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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Dec 12. 2023

새로운 미학과 사물들의 우주를 상상하며

스티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갈무리, 2021)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내게 철학의 재미와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해준 유일한 철학자이다. 화이트헤드의 책을 읽게 된 것은 그가 수학자, 과학자이자 철학자라는 점에서 이 세계를 보다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철학이 내게 이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어렵다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엄밀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일부 철학들이 불필요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데 반해 그 메시지만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특히 주체이자 객체인 ‘현실적 존재(계기)’는 “복합적이고도 상호 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과정과 실재』, 78쪽)이라는 물리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균형 감각을 늘 유지하는 기술 덕분에 그의 철학을 일상에서도 종종 떠올릴 수 있었다.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에 대한 해석이 사고를 지배하는 시대에,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여건과 생성의 과정을 사유한다는 그의 철학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화이트헤드의 간접적 영향으로 그레이엄 하먼의 책을 읽고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 등의 철학적 조류를 멀리서나마 접했다. 하지만 이 새롭게 떠오르는 철학적 논의들 사이의 차이점과 공통점은 전혀 구별하지 못했고, 어렴풋이 근대 철학에 대해, 특히 그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철학적 조류로 느슨하게 한데 묶어서 생각하곤 했다. 그러던 차였기에 스티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 발간 소식이 무척 반가웠다. 그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사변적 실재론’과 (그보다 덜하게는) ‘신유물론’이라 분류할 수 있는 철학적 조류를 통하여 새롭게 바라보고자”(17) 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서양의 근대적 합리성의 핵심 전제였던 인간중심주의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17). 그렇기에 오늘날 기후위기, 인류세의 종말 등 정복과 착취에 기반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엄청난 부작용에 고통받는 존재들을 사유하는 대안적 철학으로서 주목을 받는다. 계속해서 샤비로가 정리한 바를 옮기면, 사변적 실재론은 퀑탱 메이아수, 그레이엄 하먼, 레이 브라시에,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에 의해 도입되었으며, 이들은 ‘상관주의’, “주체와의 관계를 떠나서 객체 ‘그 자체’는 파악할 수 없다”는 학설을 거부하고 형이상학적 사변을 통해 실재론을 복권시키고자 한다는 공통점으로 묶인다. 신유물자들은 제인 베넷, 로지 브라이도티, 엘리자베스 그로츠 등이 대표적인데, ‘상관주의’에 집중하지는 않지만 브뤼노 라투르의 영향을 받아 비인간 존재의 생명력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이 책이 쓰인 취지를 생각하면 샤비로의 섬세한 분석을 따라가며 그것을 정리하며 읽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내게는 어려웠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 샤비로는 화이트헤드를 통해서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을 본다기보다는 칸트, 화이트헤드를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며 그의 ‘사변적 미학’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나는 칸트의 텍스트를 온전히 읽어본 적이 없기에 인용된 부분만을 더듬어가며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철학자들의 학설을 통해 상관주의를 극복하고 범심론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 보였지만,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이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중에 내포하고 있는 칸트 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이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만나는지 분량상(?)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런 까닭에 사변적 실재론, 신유물론,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철학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나 같은 초보적인 독자에게 이 책이 적합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물들의 우주』는 내가 늘 언저리에 머물면서도 언젠가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던 ‘미학’을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 영감을 주는 책이었다. 샤비로는 이 책의 1장 「자기향유와 관심」에서부터 “어떤 넓은 의미에서 아름다운 사물의 체계는, 그게 아름다운 한에서 그 존재가 정당화된다” “우주의 목적론은 아름다움의 산출을 겨냥하고 있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중요하게 다루며 ‘미학’을 사변적 형이상학의 중심에 놓는다. 