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들 Nov 02. 2015

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의 공간

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의 공간, 수술실


  “kelly(켈리), kelly(켈리), metzembaum(멧젬바움, 조직을 자르는 가위), 0번 tie(타이)”

  신입 간호사 때 약 3개월 동안 산부인과 방에서 처음 트레이닝을 받고, 이제는 혈관 외과 방에서 한창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 어느 날. 필요한 소모품을 가지러 약 반년 만에 우연히 들른 산부인과 수술방. 

  지금은 TAH(단순 자궁 적출술)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고 환자의 ‘뚜, 뚜, 뚜’하는 심장소리와 함께 고요한 수술방을 울리는 집도의의 또랑또랑한 소리. 



  매일 집도의가 말하는 기구 이름을 듣고 수술하는 나이지만 그 순간 나는 가슴이 움찔하면서 금방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만약 그 때 누군가가 내 뒤에서 내 뒷모습을 보았더라면 “왜 갑자기 경기하고 그래?, 무슨 일 있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나는 온 몸이 소스라치는 놀라움을 느꼈던 것이다.


  고교시절 낮은 영어 듣기점수로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영어 선생님은 같은 영어 테이프를 꾸준히 반복해서 들으면 그것이 귀에 익혀져 자연스럽게 들린다고 조언해 주셨다. 이와 같이 3개월 동안 산부인과 방에서 똑같은 수술을 반복하고 똑같은 집도의의 말을 들었던 것은 마치 영어 듣기의 반복효과처럼 그 수술이 이미 나에게 체화되어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옷깃을 스치는 듯 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직접 수술 field를 보지 않았지만 그 수술 장면이 머릿속으로 보이면서 동시에 수술이 들리는 것이었다.

  정말 너무나 놀랍고도 신기한 일이였다. 단지 물건을 가지러 잠깐 방에 들른 그 짧은 순간에 내가 집도의가 말하는 기구 이름만 듣고서 수술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다니. 

  그리고 그때 비로소 신입 간호사로서 트레이닝을 받을 때 가졌던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프리셉터 선생님은 나를 한창 트레이닝 시킬 때 늘 수술대에서 멀리 떨어져서 수술을 관찰하셨다. 그런데도 다음에 어떤 기구가 나갈지 나에게 정확하게 알려 주셨다. 그때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라는 궁금증을 가졌었다.


  입사 1년도 채 되지 않은 고작 경력 9개월 차에 불과했던 나에게 수술하는 장면이 머릿속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는 경험은 마치 종교에서 흔히 기이한 일로 취급 받는 성령 체험이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트레이닝을 받을 그 당시에는 내가 하고 있는 scrub 간호사의 일을 단순히 집도의 에게 수술기구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집도의가 수술기구를 말하면 scrub은 준비된 수술기구를 찾아서 집도의의 손에 건네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비로소 scrub 간호사는 단순히 기구를 전달해 주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scrub 간호사에게는 집도의의 말소리를 잘 듣는 귀, 수술 field를 잘 볼 줄 아는 예리한 눈, 그리고 기구를 전달하는 재빠른 손이 필요했다. 그리고 집도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수술하기 때문에 수술에 있어 아주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레디, 액션” 

  자정이 지난 늦은 밤. 많은 사람들이 병원 주변의 벤치 앞에 모여서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무슨 일이지?”라는 호기심을 가지고 그 근처로 다가가 보았다. 가보니 한창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가 촬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벤치에 앉아 서로 다정히 인사를 건네는 장면을 연기하는데 열중이었다.


