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중베이
아빠는 제주도 출신이다. 제주도 출신인 사람들이 항상 미리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하는 거짓말(?) 까진 아니고 허풍 섞인 말이 있다. 어렸을 때 작살로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먹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 난 우리 아빠만 그렇게 얘기하는 줄 알았는데, 제주도 출신인 친구 부모님도 똑같이 얘기하는 걸 듣고 나름 충격을 받았다. 어쨌든 아빠도 물을 좋아하는 편이고 자기 입으로 맨날 자칭 '마린보이'라고 자랑한다.
그런 아빠가 해양 스포츠에는 유달리 취약해서 몇 번의 전적이 있다. 중국 하이난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했을 때도, 발리에서 스노클링을 했을 때도 코로 숨을 참고 입으로만 숨을 쉬는 게 익숙치 않은지 물을 왕창 먹었고 거의 아빠의 트라우마 버튼이 된 듯했다. 그래서 이번 발리여행에서 아빠랑 있을 때는 스쿠버 다이빙이나 스노클링 일정은 제외를 시켰다. 그렇다 해도 바다 깊숙한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오색찬란한 산호초들과 색색깔의 열대어들을 아빠 빼고 엄마랑 나만 본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아빠한테도 꼭 이 바닷속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서 머리를 굴리던 차에 '씨워커'라는 액티비티를 알게 됐다. 산소 마스크인데 꼭 우주복같이 생긴 마스크를 얼굴 전체에 쓰면 (머리를 숙이지 않는 이상) 물이 안 들어오고 숨도 땅에서랑 똑같이 쉴 수 있는 시스템이다. 역시 인간은 똑똑해. 이건 아빠가 좀 덜 두려워하고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아빠한테 하겠냐고 물었더니 생각보다 빠르게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씨워커를 하는 당일 아침, 물 속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아빠가 이퀄라이징(물 속에 내려가면서 귀에 가해지는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코를 잡고 숨을 내쉬는 등의 행위)을 잘 못해서 귀 아파하면 어떻하지 계속 걱정을 했다. 다행히 순서상 마지막으로 물 속에 들어간 내가 만난 아빠는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들어가기 전에 가이드가 물 밑에 내려가면 노래 부르고 혼자 얘기하고 다 해도 되는데 울지만 말라며 농담처럼 말했었는데, 아빠도 울지 않고 웃고 있었다.
다이버들이 먹이를 준 탓도 있겠지만 우리가 씨워커 체험을 하러 간 탄중베이 지역 자체가 물고기, 산호가 많은 곳이다 보니 진짜 물반 고기반이라고 할 정도로 물고기들이 많았다. 이렇게 물고기들이 한 장소에 밀도가 많게 모여 있는 걸 본적이 있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바닥에 설치된 봉을 잡고 걸어가면서 바닷속을 구경했다. 물고기들이 너무 많아서 손이나 다리 등에 톡톡 치이기도 했다. 가이드 역할을 하는 다이버는 그런 우리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로 담아주었고, 우리는 바닷속에서도 연신 손을 흔들고 양 손으로 하트를 만들었다. 서로 말은 하지 못했지만 신기한 물고기들, 산호가 보일 때마다 이 광경을 빨리 같이 봤으면 하는 마음에 옆에 있는 엄마의 옆구리를 찌르고 다급한 손짓을 하기도 했다. 엄마는 클라운 피쉬, 우리가 니모로 알고 있는 물고기가 숨어 있는 산호를 겁도 없이 만지기 시작했다. 나도 엄마를 따라 살짝 산호를 위에서 쓸듯이 손을 대보았는데, 산호가 손에 쩍 하고 붙는 찰진 느낌이 들어서 순간 놀랐다. 그렇지만 빠르고 부드럽게 만지니까 정말 이렇게 부드러운 걸 내가 만져 본적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여리여리하면서도 녹아 없어질 것 같은 촉감이 손을 감쌌다. 엄마는 그 느낌이 좋은지 거의 강아지 머리 쓰다듬듯이 바다에서 나가기 전까지 계속 산호를 만져댔다. 물 밖에 나와서는 뭘 그렇게 산호를 만져댔냐며 엄마에게 핀잔 주듯이 말도 했지만 이미 스노클링, 스쿠버다이빙을 경험한 엄마에게도 씨워커가 독특한 경험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씨워커를 오기 전에 블로그 후기를 봤었는데 진짜 물이 한 방울도 안 들어온다 해서 오늘은 화장도 나름 하고 왔는데 진짜 물이 어깨까지만 차오르고 목 위로는 안 들어오는 게 정말 신기했다. 바다 속에서의 30분은 체감상 10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고 이제 물 밖으로 나갈 시간이 됐다. 먼저 물 밖에 나가서 배 위 의자에 앉아 있던 엄마, 아빠는 물 속에서의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듯 "이거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너무 신기하다"고 얘기했다. 씨워커를 하러 오면서는 왕복 시간이 꽤 길게 거의 2시간 가까이 소요되어서 시간 낭비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했는데, 씨워커는 스쿠버 다이빙이나 스노클링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수영이나 내 호흡 자체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내 눈 앞에 펼쳐진 산호초와 물고기의 움직임, 비늘과 색체에만 온전히 내 관심을 둘 수 있는 시간이었다.
수영복을 입은 채로 비치타월을 몸에 감고 시원한 차 안에서 가이드가 열심히 담아준 사진을 다운 받았고 물 속에서는 진짜 사진이 예쁘게 찍히기가 어렵다는걸 다시 한 번 느꼈다. 물고기가 워낙 많은 게 비현실적이라 그렇게 보이는 건지, 우리가 쓴 산소마스크가 배경에서 너무 튀어서 그런지 옛날 아쿠아리움에 가면 찍어주는 합성 사진 같이 보였다. 어떤 사진은 얼굴만 너무 크게 나와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빠는 우리의 그 합성 같은 씨워커 사진이 마음에 들었는지 발리 여행 중에 프로픨 사진으로 올렸고 한 동안 유지했다. 나는 왜 잘 나온 다른 발리 여행 사진들도 많은데 웃긴 씨워커 사진으로 했냐고 아빠를 놀렸지만 우리의 당시 즐겁고 행복한 감정이 잔뜩 묻어난다는 점에는 동감한다. 나도 조만간 씨워커 사진으로 프로필 사진으로 바꿔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