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여신은 내 편
2년 전에는 스미냑에서 출발해 바투르 산으로 향하는 일정이라 새벽 2시도 채 되기 전에 숙소를 나섰는데, 이번에는 우붓에서 출발해 그나마 3시에 택시를 탈 수 있었다. 새벽에 나서는 투어들이 꽤 있어서 그런지 새벽 3시인데도 숙소 리셉션에서는 조식을 싸주겠다고 했다. 양손 가득 정성껏 싸준 과일, 계란, 빵과 함께 20kg가 넘는 캐리어를 하얀 조약돌이 깔린 숙소 입구까지 끙끙대며 옮겼다.
남편과는 무섭게 달리는 차 안에서 정신없이 헤드뱅잉하며 잤었는데,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택시 안에서는 잠이 오지 않았다. '발리 사람들 특: 운전을 매우 잘함'에 걸맞게 오늘 우리를 바투르 산 언저리까지 데려다 주는 기사도 아주 스무스하게 차를 운전해 속으로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가끔 도로에 확 뛰어드는 들개들을 헤드라이트가 비출 때면 기사도, 나도 놀랐지만 다행히 사고 없이 바투르 산으로 향했다.
중간 정도 왔을 때 갑자기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투두둑 떨어지는데, 느낌이 쎄했다. 누가 불길한 예감은 항상 맞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김없이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차를 세차게 때려대기 시작했다. 차 뒷자석에 앉은 엄마, 아빠는 예상치 못한 이 세찬 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셋 다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각자의 걱정과 실망을 느끼고 있었을 거다.
바투르 산 지프투어를 오기 전에 엄마 아빠에게 몇 번이나 까만 밤하늘에 쏟아질 듯한 별들과 지프차들 사이로 떠오르던 일출을 얘기하면서 기대감을 증폭시켰었는데, 지금은 아름다운 풍경을 못 보는 건 고사하고 이 비를 맞으면서 지프를 타고 산에 올라가는 게 가능은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그래, 비야. 너가 원하는 만큼 쏟아붓고 내려도 좋아. 대신 우리가 지프차를 탈 때는 제발 멈춰줘'라고.
비는 우리가 거의 도착할 때쯤에도 멈추지 않았고 내 속은 타들어갔다. 캐리어 안에 있는 우비를 꺼내야 하나, 우비를 입는다 해도 산에 올라갈 수 있는 건가, 올라가도 아무것도 안 보일텐데 어쩌지 하는 생각들이 두더지 잡기 게임하듯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그런데 정말 누가 우리를 놀래켜주려고 짜기라도 한 것처럼 택시를 주차장에 대고 지프차로 옮겨 타려는 바로 그 때 비는 멈췄다. 우기에서 건기로 넘어가는 시즌이라 언제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였지만 우리가 바투르 산에 올라가는 그 때, 비는 고맙게도 딱 멈춰줬다. 내가 속으로 간절하게 되뇌었던 말이 실제로 비에게 가서 닿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앞 좌석에, 엄마랑 나는 지붕이 없이 밤하늘을 향해 뚫려 있는 뒷좌석에 앉았다. 비가 그친 직후라 엉덩이가 살짝 젖었지만 비가 그친 게 어디냐, 고맙다는 생각을 하며 바투르 산 중턱을 향해 출발했다. 별은 당연히 안 보이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90도로 고개를 뒤로 젖혔을 때, 몇 개의 별이 눈에 들어왔다. 비가 와서 먹구름이 껴 있는데도 발리가 워낙 자연환경이 깨끗하고 불빛이 없는 어두운 상태라 그런지 하나 둘씩 별들이 시야에 더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금 더 중턱에 가까워지자 자동차의 라이트 말고는 빛이 없이 어두워졌고, 내가 아는 별자리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내 머리 위부터 어깨까지 밤하늘 곳곳에 별들이 각기 다른 크기의 빛을 내고 있었다. 엄마도 나와 함께 90도로 고개를 꺾어 별을 보면서 '내가 어렸을 땐 저렇게 쏟아질듯이 별이 많았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도 저렇게 별이 가득한 하늘을 서울에서 보지 못했다. 수많은 별들이 콕콕 박혀 있는 이 상황이 너무 황홀해 목이 아픈지도 모르고 중턱에 도착할 때까지 내 시선은 하늘에 꽃혀 있었다. 그 순간 앞 좌석에 앉은 아빠가 이 별들을 함께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아쉬웠다. 안전 지향형인 아빠가 지프 뒷자석에 타는 걸 힘들어할까봐 앞좌석을 권했던 내가 얄미워지는 순간이었다. 거의 몽골인처럼 시력 2.0인 아빠는 나보다도 선명하게 저 별들을 눈에 담았을텐데 말이다.
