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처럼, 발리에도 건기와 우기가 있다. 일반적으로 발리의 건기는 4월~10월, 우기는 11월~3월로 알려져 있다. 매년 건기나 우기 시즌이 앞당겨지기도, 뒤로 밀리기도 하기 때문에 대략적이라는 것만 알아두면 될 듯하다. 우리는 2월 말부터 발리 여행을 시작했는데 발리 공항에 도착해서 숙소까지 이동하면서부터 비가 내려서 괜히 걱정을 하기도 했다. 여행 내내 비가 퍼붓는 건 아닌지 말이다.
발리에 머물면서 정말 딱 우기의 막바지 -> 우기와 건기의 중간 -> 건기의 본격적인 시작까지를 맛보고 온 것 같은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극히 개인적 취향이지만) 우기가 끝날 때쯤 여행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일단 발리의 우기는 한국의 장마철과는 그 양상이 사뭇 다르다. 한국에서는 장마철이면 정말 아침부터 흐려서 그 기세가 밤까지 이어지지만 발리에서는 2-3시간 동안 내려야 할 비의 총량이 정해져 있기라도 한 듯 미친 듯이 쏟아붓고 나면, 방금 전까지 뭔 일 있었냐는 듯이 맑고 쨍쨍한 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여행 중 비가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행복한 여행에 흠집이 나는 것만 같아 자꾸만 날씨 어플을 들여다보곤 했다.
우기에 대한 나의 마뜩찮은 마음은 발리 도착 이틀째 뜨라가와자 강에 래프팅을 하러 간 날부터 조금씩 없어졌다. 장장 3시간이 넘게 보트로 강을 타고 내려가는 긴 여정이었는데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문득 문득 정말 머리 위를 가려주는 것 하나 없는 이 강을 내려가는데 지금이 발리의 우기라 날이 흐려서 덥지는 않아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중간 중간 몸에 묻었던 물기가 마르면 춥게 느껴지기까지 했는데, 건기에 오면 래프팅의 즐거움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까지 들었다. 래프팅 자체도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액티비티였는데 숨 쉬기 어려운 더위까지 있었다면 즐거움 보다는 당장의 더위에 온 신경이 쏠리고 말았을 것 같다.
이후에도 한 몇일 간 우리는 우산이나 우비를 챙겨다니며 간헐적인 비를 대비하곤 했다. 무겁지는 않지만 챙겨야 할 짐이 늘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1% 정도의 스트레스가 늘어났는데, 그만큼 좋은 순간들도 있었다. 비가 오면 조금이라도 내가 비를 덜 맞게 하려고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여준다거나, 우산이 없을 땐 얼굴이라도 비에 맞지 않게 손으로 가려준다거나 하는, 겉으로 드러난 애정어린 행동을 더 많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원래 나는 비 오는 날을 딱히 싫어하는 편도 아니다. 한국에서도 비가 내리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차분해지고, 현관문을 나설 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비 냄새도 좋고. 비가 올 때 운전하며 달리는 도로도 좋고, 운전할 때 비 때문에 멀리까지 시야 확보가 되지 않는 것도 포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가끔 비를 맞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를 맞고 나면 나의 상황이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마음도 그렇고. 다만 여행지에서는 내가 한정된 시간 안에 최적의 순간들을 보려고 하는 측면이 많기 때문에 비 오는 날을 선호하지 않을 뿐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2배가 된다면 같은 장소를 비 오는 날 하루,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 하루 방문하고 싶다.
