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 me!
실컷 사진을 찍은 우리는 별이 없어진 푸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아까 가이드가 챙겨 준 의자에 옹기 종기 앉았다. 가이드는 우리에게 컵라면을 먹을지 바나나 샌드위치를 먹을지 물었다. 아니, 아침으로 컵라면을 준다고? 예전에는 선택지 없이 무조건 일괄 바나나 샌드위치였는데 이젠 선택지가 생겼다니 감격스러웠다. 사알짝 으슬으슬한 날씨여서 그랬는지 우리 셋 모두 컵라면을 골랐다.
잠시 후 가이드는 컵라면에 각자 주문한 핫초코, 커피, 티, 그리고 삶은 계란까지 쟁반에 받쳐 왔다. 컵라면에는 'pop me' 라고 적혀 있었고 뚜껑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우동 라면 같은 맛이랄까. 향신료 맛도 안 느껴지고 도전적인 맛도 아니라서 우리 셋다 기분 좋게 만족하며 바닥까지 비웠다. 산 밑에서보다 산 꼭대기에서 구하기 어려워서 그런건지 어디든 꼭대기에서 먹는 컵라면은 훨씬 더 맛있다.
엄마랑 스위스 여행 중 융프라우 위에서 먹은 신라면도 그랬다. 평소 같으면 신라면을 먹지 않는 나라서, 삼양라면 없냐며 투덜거렸을 텐데 국물 한 입이 어찌나 소중하던지. 인스턴트를 잘 먹지 않는 엄마도 융프라우 꼭대기와 바투르 산 꼭대기에서 먹는 라면은 한 입 한입 음미하며 먹었다. 분명히 배가 안 고팠는데도 1분 만에 바닥을 드러낸 컵라면을 내려놓고 우리는 잠시 이 시간과 공간에 그렇게 가만히 머물렀다.
태어나서 일출을 본 적이 손에 꼽는 것 같다. 서울에서는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눈을 뜨는 날들도 많았다. 발리에서는 그 해가 뜨는 걸 보겠다고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푸르스름한 공기 속에 앉아 있다. 아까 비가 왔어서 그런지 우리 발 아래에는 운무가 넓게 퍼져 있었고 해가 떠오를 자리에는 구름이 뺵빽했다. 결국 해가 떠오르는 선명한 광경은 보지 못했지만, 구름 뒤로 해가 떠올랐고 우리는 각자 소원을 빌었다. 엄마, 아빠는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나는 기억이 안 날만큼 어릴 때부터 소원을 빌 때면 항상 같은 소원을 빈다. 행복하게 해 달라,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 이런 건 아니다. 저렇게 어떤 과정이나 노력없이 한 방에 행복한 결말로 가게 만들어 달라는 소원은 정말 소원으로만 남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아서 행복해질거니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마음가짐(여러가지 부분에서)을 잃지 않게 도와줘'라는 소원을 빌곤 한다. 그리고 그 소원 덕분인지 행복해지기 위해 다방면에서 노력하는 내 마음가짐은 큰 기복없이 지금까지 그대로다.
해가 뜨고 나서 밝아진 배경을 뒤에 두고 우리 셋은 또 한바탕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원없이 사진을 찍고 나서 우리는 현무암이 가득한 블랙 라바를 거쳐 바투르 산이 정면에서 보이는 카페로 향했다. 원래는 바닥이 없는 새 둥지 같은 자리에 앉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때마침 자리가 비어있길래 냉큼 가서 앉을려고 걸음을 옮겼다. 그랬더니 바로 직원이 우리를 제지하면서 최소 미니멈 차지가 8만원이라는 거다. 우리는 빠른 포기를 하고 산이 정면에서 보이는 넓은 쇼파에 대신 자리를 잡았다. 1시간 전만 해도 발로 딛고 서 있던 바투르 산을 이제 한 걸음 떨어져서 눈에 담고 있다.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면서 산 전체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가 나무 한 그루까지 보일 정도로 선명해졌다가를 반복했다. 카페에서 초코 크로와상과 바나나 튀김을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발리에서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디저트였지만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상쾌한 공기를 가득 쏘이고 와서 그랬는지, 엄마 아빠랑 편안하게 더 바랄 것 없이 여유로운 풍경 속이어서 그랬는지 더 달게 느껴졌다.
가이드가 열정적으로 담아준 우리의 사진을 단톡방에 공유했다. 엄마 아빠는 각자 자기 모습을 연신 두 손가락으로 확대해보며 만족했는지 흐뭇한 웃음을 띄었고 난 그런 엄마 아빠를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셋 모두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행복한 감정을 심어준 바투르 산에 언젠가 다시 올라올 일이 있을까, 다시 90도로 목을 꺾으며 별을 보고 산 꼭대기에서 컵라면을 후후 불며 먹을 날이 있을까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