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게 꺼낸 진심이 서로의 마음에 닿아 빛을 발하는 순간
마음이 지나가는 곳, 당신과 나의 이야기
햇살의 기울기에 따라 윤기를 머금은 테이블
그 위에 놓인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꽃,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내 마음을 알아주세요.'라는 꽃말을 지닌 델피늄이다.
마음이 지나가는 곳,
미처 속내를 다 내보이지 못한 용기 부족한 마음에게 건네는 응원일까.
스치는 마음을 서로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일까.
델피늄의 꽃말이 영화와 잘 어우러진다.
모두 저마다의 빛깔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면서
나는 어느 한적한 골목길 옆 카페 안에 있는 손님이 된다.
구석진 어느 테이블에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에 마음 한 켠을 내어주는 것.
불이 꺼지고 그렇게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전 열한시, 에스프레소와 맥주
추억은 추억으로, 텅 빈 마음 위로 쓸쓸함이 지나가는 곳
지난 추억에 대한 그리움과 어쩌면 다시 시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약간의 설레임을 안고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
남자는 유명한 배우가 된 옛 연인에게 진심어린 대화가 아닌 시시콜콜한 가벼운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메울 수 없는 마음의 간극, 테이블 하나를 마주하며 대화하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다.
대화를 할수록 어두워지는 여자의 얼굴,
그러면서도 옛 연인에 대해 끝까지 예의를 지키려 애써 웃는 모습은 안쓰럽다.
변해버린 마음을 마주하게 될 때 느껴지는 쓸쓸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여자는 함께했던 시간들, 그 시절의 낭만에 대해 이야길 나누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기억은 다르게 적힌다고 했던 노래 가사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빛바랜 옛 이야기들.
맥주와 에스프레소처럼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를 만남.
유리창 밖의 사람들에게 확인하라는 듯이 손을 흔드는 남자의 모습,
무심결에 뒤돌아봤다가 마주친 남자 회사 동료들의 모습.
눈치없고 배려없는 남자 앞에 이전의 사랑이라는 이름은 지워져 버린 지 오래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씁쓸한 마음을 가린 채 자리를 일어서는 여자.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하는 게 나았던 걸까.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카페를 나선다.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리웠던 지난 추억에 진정한 작별을 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믿음과 애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의심과 소문만 무성한 질문 앞에 숨이 턱 막힐 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맞다고 말하는 것도 이미 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애써 설명하고 싶지 않았을 여자.
겉으로 보여지는 화려함이 아닌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그립고 반가웠을 텐데,
그런 마음을 기대하고 나섰을지도 모를 여자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어떤 마음은 온기를 머금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고
어떤 마음은 이미 식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그 쓸쓸한 마음의 간격을 마주하게 되는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가 마음을 붙잡는다.
오후 두 시 반. 두 잔의 커피, 초콜릿 무스케이크
서툴지만 진심을 전하는 순간, 마음이 시작되는 곳
함께 보냈던 짧은 시간을 뒤로 한 채 여행을 떠난 남자, 이제 막 들어간 회사에서 적응 중인 여자.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서로의 마음에 가 닿지 않아서 어딘지 모르게 답답한 두 사람.
불명확한 현실 앞에서 서로의 마음을 드러내길 조심스러워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의 진심을 전하지 않으면서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뭔가 조금이라도 어긋난다 싶으면 상처받지 않으려고 먼저 문을 닫아버리는 마음.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까, 내가 그래도 되나'
계속 스스로의 마음을 검열 하면서 틈을 비집고 나오려는 마음을 붙잡는다.
마음은 그게 아니면서,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모른 채 끝나버린 이야기들이
시작되지도 못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까.
여자는 이런 겉도는 이야기와 침묵이 불편하다는 듯이 “이만 갈게요” 하며 자리를 일어서려는 순간
그제서야 남자는 여자를 붙잡으며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서툴게 꺼내기 시작한다.
여자는 여행간다는 말만 남긴 채 아무런 연락도 없었던 남자에게
“좋은 거 보면 사진이라도 하나 보내줄 줄 알았어요.” 라는 말과 함께
왜 이렇게 늦게 온 건지에 대해 서운함을 내비친다.
진심을 표현하는 것에 서툰 남자는
여행하는 동안 매일매일 그녀를 떠올렸다고 이야기한다.
체코에서 시계를 본 순간부터 여자를 떠올렸고 이후 날마다 태엽을 감으며 그녀를 생각했다고.
체코에서 산 시계, 독일에서 산 카메라, 인도에서 산 선물들을 가방에서 꺼내 테이블 위에 툭툭 올려 둔다.
남자는 다듬어지지 않은 서투른 진심을 그녀에게 내비치고
표현에 서툴러 마음을 감추기만 했던 여자와 남자는 서로 마주보며 수줍게 웃는다.
오후 다섯 시, 두 잔의 따뜻한 라떼
천천히 오랜 시간을 건너온 말들, 마음이 물들어가는 곳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눈빛을 머금고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대화가 이어진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마주하고 있지만 마주하고 있지 않는 두 사람.