그런데 확실히 발리라는 나라에서는 '우기'와 '건기'로 계절을 구분할 만큼 그 양상이 확연히 다르구나 느낄 수 있었던 것이 발리 도착 후 1주일 정도가 지나자, 관광객인 우리가 체감할 만큼 햇빛의 강렬함이 세졌고 낮에 비가 오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또 몇일이 지나자 아예 밤 시간대에 내리는 비조차 멈췄다. 그리고 항상 이런 무더위만 있었던가?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렬한 햇빛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내리쬐었고 우리는 돌아다니는 시간대와 교통 수단을 바꿔야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10분 넘는 거리만 왔다 갔다 해도 살갗이 다 타버릴 것처럼 너무 덥고 지쳐서 무조건 택시를 부르게 되었고 최대한 태양을 피하기 위해 낮 시간에는 호텔 방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우기가 왔으면 좋겠어"라는 소리를 해대게 되었다.
발리에서 우기만 되면 정말 무릎까지 물이 찰 정도로 무섭게 비가 퍼붓기 때문에 발리에서는 왕족들이 비가 끝나기를 바라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중요한 마을, 지역의 행사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요즘에도 계속 이런 행사들은 마을 별로 지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비가 안 와서 가뭄을 끝내기 위한 목적으로 지내는 기우제가 있는데, 발리에서는 그와 반대로 비를 제발 멈춰주기를 바라는 제사를 지낸다는 게 비슷하게 느껴졌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즉 날씨를 주관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지만 사람들의 삶에 너무나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에 왕권, 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특히 아직도 발리에서는 일부 여행업 종사자들을 제외하고는 농업의 비중이 절대 적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그 신앙심의 크기와 상관없이 형태는 계속 유지되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한창 더운 한여름 8월 중순에 태어난 나는 그래서인지 물도 좋아하고 수영도 좋아하고 피부도 정말 까맣고 여름도 좋아하고 여름에 나는 과일도 좋아한다. 무더운 날씨는 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운 나라를 좋아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 중에서는 따로 챕터를 빼서 다룰 만큼 나에게 중요한 발리의 식물, 그 중에서도 꽃이 있다. 물이 넘치고 햇살이 넘치는 곳이면 식물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넘치게 자라는 법이다.
날씨 얘기를 하루에 1-2번은 남편이랑 하던 중, 남편이 핸드폰 메모장에 뭔가를 꺼내서 적는 모습을 발견했다. 얼른 줘보라고 억지로 뺏어서 읽어보니 남편도 나처럼 발리의 우기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었다. 쭉 훑고 나서 나는 바로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얘가 역시 그럼 그렇지', '진짜 특이해', '진짜 나랑 다르네', '근데 진짜 이걸 적다니, 귀엽다' 같은 생각들이 마구 마구 한 번에 들어서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남편도 어느 정도 내 머릿속 생각들을 알았을테지만 마지막 '귀엽다' 부분을 듣고 싶어서인지 왜냐고, 왜 웃냐고 자꾸만 캐물었다. 왜 웃었는지는 아마 다들 남편이 쓴 글을 보면 바로 알 수밖에 없을 거다.
기회가 되면 남편이 메모장에 쓴 글을 훔쳐와서 여기에 넣고 싶은데, 무슨 기상캐스터가 슈퍼컴퓨터로 날씨 분석한 것처럼 써놨다. 몇시에 비가 내렸고 많이 퍼부었는데 언제 날씨가 갰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같은 여행지에서 똑같이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를 함께 떨어져 봤자 2m도 안되는 거리에서 함께 겪었는데 그에 대해 뭔가를 느꼈다는 거 빼고 어떻게 느꼈는지,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이렇게나 다르다는 게 재밌다. 매 순간 남편이 나와 정말 다른 성향과 태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럴 때는 정말 텍스트로 '최민철과 김승원은 다름'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가 찰떡으로 잘 지낼 수 있는 이유는 그 다름을 재밌고 귀엽게 느끼기 때문일 거다. 우리와 비슷한 경우의 커플들이 그 다름에 못 이겨서, 그 다름에 지쳐서 서로를 비난하고 헤어지는 걸 수없이 봐 왔기 때문이다.
발리의 우기에 대해서 날씨 보도라도 할 건지, AI처럼 데이터 수집하는 민철과, '우기' 하나로 여행과 우리 커플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나는 너무나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