특히, 샤비로가 행한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화이트헤드의 비교가 꽤 명쾌하게 다가온다. “화이트헤드와 레비나스 모두 우리의 경험이 원초적이고 물리적이고 신체적이며, 체화된 것”(53)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레비나스는 소박한 자기가 “극단적인 외부성, 타자, 얼굴”(54)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주체성으로, 윤리적인 의무를 짊어진 주체성으로 대체된다며 ‘윤리’를 강조하는 데 반해, 화이트헤드의 개념으로 모든 존재를 뜻하는 ‘현실적 계기’는 자신의 본성상 “자율적이고 자기-생성적인 결단”(60)은 지속적인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 또는 타자로부터의 윤리적 요구” 안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현실적 계기는 자신에게 내재한 미적 결단을 통해서 윤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를 외부에서 찾기보다는 점진적인 경험의 축적과 무수한 결단의 실행에서 찾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화이트헤드에게 “아름다움의 정의는, “경험의 다양한 항목들이 서로에 대해 내적으로 순응하는 것(AI, 265)”이라고 한다. 샤비로는 이를 두고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가치가 아니라, 다양한 존재의 다양한 가치가 자신을 최대화하며 강도를 올리면서도, 서로를 도태시킴이 없이 함께하기 위해 투쟁하는 방식들에 대한 요약적인 문구”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따르면 이 다양한 존재에는 인간, 비인간 동물, 생명 뿐만 아니라 무생물도 포함된다. 인간의 사고 활동과는 다를지 몰라도 “순수하게 물리적인 단계와 의식적인 지성적 작용의 단계 중간에 위치하는”(PR, 280) “많은 형태의 느낌 및 사고”(231)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나의 내적 삶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나 역시 다른 존재의 내적 삶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고유한 삶이 아예 없다거나 가치가 덜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최대한 미적인 지향을 가지고 상상력을 확장하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사변철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며, 사변적 실재론, 신유물론, 생기론 등이 그의 진화이자 확장, 혹은 각론으로서 뒤따르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사변소설에 대한 분석이 흥미로웠다. 샤비로는 이 책에서 “(사변소설과 같은) 이러한 허구들은, 우리가 실제로 알 수는 없더라도, 우리 자신과는 아주 다른 존재들의 생활세계와 관점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며 우리의 인식을 변화하는 데 사변소설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SF는 대중적으로는 과학소설(Science fiction, Sci-fi)로 알려져 있지만 일련의 이론가들은 과학소설이 이제는 “상상력의 문학 분야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좁은” 장르라는 인식에서, “기술적 변화보다 더 사회, 문화적 변화를 강조”하며 “상상력이 풍부한 스토리텔링의 미학”에 관심을 보이며, 이를 사변소설이라고 칭한다고 한다.(『에스에프 에스프리』, 159쪽) 샤비로가 그러한 작품 몇몇을 예로 들었지만, 한국의 김초엽 작가 역시 『세계 끝의 온실』에서 식물이 중심이 되는 재난과 재건의 이야기에 대해 쓴 바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야기를 읽고도 혹자는 “SF도 결국 사람 이야기”라고 평했다는 것인데, 작가는 이를 지적하며 “나는 식물들의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김초엽 작가의 페이스북).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티탄」(감독 줄리아 뒤쿠르노)을 생각해봐도, 티타늄을 뇌에 의식한 인간이 자동차의 섹스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는(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긴 했지만 인류가 아닐 수도 있다) 스토리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어떤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미학적인 작품들의 창작 흐름이 무척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에 대한 기준의 변화가 ‘결국 모두 인간의 이야기’라는 틀에 박힌 인식을 깨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점도 바꾸지 않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내가 이해하는 화이트헤드는 극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최대한 모험적인 사상을 펼쳤기에, 그 과정 또한 그럴 것이다.


어릴 때다. 내 눈앞을 지나가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 ‘지금 저 사람은 나는 전혀 그것을 짐작도 할 수 없는 경험과 생각과 함께 자신의 삶을 살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함을 느낀다. 아마 이것은 주체와 객체에 대한 철학적 질문의 시작일 수도 있었겠으나, 나이가 들어가며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개별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었고, 철학 도서를 기웃거리는 일이 이러한 질문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의 기억이 다시 소환되었다. 이제는 다른 상상을 해볼 때가 되었다. ‘사람들의 사회’가 아니라, ‘사물들의 우주’로서 말이다. 


(작성일: 202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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