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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의 가족

나의 발리 이름은 Wayan

by 클라우드나인

발리에서 여러 종류의 숙소에 묵었지만, 단연코 제일 기억에 남는 숙소는 우붓의 풀장이 딸린 독채 숙소였다. 우붓의 독채 숙소를 운영하는 Wayan은 엄마, 아빠, 동생을 데리러 공항으로 픽업을 나가기도 했다. 도착하기 전부터도 친절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만나니까 정말 환하게 웃으면서 간혹 있는 우리의 요청들에 진심으로 응했다. 그래서 그런지 Wayan이라는 이름이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는데,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발리의 다른 투어 상품들을 살펴보다가 Wayan이라는 이름을 또 발견해서 반가웠다. 우연이겠지 싶었는데, 발리와 관련해서 은근 Wayan이라는 이름이 많이 보이는 게 신기해서 '이게 유행하는 이름인가?', '아니면 사람을 부르는 호칭인데 내가 이름으로 착각한 걸까?' 싶을 정도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발리 사람들은 계급과 출생 순서에 따라 이름이 체계적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계급도 요즘 많이 쓰는지 모르겠는데, 출생 순셔별로 이름이 정해져 있다는 건 나름 충격이었다. 첫째는 Wayan(와얀) 또는 Putu(뿌뚜), 둘째는 Made(마데) 또는 Kadek(까덱), 셋째는 Nyoman(뇨만) 또는 Komang(꼬망), 넷째는 Ketut(끄뚯)을 쓴다. 다섯째는 어떻게 하냐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순서를 반복한다. 이 설명을 듣고 나서야 왜 내가 만나는 에어비앤비 주인들과 투어 가이드, 그랩/우버 기사들의 이름이 대부분 와얀, 뿌뚜, 까덱 이었는지 알았다. 이러한 이름 체계는 단순히 부모들에게 아이들 이름 고민할 거리를 덜어주려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발리의 순환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의미라고 한다. 물론 출생 순서별로 부여 받는 이름 말고도 사회적 지위와 가문, 개인 고유의 이름 등을 포함해 한 사람당 최대 6개의 이름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나도 발리에서 태어났으면 와얀 아니면 뿌뚜였을 텐데, 그 환하게 웃던 에어비앤비 주인 아저씨랑 같은 이름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 동생은 마데 아니면 까덱이었을 거고 아빠는 끄뚯, 엄마는 뇨만 또는 꼬망으로 불렸을 거다.


발리에서 에어비앤비 숙소를 이용하다 보면 현대식으로 지은 아파트먼트나 독채 형식도 있지만, 전통가옥(?) 형태의 집에 묵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맨 바깥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족들이 지내는 방들이 쭉 있고 보통 손님방은 맨 안쪽에 위치한다. 용도에 따라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게 한국의 전통 집들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을 삶에서 중요시하며 일상이 가족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도 한국과 발리는 비슷하다. 발리에서는 가족들과 주방 등 공용공간에서 함께 요리,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가족 내에서 아이들에게 발리 전통 문화를 경험하게 한다. 나도 어렸을 적을 생각해보면 개인주의를 발달시키기보다는 가족주의를 중시하는 문화 속에 살아온 것 같다. 일년에 몇 번씩 있는 제사, 가족 단위로 이루어지는 여행, 이사를 비롯해 결혼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에서 끊임없이 실제 존재하는 '가족'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했던 것 같다. 가끔은 그런 가족문화가 답답하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어쩌나 저쩌나 그런 문화 안에서 살아온 나는 요즘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개인주의'적인 측면이 덜 발달했다.


발리에서는 유난히 '우리 집처럼 편안하게 있어'라는 말이 그들의 진심으로 느껴진다. 그들의 전통 가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잠시 머물다 떠날 손님이지만) 머무는 동안은 그들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진다. 의례적으로, 돈을 받은 만큼 서비스를 하기보다 나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우붓 숙소에서 묵을 때 우리 가족은 내 남편의 깜짝 생일 파티를 몰래 준비했다. 이때 몰래 준비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Wayan이었다. Wayan은 생장미 꽃잎을 한땀 한땀 따서 바닥에 레드카펫처럼 깔고 발리식으로 코스 요리를 마련했다. 내가 미리 부탁한 초코 케이크 위에 레터링은 조금 눌리긴 했지만, 투박하고 먹음직스러운 케잌 위에서 생일 축하를 외치고 있었다. 거의 뭐 프로포즈 하는 것처럼 깔려 있는 레드카펫에 남편은 약간 당황했고 쑥스러워했지만 행복해했다. Wayan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우리 가족 옆에 계속 머무르면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각도, 새로운 포즈로 가족 사진을 담아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중에는 Wayan의 딸까지 동원되어 우리의 생일파티 진행을 도왔다. Wayan의 헌신적인 도움과 배려를 받았을 때, 자신의 딸을 소개시켜줬을 때, Wayan의 수고에 감사하며 작은 편지와 선물을 전달했을 때, 나는 Wayan의 가족과 가까워지는 걸 느꼈다.


내가 Wayan의 숙소를 예약하기 전까지 서로의 존재도 몰랐던 한국의 가족과 발리의 가족은 이렇게 만나게 됐다. 두 가족은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겠지만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Wayan과 나 둘 다 첫째라는 것, 가족이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 가족 중심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이런 삶의 결이 비슷했기 때문에 언어가 완벽히 통하지 않아도 우붓에 머무르는 동안 Wayan의 집이 유독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다음 발리에서 만나게 될 또 다른 Wayan은 누구일지 벌써부터 중요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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