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 자기 정체성을 회복한다 (1)
지난 2월 13일, 나의 조카가 세상에 태어났다. 이 자리를 빌려서 이 세상에 내 동생과 시누이의 몸을 빌려 나타난 그 생명에게 작게나마 축복을 나눠주고 싶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이 긴박하게 흘러가는 이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나갈 수 있기를. 내 동생 내외의 노력과 더불어 자기 자신이 가진 재능을 통해 이 세상의 추함과 아름다움, 선함과 악함, 그 두 가지로도 가려지지 않는 풍요로움을 한껏 느리고 살아가기를.
바로 내 옆에서 하루 더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야옹님을 보면 더욱더 생각이 많아지기 마련이지. 생명이 그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지만.
이번 주는 나에게 주어진 “창조성 회복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이나 사건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당장 어떤 것을 내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지 살펴보는 시간이다.
책에서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정신을 빼놓는 사람들’ 에 관해 쓰고 있다. 너무나 묘사가 생생하게 이루어지다 보니 우리들은 그 사람들에 대한 격렬한 감정에 빠진 나머지 우리조차도 정신을 빼놓기가 쉬워진다. 사실 정말 중요한 말은 끄트머리에 존재하는데 말이다.
그런 정신을 빼놓는 사람을 인생에 끌어들인 건 나 자신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살피고 그런 사람들의 기분 변화에 전전긍긍하면서 내 정신을 빼놓는 게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홀로 나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고 간편하거든. 내 인생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을 몇 명 마주했었지.
그러한 사람들이 어땠었는지 이 글에서 굳이 나열할 마음은 없다. 그게 내 목적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 그 문단들을 떠올리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여다보게 되는 측면 중 하나는, “어느 누군가에게는 나도 그런 ‘정신을 빼놓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라는 자기반성 혹은 두려움이다. 나도 역시나 성인군자가 아니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더 힘든 사람들 앞에서 나의 힘든 구석 혹은 나의 불만사항만 토로하는 그런 일을 벌인 경험이 여럿 있었고, 지금에서조차도 깨닫지 못한 그런 일을 벌인 일이 분명히 여럿 존재할 것이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가 제정신으로 하는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또한 조심하는 일뿐.
하지만... 막연한 자기 관찰과 희망만 가진 상태에서 이번 주의 화두인 “자기 정체성의 회복” 은 가능할 것인가?
지금 약간 고민에 빠져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그대로 따라갈지,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내 치유의 길을 따라갈지.
아티스트웨이를 따라간다고는 하지만, 1회 차와 2회 차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내 인생에서 추구하는 가치 또한 그 사이에 아주 많이 바뀌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단적인 예가 로맨스에 대한 생각.
30대 초반까지 이런저런 다양한 사건들을 많이 겪는 재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마음은 없다. 인생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도 얻고, 날것 그대로의 욕망이 얼마나 다른 재미있는 사유보다 우선하는지도 똑똑히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거든. 책 속에서 “삶의 파이”를 스스로 체크하는 숙제를 보면서 딱히 저항감 같은 감정도 없었었고.
지금은? 흠, 로맨스... 사랑이란 감정이 참 재미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내 인생의 한 축 중 하나로 삼는 것은 위험한 일이란 생각이 강하다.
물론 우울증 약을 몇 년째 달고 사는 사람이 사랑이나 로맨스에 대해서 섣불리 판단하기는 꽤나 위험한 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내가 지금 저 측면을 옆으로 밀어두는 것이 진짜 내 본성의 외침인지 아니면 우울증에 찌든 내 자신인 것인지 당장은 알 돌 리가 없다. 상담을 다시 받아봐야 하는 건가.
(동생이 그러더라고 : 누나는 모나코만 안 갔어도 충분히 잘 먹고 잘 살았을 텐데. 하하하, 충분히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선택을 한 그 당시의 나를 비난할 마음 또한 없다. 그 당시에는 정말 필요했던 변화였으니까.)
로맨스에 대한 얘기를 잠깐 밀어 두고,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와 보자.
나의 정체성을 다시 찾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금의 나의 상황에서는, 아주 작은 행동이나마 세상을 이롭게 한다라는 자기 만족감이 아닐까 싶다. 또 다른 측면도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다음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모나코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반쯤 도망치듯 원래 살던 동네로 돌아온 이후, 새해가 되기 전까지의 내 상황은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구명튜브에 몸을 맡긴 채 집채만 한 파도에 휩쓸리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보는 게 가장 정확할 것 같다. 심지어 뭘 하려고 해도 꼬여가기만 하는 것 같은 상황에선...