처음엔 실수없이 일을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에 서로에 대해 좀 더 묻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 상대가 궁금해진다. 진심으로.
애써 담담한 어투로 죽은 딸의 이야기를 하고
사랑을 믿지 않던 여자가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서로에게 고백한 순간,
마음을 열고 어렵게 꺼낸 이야기 속에서 서로의 아픔을 마주한다.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는 눈빛,
오랜 시간 불이 꺼져 있었던 마음에 빛이 스며 들기 시작하고
진심으로 서로의 앞날에 축복을 건네고 싶어진다.
느림보 거북이가 별명이었다는 여자의 말에
죽은 딸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읊조리듯이 조용히 말한다.
정말 엄마라고 느껴질 만큼 그 따뜻한 말들이 여자의 마음을 울리고
잊고 지냈던 온기에 그 동안 무심하게 외면했던 스스로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다.
너무나도 따뜻해서, 그 따뜻함이 그리워서
터지려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울음을 삼키는 여자.
정말 엄마와 딸인 것처럼 느껴져서 내 마음이 먹먹해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든 스스로의 선택이었든
지금까지 타인을 속이며 살아왔던 인생이었지만
어쩌면, 다시 한 번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고 마음 먹게 되지 않았을까.
느리더라도 천천히, 묵묵히 나아가는 느림보 거북이처럼.
비내리는 저녁 아홉 시, 커피와 식어버린 홍차
메울 수 없는 간격, 마음의 결을 달리하는 곳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
결혼이란 선택 앞에 흔들리는 여자와 옛 연인이었던 남자가 마주하고 있다.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라는 여자의 마음과는 달리
무덤덤한 남자의 표정과 눈빛이 읽혀서 왠지 모르게 쓸쓸해진다.
용기가 없는 건지 확신이 부족한 건지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주어진 현실과 마음 사이에서 고뇌하는 남자.
남자가 망설이는 사이 온기 가득했던 그녀의 눈빛은 점차 식어간다.
자신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는 남자에게 실망 했을까,
자신을 잡아줄 거라 생각했던 여자의 마음과는 달리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체념의 말들을 내뱉는다.
온기를 거둔 건조한 눈빛을 하고선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에 기대고 싶은 남자,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은 확신없는 마음에게 건네는 핑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여자.
“왜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어.”
말 속에 담긴 여자의 진심을 알면서도
남자는 끝끝내 그녀를 붙잡지 못하고 서로 인사를 나눈 채 헤어진다.
서로에게 미처 건네지 못한 말들이 비에 젖은 도로 위 꽃잎처럼 툭툭 떨어져 있다.
그렇게 뒤돌아서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남자의 마음은 씁쓸하지만 홀가분했을까,
잡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 주저앉아 소리없이 울었을까.
마음을 다했던 사랑엔 후회가 남지 않는다.
옷걸이에 외투를 걸듯이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마음을 걸어둔 적이 있다.
계절이 바뀌고 시시각각 삶이 풍경이 달라질 때면
어쩌면 걸어둔 외투를 집어들고 서로의 길을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한 때 서로의 마음에 기댄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
누군가는 따뜻한 위안을 느끼며 발걸음을 내딛을 것이고
누군가는 서늘한 공기를 기억하며 옷깃을 여밀지도 모른다.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음이 얼마나 될까.
흘러가는 모든 것들, 변하는 게 어쩌면 더 쉬울지도 모를 세상 속에서
서로의 곁에서 마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부지런히 걸어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금
곁을 지키고 있는 온기 가득한 마음들을 떠올리고
서로를 붙잡아주는 여린 듯 단단한 마음들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지루하다고 느껴졌던 일상을 지킬 수 있음에
그 소중함의 깊이가 절절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여름에서 가을로 흘러가는 시간,
느릿느릿 발맞춰 걷는 그림자 사이로 언뜻언뜻 스치는 마음들
흘려보낼 것인가, 붙잡을 것인가.
눈빛을 마주한 순간 우리는 알게 될 거다.
차가운 눈빛 뒤로 식어버린 지나간 마음을,
그윽한 눈빛에 담긴 애틋하고 각별한 마음을.
마음은 감출 수 있어도 눈빛은 감출 수 없는 거니까.
자막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고
카페의 손님인 듯 함께했던 영화가 끝난 뒤
우리들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해질녘 노을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수도 있고
혹은 꽃가게에 들러 델피늄 꽃을 사고 싶어질지도 모르고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라떼와 홍차 사이에서 고민하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거나
그 때 우리는 카페에서 무슨 이야길 나눴던가, 기억을 더듬어보기도 하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용기내 전화를 걸었다가 “그냥 생각 나서”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켜켜이 쌓아두었던 감정의 틈을 비집고
서툴게 꺼낸 진심이 서로의 마음에 닿아 빛을 발하는 순간
우리는 말하고 싶어진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
그리고, 제대로 살고 싶어진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맑고 고운 시선으로, 여린 듯 단단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포스터를 발견,
꼭 한 장 가져오고 싶었는데
개봉하는 영화관도 적을 뿐더러
포스터까지 없어서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걸음은 옮겼지만 여전히 마음은 포스터 곁을 서성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