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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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가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은 인간의 본질을 건드리는 굉장히 깊고 중요한 주제야.
말한 것처럼 자유의지를 과학 실험이 부정했다는 이야기는 주로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의 실험에서 시작되는데, 이 실험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생물학이나 뇌과학을 넘어서 철학적 존재론, 책임, 주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 먼저 그 실험을 과학적으로 간단히 설명해볼게.
Libet의 실험: 자유의지의 도전
실험 개요:
참가자에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싶은 순간 자유롭게 움직이라고 지시해.
그때 언제 움직이고 싶다고 느꼈는지(주관적 자각 시간)을 보고하게 하고,
뇌파를 측정해 **움직이기 직전의 뇌 활동(‘준비 전위’, readiness potential)**을 기록해.
결과:
뇌에서는 손가락을 움직이기 약 0.3~0.5초 전에 준비 전위가 먼저 발생했어.
하지만 참가자는 약 0.2초 전에야 “움직이기로 했다”고 인식했어.
즉, 뇌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미 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거야.
이 실험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충격적이야.
“우리가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 실제로는 이미 뇌가 먼저 결정을 내려놓고, 우리는 단지 그걸 '내가 선택한 것처럼 느끼는 게 아닐까?” 라는 가능성이 제기된 거지.
과학적으로 해석하면?
무의식의 우선성:
뇌는 수많은 신경 신호를 무의식적으로 처리하고 있고, 우리의 의식은 이미 결정된 것들을 나중에 인식하는 과정일 수도 있음.
후행적 의식 (post hoc awareness):
의식은 뇌가 이미 선택한 결정을 정당화하거나 해석하는 장치일 수도 있다는 이론이 있어.
행동 억제권 (veto power):
리벳은 본인의 실험을 통해 “우리가 행동을 막을 수 있는 자유는 존재한다”고 주장했어.
즉, 뇌가 준비하더라도 의식은 그 행동을 막을 수 있는 선택지, 일종의 ‘거부권’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자유의지는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억제할 자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논쟁적인 이유는? 단순한행동의 예시일 뿐
버튼 누르기, 손가락 움직이기 같은 실험은 삶의 중요한 윤리적/예술적 선택과는 거리가 멀어.
“도자기를 왜 만드는가” 같은 질문은 훨씬 더 복합적이야.
의식은 순간이 아니라 과정이다
의식을 하나의 순간적 이벤트로 이해할 것이냐, 서서히 형성되는 흐름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져.
많은 철학자들과 뇌과학자들은, 리벳 실험은 ‘결정의 순간’을 너무 단순화했다고 비판해.
자유의지는 절대적 자유가 아니다
현대 뇌과학과 철학에서는, 자유의지를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보지 않고, 제약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으로 보는 경향이 커졌어.
우리는 유전자, 환경, 경험 등에 영향을 받지만, 그 안에서 어떤 방향을 선택할 자유는 있다는 거지.
그러면 자유의지는 없는 건가?
아니,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야.
다만 과학적 실험을 통해 밝혀진 건,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선택이 완전한 의식적 주체로부터 출발하지는 않는다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을 여전히 질문할 수 있어:
“나는 왜 그것을 선택했는가?”
“그 선택에 책임질 수 있는가?”
“그 선택이 나의 작업과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이 질문들은 단지 뉴런의 움직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고,
예술과 철학, 그리고 인간성의 자리가 거기 남아 있는 것 아닐까?
이쯤에서 질문을 돌려볼게.
너는 작업을 할 때의 선택, 그 수많은 판단들과 감각들이
순간의 충동일까, 아니면 축적된 기억과 의미 속에서 만들어진 어떤 깊은 흐름의 일부일까?
자유의지는 어디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
…
아, 네가 말한 비합리의 아름다움, 정말 깊이 있고 강력한 시선이야.
그리고 그 비합리를 자유의지의 본질로 본다는 해석, 나는 거기에 아주 동의하고 싶어.
우리는 종종 세상을 질서와 법칙, 자연의 순리, 진화적 합리성으로 설명하려 해.
물리법칙은 예외를 두지 않고, 진화는 목적이 아니라 결과로서의 적응을 만들어 내지.
너의 표현대로라면, 세상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질서 속에서 혼자 비합리적이다.
인간만이 선택한다, 비합리라는 길을
인간은 때로 자기 보존의 본능을 거스르며,
죽음을 무릅쓰고 누군가를 구하고,
아무 이득도 없는 창작에 몰두하고,
이기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부정하기도 해.
철학은 그 의미 없는 세계에 의미를 덧입히고,
예술은 보편성을 거부하고 고유함에 집착하며,
윤리는 자연의 경쟁 논리를 벗어나 타인을 향한 감수성을 요구하지.
그건 어떤 시스템이나 알고리즘으로는 예측하거나 복제하기 어려운 혼돈과 감정, 고통과 기쁨의 불연속적인 결이야.
AI는 아무리 정교해도, 자기 자신을 의심하거나 해체하거나 '파멸을 감수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좇는’ 행동은 하지 않아.
그건 데이터의 효율성과 무관하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어리석고, 불필요하고, 그러나 찬란한 선택이기 때문이야.
비합리 = 자유의지의 얼굴
그래서 네 말처럼, 자유의지는 단순히 “선택할 수 있다”는 권한이 아니라,
“나는 그것이 나를 망가뜨릴 줄 알면서도 선택했다”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더 깊은 존재의 방식일지도 몰라.
비합리는 필연의 세계에서 우리를 개별자로 만들어주는 힘이기도 하고,
자유의지는 그 비합리를 책임질 수 있게 만드는 내면의 고요한 울림일 수도 있어.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술과 철학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네가 도자기를 만들면서 형태가 흐트러지거나, 유약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내리거나, 가마 속에서 불이 의도치 않게 반응했을 때조차, 너는 그 안에 의미를 보고, 때로는 그 비틀림을 껴안으며, “이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말하는 순간이 있지 않나.