예전 대항해시대 시절 나무범선으로 항해하던 때에... 폭풍우를 헤쳐나가는 법은, 모든 돛을 접고 선원들 포함 모든 사람들이 메인 마스트나 배의 가장 단단한 기둥들에 몸을 묶은 후 폭풍우가 지나가고 바람이 잔잔해질 때까지 하염없이 파도에 떠내려가면서 기다리는 것뿐이었지. 그런 미친 파도가 몰아치고 바람이 거셀 때에 그것을 거스르려는 행동을 하면 나무배는 산산조각 나 부서지고 사람들은 물고기밥이 되기 마련이지.
물고기씨의 경우에는 이제야 파도가 잠잠해지기 시작하는 게 느껴진다. 아니 대체 무슨 파도가 1년 넘게 쉬지 않고 물아칩니까 같은 불평은 나중에 웃으면서 해도 되지만, 아직은 내 몸을 완전히 자유롭게 풀고 돛을 펴기에는 무서운 것도 맞다.
요즘 며칠간 직장은 파업이고 야옹님도 상태가 그러저러한 상황에서 정말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잠이 많아진 편인데, 잠을 못 자던 상황과 대비했을 때 이 상태가 더 좋은 상황이라는 이야기는 할 수가 없다. 정말 우울증이 심해졌을 때 그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 잠으로 도피하는 것도 있었거든.
그래도 저번 달부터 다른 직장에 대타로 일하게 되었는데 (대략 6개월짜리 파트타임 계약직이다), 처음에는 그저 재정적인 필요에 의해 시작한 이 일이 예상외로 나에게 심적인 위안이 되고 있다.
물론 오랜만에 타이트한 일정들을 마주하니 몸과 정신이 피곤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럴 때 다시 느끼는 게 있다 : 나는 역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는구나.
도움이 되는 일이란 게 정말 별것 아니래도 괜찮다. 야옹이한테 하루 두 끼 맛있는 밥을 챙겨주고, 소리가 막혀서 어쩔 줄 몰라하는 학생에게 시원한 소리를 내는 법을 알려주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입시생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라고 작게 속삭이는 정도라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좋은 것은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그들의 길에서 충분히 행복해지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지금 당장 힘들다면 최소한 그런 길로 안내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주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당장 나 자신이 이렇게 우울증 중증환자처럼 기운 빠져서 힘들어하는데 남들을 도와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의미가 없으면 안 도와줄 것인가? 지금 당장 세상에서 나에게 원하는 게 이런 종류의 일이라면 이것이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내가 이렇게 무력감과 회의주의에 가득 차있을 때 나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지 - 최소한은 해줘야지, 안 그래?
그 최소한이 불어책 한 두 페이지를 읽는 거건, 아주 잠깐이라도 내 몸을 위해 스트레칭을 해주는 것이건... 심지어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도 나 자신에게 ‘너는 나아지고 있어. 너의 절망을 난 이해하고, 널 꺼내주기 위해 아주 조금씩이라도 나는 노력하고 있어‘ 라고 나 스스로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행위 말이지.
돌아오는 토요일부터 한국으로 2주간 쉬러 간다. 마지막으로 한국을 간지 2년 반 만에 쉬러 가는 것이라서 너무나 절실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 역시나 가만히 나를 내버려 둘 줄 모르는 엄격한 나는 ‘40이 넘어서도 부모님 손 빌리는 게 잘하는 짓이냐‘ ‘야옹이는 어쩌려고 두고 가는 거니’ 같은 잔소리를 해대지만, 뭐 어쩔 거야. 당장 그렇게라도 쉬러 가지 않으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은데.
그리고 야옹님 같은 경우엔 돌봐줄 사람도 쉽게 찾은 편이라서 조금은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는 것이 다행이다.
오늘 글은 뭔가 정리가 덜 되고 두서가 없는 편이지만, 그런 날도 있는 거지. 이런 불완전하고 날것에 가까운 글도 써야 그다음에 고치거나 뭔가 손을 댈 재료라도 생기는 거지, 라며 불안해하는 나를 조금 다독여본다.
필름이 아무리 늦게 돌아가도, 영감은 언제나 자신이 선택한 촬영기사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다 - 마이너 화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