  이렇게 TV로만 보았던 연예인을 실제로 보고 또한 드라마가 길거리에서 촬영 되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여서 한밤중에 횡재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촬영하는 것을 보기 위해 여기에 모여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촬영을 계속 지켜보면서 정작 촬영을 보러 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 단지 서너 명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메라만 주시하면서 배우에게 명령을 내리는 감독, 그 주위에서 다른 카메라를 보면서 무엇인가를 모니터링 하고 있는 사람, 긴 마이크를 들고 서 있는 사람, 빛을 반사시키는 커다란 은색 판을 들고서 두 배우들을 향해 비추고 있는 사람, 배우들의 메이크업과 의상을 주시하는 사람……. 그리고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자의 위치에서 그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TV속 드라마 장면으로는 20초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이 짧은 분량을 위해서 이 늦은 시각까지 수십 명의 사람들이 매달리고 헌신하는 모습은 이 드라마의 시청자로서 가히 놀라울 정도로 내 마음 속에 커다란 감동을 일구어 주었다. 그리고 드라마 촬영현장은 수술실과 매우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술실이라는 공간을 촬영장소로, 정해진 procedure의 각본을 가지고, 환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드라마.

  수술은 감독인 집도의의 총 지휘 아래 마취과와 제휴하여 수술 field를 주요 촬영 장면으로 삼는다. 최대한 잘 보이는 촬영 장면을 확보하기 위해 스텝 역할을 하는 여러 보조의사 들이 동원된다. 또한 촬영에 필요한 카메라, 마이크와 같은 여러 장비와 기구들은 수술팀 간호사들이 적재적소에 준비한다. 

  3차 타임아웃을 기점으로 촬영은 “액션”되고 반복적인 연습과 훈련으로 무장된 우리는 NG 없는 무결점의 수술을 하기 위해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며 촬영을 진행한다. 그리고 각본대로 다 완성되었을 때 우리는 “다 이루었다”라고 속으로 외치며 기쁨과 환희로 촬영을 마무리 한다.


  위와 같이 드라마 촬영과 수술은 마치 한 수정란에서 두 가지로 분열된 일란성 쌍둥이처럼 그 절차와 모양새가 매우 흡사해 보인다. 하지만 도드라지는 몇 가지의 구별되는 점이 있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 촬영과 수술은 한 어머니가 두 개의 수정란을 가지고 잉태한 이란성 쌍둥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첫째, 드라마에서 감독의 말은 여러 이해관계의 영향 등 수 많은 변수들로 인해 쉽게 변경될 수 있어 절대적인 요소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수술에서의 집도의의 말은 절대적이다. 즉, 집도의의 말은 곧 신(God)의 말이다. 그래서 집도의가 말한 것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만약, 집도의가 kelly(켈리)를 달라고 했는데 scrub이 잘못 들어서 다른 기구인 mosquito(모스키토)를 줬을 경우 이는 절대적인 명령을 어긴 결과로 유순한 성격을 가진 분이 아닌 이상 칼 보다 더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scrub을 째려보며 “뭐야” 라고 불같은 호통을 치게 된다.

  처음 신규간호사로서 이런 불호령을 들었을 땐 먼저 심장 박동이 급격하게 빨라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두 손은 ‘덜덜덜’떨리고 눈에는 내가 의도 하지 않은 액체 한 두 방울이 맺혔었지만 이제는 집도의를 향해 ‘씨-익’ 하고 한 번 웃고 난 후 다시 정확한 기구를 건넨다. 절대적인 명령 앞에서 나 스스로의 생존전략을 터득한 것이다. 

  처음 신규간호사로 트레이닝 받을 때는 업무를 익히기에 정신이 없어서 느끼지 못했었는데 참 신기한 광경이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구나 하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집도의가 kelly(켈리)하고 말하면 0.1초도 되지 않는 정말 찰나의 순간에 집도의의 손에 kelly(켈리)가 쥐어지고 곧바로 metzem(멧젬, 조직을 자르는 가위)을 말하면 방금 kelly(켈리)를 쥐어준 집도의의 손에는 어느새 metzem(멧젬)이 쥐어져 있었다.

  이는 마치 소원을 말하면 무조건 바로 들어주는 요술램프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처럼 동화 속에서만 일어날 것 같은 광경이 바로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술하는 도중 몇 번 가려진 마스크 사이로 혼자 어이가 없는 미소로 ‘키득키득’하면서 웃었던 적도 있다.