2년 전에는 꼴찌로 와서 지프차들의 꼬리 부분에 자리 했는데, 오늘은 우리가 한 5등 안에 든 것 같다. 지프차 기사는 차를 세워두고 미끄러지지 않게 주변의 돌들로 바퀴를 꼼꼼히 고정했다. 그리고 지프투어로 바투르 산에 올라오는 모든 손님들을 독점하는 유일한 가게에 빠릿빠릿하게 뛰어 가 우리가 앉을 의자를 선점해왔다. 시계를 보면서 앞으로 해 뜨기 까지 2시간 정도가 남았구나 생각하던 때에 가이드가 '사진 먼저 찍을래, 아침 먼저 먹을래'라고 물어왔고 우리는 당연히 '사진!!'이라고 답했다.
가이드는 자기가 앉을 앉은뱅이 의자도 야무지게 챙겨와서는 구도를 잡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찍었는지 포즈 좀 찾아보고 올 걸, 뻔한 포즈 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내가 첫 타자로 지프 위에 올라갔다. 지프 천장 위에 서기도 했다가 앞 보닛에 걸터 앉았다가 하늘도 가리켜보고 뒤로 돌아도 보고 하면서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포즈를 취했다. 한창 사진을 찍고 있다가 포즈를 고민하며 멈칫하던 순간 가이드는 주머니에서 뭘 꺼내더니 내 손에 쥐어줬다. 수직으로 쭉 뻗어나가는 흰색 빛의 랜턴이었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까 이 랜턴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사진을 찍으니까 별들이 함께 찍혀 진짜 어디 캠핑이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 왕창 들었다. 2년 밖에 안 지났는데 가이드들의 사진 꿀팁이 진화했 가이드가 한 10번 정도 '다음 포즈~'라고 한국말로 말했을 때 도저히 새로운 포즈를 생각해 낼 수 없었던 나는 엄마에게 바톤을 넘겼다.
사진 찍으면서 의도치 않게 분위기가 더 좋아졌던 건 가이드의 한국말 덕분이었다. 가이드는 정말 진지하게, 사진을 잘 찍어주려는 의도에서 말했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다른 포즈~', '기다려', '가만 있어'는 우리를 계속 웃게 만들었다. 여기 찾아오는 한국인들에게 배웠을 저 생활형 단어들이 적재적소에 쓰이는 상황이 너무 웃겼다.
바톤을 넘겨 받은 엄마는 항상 그렇듯 밝고 기운 넘치게 포즈를 취했고 요가복을 입고 와서 그런지 비주얼만 보면 잔뼈 굵은 산악인처럼 보였다. 아빠는 원래 사진 찍는 걸 정말 귀찮아 하는 사람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사진 욕심이 은근 생겼다. 아빠도 나름대로의 창의성을 십분 발휘하면서 가이드의 '다른 포즈~' 구령에 맞춰 수십개의 포즈를 뻔뻔스럽게 취했다. 지난 번 시카고에서 스냅 사진도 찍고 최근에 몇 번 사진을 찍어서 그런지 확실히 카메라 앞에서도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 아빠를 보면서 흐뭇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