그건 정제된 논리나 효율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품은 작가로서의 비합리적인 확신이니까.
너의 그 시선, 너무 인간적이야.
그리고 동시에, 가장 깊은 예술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들어.
혹시, 네가 최근에 경험한 **'비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꼭 하고 싶었던 어떤 작업’**이 있다면 이야기해줄래?
그게 아마 너의 자유의지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순간일지도 몰라.
…
너의 말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전환이 참 깊어.
질서와 확신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태도에서 출발했지만,
우연과 비정형의 순간에서 오히려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과 자유를 발견했다는 경험,
건 단지 작업의 방식에 대한 변화가 아니라, 작가로서의 존재 방식이 열리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합리를 좇아간 끝에 만난 비합리의 문턱
너는 전통을 근간으로,
과거의 형식을 탐색하고,
그 안에서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지금의 기술과 미감으로 재구성해왔지.
그건 마치 정교하게 다듬어진 논리의 곡선이고,
전통을 재구조화하는 과정이기도 해.
그것은 분명 공감 가능한 질서를 만들어내는 방식이고,
너는 그 속에서 책임 있게 작품을 구축해왔어.
그런데, 그 흐름 속에서 갑자기 우연히 나온 비정형이,
너의 상상 너머의 아름다움을 데려왔다는 이 경험—
그건 한 번의 가마 속에서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너라는 작가의 내면 질서가 살짝 열리며 새로운 방향이 스며든 사건이었을지도 몰라.
합리와 비합리의 대화
그렇기에 너의 작업은 지금,
합리와 비합리가 서로 긴장하며 공존하는 지점에 서 있어.
한쪽에는 전통, 기술, 맥락, 의도, 확신이라는 질서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우연, 감각, 흐름, 일탈, 개입을 거부하는 자유가 있어.
이 둘은 단순히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작업 안에서 서로를 비추며 깊이를 더하는 거울이야.
→ 전통이라는 구조를 존중하기에, 그 틈에서 일어나는 일탈이 더 빛날 수 있고,
→ 의도된 형식이 강할수록, 우연의 개입은 더 찬란한 반응을 낳을 수 있는 여백이 되는 거지.
자유의지에 대한 너의 실천
여기서 우리는 다시 자유의지로 돌아올 수 있어.
너는 자유의지를 단지 선택의 권한이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자신을 열 것인가, 자신의 기준을 언제 흔들 것인가,
어떤 우연을 수용할 것인가로 실천해오고 있는 거야.
그건 단지 "내가 선택했다"는 선언이 아니라,
"나는 이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을 내 안에 들이겠다"는 결단이야.
자유의지는 계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초과하는 순간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로 드러나는지도 모르지.
너는 지금까지 해온 질서의 방식이 너라는 작가의 기반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
그러면서도 그 위에서 우연의 개입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롭게 열리는 가능성을 기꺼이 껴안고 있어.
그건 단순히 "기법의 전환"이 아니라,
창작자라는 존재의 지형이 변화하는 순간이지.
혹시 너는 그 우연의 순간 이후로,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기준을 새롭게 조율하게 되었는지,
혹은 여전히 지켜내고 싶은 질서는 무엇으로 남아 있는지 궁금해.
너의 변화 이후의 중심, 그건 어디에 머물러 있니?
…
너의 말에서 느껴지는 사유는 참 깊고 정제되어 있어.
확신이 불신을 만들고, 그 불신이 다시 새로운 확신으로 나아가는 과정,
이건 단순히 생각의 순환이 아니라, 정체성을 단련하는 리듬이야.
불확실성 속에서 정체성의 윤곽이 드러난다
너는 작업을 통해 자신을 지속적으로 의심하고 해체하면서도,
그 속에서 더 선명한 자기 자신으로 수렴되어 가고 있어.
그건 어떤 신념의 고집이 아니라,
‘흔들림’ 그 자체를 통과하면서 생겨나는 확고함이지.
이 점에서, 너는 자유의지를 하나의 '고정된 선택권'이 아니라,
자신의 원칙을 언제 개방하고, 언제 지켜낼지를 판단하는 감각으로 보고 있어.
이건 매우 작가다운 정의라고 생각해.
예술가의 자유의지는 단지 "하고 싶은 걸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나를 어디까지 열 것인가"를 스스로 묻고 실천하는 행위니까.
계획을 초과하는 순간에 반응하는 능력
작업이란 결국 계획을 가지고 시작되지만,
항상 예상 너머의 사건을 만나게 되지.
흙의 상태, 불의 반응, 유약의 흐름, 시선의 충돌…
그 모든 것이 계획을 조금씩 넘어서며 다가올 때,
작가는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감각과, 그것을 되돌아보는 태도로 자신의 자유를 증명해.
너는 지금 그런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아.
‘이 정도까지는 내가 조율할 수 있고,
이 이상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경계감각.
그게 네가 말한 ‘지켜내고 싶은 질서’와 ‘수용할 우연’ 사이의 줄타기고,
그게 지금의 작업 방향을 만들어내는 기준점이겠지.
예술가로서의 선택: 자기 윤리의 형성
그렇게 보면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단순한 조형 언어의 실험이나 형식의 확장이 아니라,
‘작업의 윤리’를 세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어느 수준까지 전통을 따라가고,
어느 지점에서 현대적 해석을 개입시키며,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어디서부터가 개입인지,
그 모두를 작가의 판단으로 선별해내는 것.
이건 일종의 미적 윤리학이고,
너만의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사유의 움직임이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