘나 왜 방콕에 E가 없냐.’며 슬퍼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K가 나타났다.
간절히 바라서 이뤄진 건가요? 이제 사원 지날 때마다 부처님들 노룩 하지 말고 제대로 인사드리고 살아야겠다.
컵쿠나카. 찬사바이디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