 

 둘째, 드라마의 결말은 작가가 처음부터 기획의도로써 의도한 결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제 3자인 시청자의 바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수술의 결말은 주인공, 집도의, 그 외 모든 의료진들이 같은 결말을 생각한다. 즉, 모두가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람은 변하지 않으며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람은 ‘좋은 변화로의 바람’이다. 건강한 상태로의 변화, 치유의 변화, 회복으로의 변화.

  그리고 수술실에는 또 하나의 바람이 더 있다. 바로 ‘환자 안전을 위한 바람’이다.

  드라마 촬영 도중에도 순조로운 촬영을 방해하는 예기치 못한 다양한 상황들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배우가 갑작스런 사고로 부상을 입거나, 배우의 돌발행동으로 촬영현장에 나타나지 않는 등의 경우이다. 마찬가지로 수술실에서도 환자 안전을 위협하는 여러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발생하여 우리를 염려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예로 수술도중 집도의가 조직 봉합을 하던 도중 혹은 scrub에게 사용한 needle을 건네주던 중 needle이 튕겨나가 needle이 없어지는 경우이다. 이는 환자의 체강 안에 needle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수술방 전체를 샅샅이 뒤져가며 needle을 찾기 위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 상황에서 집도의를 비롯한 수술팀 전원의 바람은 오직 하나. 바로 없어진 needle을 찾는 것이다. 그 바람으로 생각과 마음이 하나가 된 우리는 더 나아가 ‘없어진 needle은 꼭 찾을 것이다’라는 바람의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 수술방 어딘가에 그 자취를 감추고 있을지 모르는 그 작은 needle은 누군가의 “찾았다”라고 외치는 기쁨의 절규로 그 바람을 반드시 이룬다. 


  셋째, 드라마는 주인공이 장면을 좀 더 리얼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연기연습과 같은 부단한 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수술의 주인공인 환자는 아무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수술대에 누워 있기만 하면 된다. 단, 조건이 있다. 자신의 생각과 노력을 모두 배제 한 채 최대한 편안하게 누워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에게 일어날 좋은 변화를 믿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가 수술실에 들어와 상기된 얼굴로 매우 긴장하고 있을 때 마취과 의사들은 꼭 이런 말을 한다.

“그냥 주무시면 되요. 한번 자고 일어나면 다 되어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엄청 무심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주인공인 환자는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환자와 우리의 바람대로 좋은 변화가 일어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드라마에는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만큼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주인공에 대한 선(善)과 악(惡)의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수술실에서는 주인공을 향한 질타, 미움, 비판과 같은 악(惡)한 감정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주인공을 향한 선(善)한 감정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 선(善)은 주인공에게 우리 모두의 바람인 좋은 변화를 일으킨다. 


  이제부터 이 좋은 변화를 나는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 

  기적은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종교적으로는 신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 이라고 정의된다.



  오로지 사람의 말을 귀로 들었을 뿐, 눈으로 아무 증거 보지 못했지만 그 말을 형상 있는 실재로 내 눈 앞에서 본 것은 ‘환상’이 아니라 ‘기적’이었다.  


  나에게 있는 듣는 귀, 보는 눈 그리고 행하는 손이 누군가에게 좋은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상식’이 아니라 ‘기적’이었다.


            입술의 말이 살아서 운동력을 가지고 모든 것을 운행 하는 곳.

            같은 바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언제나 좋은 꿈만 꾸는 곳.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존재 하는 곳. 

            악이 존재하지 않는 곳.                                  

            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의 공간.


  이곳이 어딘지 알고, 이곳에 감히 발을 디딜 수 있는 것.


  이것은 내 삶의 ‘행운’이 아니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삶의 ‘기적’이다.

작가의 이전글 “빛나야, 너는 별처럼 빛날 꺼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