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순환하는 카르마(Karma)
발리에서의 시간은 서울에서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간다. 똑같이 24시간을 부여받았지만 시간이 흘러가는 감각도, 시간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다르다. 발리에서는 "잠시 후에" 라는 말이 5분이 될지, 30분, 1시간이 될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러한 느슨한 시간에 대한 개념은 섬 나라 여러 곳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발리에서의 여유로운 시간 관념은 이러한 단순한 지리적 차이 때문이 아닌,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보통 직선적인 개념으로 파악한다. 아침 7~8시 쯤에 시작해 밤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밤 12시가 지나면 잠들어서 오전을 향해 다시 준비하는 시간으로 말이다. 발리 힌두교에서는 시간을 '원'의 개념으로 파악한다고 한다. 이들에게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적 차원이 아니라 계속해서 순환하는 둥근 원의 개념이다. 발리 사람들이 쓰는 달력 체계인 '왕쿠'는 이러한 순환적 시간관을 잘 보여준다. 왕쿠는 1년이 210일로 구성되며 요일이 현대 달력처럼 오른쪽으로 배치된 것이 아니라 왼쪽에 세로로 배치되어 있다. 또 힌두교 관련 행사일은 달력에 동그라미로 표현되는데, 발리 사람들은 보통 이 달력을 통해 종교적인 행사나 의례를 확인한다고 한다. 이 왕쿠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시간과 날짜가 아니라, 의례와 축제의 순환적 리듬이다. 이렇게 시간을 다르게 파악하면 삶에서 어떤 것들이 달라질까.
현대인들은 시간 자체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 내가 10분, 20분 단위로 쪼개진 이 짧은 자투리 시간까지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했는지, 시간을 돈으로 환산해 내가 1시간 당 얼마를 벌 수 있는지 등으로 말이다. 마치 이 관점은 내가 시간을 통제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지만, 사실은 시간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내 주변인들만 봐도 포모도로 타이며나 각종 생산성 앱 등의 도구를 통해 시간 당 할 수 있는 일의 양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한다. 발리도 물론 현대화되어 우리가 쓰는 달력을 쓰지만 여전히 왕쿠를 사용할 때는 그들의 시간 사용은 달라진다. 의례와 행사 중심으로 시간이 흘러가며 그 행사, 의례를 얼마나 잘 준비했고 잘 끝마쳤는지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자신의 시간을 재편하게 된다. 특히 매일 매일 아침, 점심, 저녁마다 정성껏 올리는 '차낭 사리'는 발리인들에게 시간의 흐름, 연속성을 일꺠워주는 중요한 지표다. 우리가 아침, 점심, 저녁마다 식사를 하는 것처럼 이들은 차낭 사리를 함께 올리면서 하루 내에서도 시간을 쪼개는 기본 단위가 정해진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시간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일 단위'로 바라보면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는 생각 외로 달라질 수 있다. 시간이 기준이 되면, 내가 얼마나 이 시간을 효용적 가치를 극대화 시키는 방향으로 사용했는지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나 일이 기준이 되면, 내가 얼마나 이 일을 완성도 있게, 내가 만족할 만큼 달성했는지 그 일 자체에 대해 집중한다. 왕쿠니, 순환적 시간이라던지 이런 개념을 발리에서 지낼 때는 알지 못했지만 그들의 시간에 대한 문화가 나에게도 침습했는지 발리에서 지낼 때 나는 특히 더 여유로웠다. 물론 정해진 시간에 미팅을 하고 수업을 하기도 했지만, 내가 시간을 조금 덜 맞추고, 덜 효율적으로 사용해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내가 발리인들처럼 여기서 지내야 하는 의례는 없지만, 나만의 의례를 잘 보냈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편안하게 나름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서 스스로를 통제하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자책을 하기 보다는 테스크(task) 자체에 집중했고, 심적으로 훨씬 더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경쟁이 그 어디보다 치열한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현대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나도 모르게 시간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 내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곧 돈과 직결되고, 시간에 대해 완벽하게 통제하는 정도가 곧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단순히 관리, 통제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연의 리듬, 순환을 안내해주는 가이드라인으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도 훨씬 관대해질 수 있다. 시간 자체에 집착하기보다 시간 안에서 함께 흘러가는 그 내용물에 집중해 질적으로 훨씬 다채롭고 풍부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