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꼰에서 만난 너를 생각하며
사랑스러운 게레라Guerrera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뜨리니다드Trinidad를 못 잊어 산티아고Santiago de cuba에서 아바나로 향하는 버스표를 취소하고 하루라도 더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뜨리니다드로 돌아갔다. 그 바람에 나는 아바나Habana에서의 하루를 포기해야 했다. 출국 전날 오후 늦게에나 도착한 아바나에서 이제야 하고 싶은 것들이 생각나 이것저것 계획을 세워보지만 떠나간 시간을 붙잡아 올 수는 없었다. 비행기표를 연장하는 것도 무의미했다.
그렇게 나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말레꼰으로 걸어 나왔다. 말레꼰과 모로 요새의 석양을 보기 위해. 말레꼰에 즐비하게 늘어선 자유와 사랑의 영혼들을 만나기 위해. 그러다가 그를 만났다. 먼저 말을 걸어온 건 그였지, 아마. 대화를 하고 싶어 그러니 잠깐만 시간을 내어줄 수 없느냐고 했다. 이미 뜨리니다드에서부터 쿠바 사람들에게 무장 해제된 나는 별다른 경계 없이 그의 요구에 응했고, 말레꼰의 석양을 카메라에 담기를 포기하고 그의 옆에 앉았다.
너는 영어를 했다. 살사 선생님이라고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에서 탱고 레슨을 한 시간 받은 뒤부터 일찌감치 살사는 포기한 나이기에, 너도 살사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너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가르친다고도 했다. 살사를 가르치는 건 부업이라고 했다. 생활이 어려워서. 너는 나의 직업을 물었고 국적을 물었고, 내일은 뭘 할 계획인지 물었다.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너는 한국인 선생님은 처음 본다고 했다. 당연하지. 그렇게 따지면 처음 보는 사람은 수백 명도 넘을 텐데 너는 그럴싸하게 너의 말을 포장하길 잘했다.
참 꿈도 야무지지. 다음 날 공항 가기 전까지 시간을 쪼개고 쪼개 아바나 근교 바닷가에 다녀올 생각을 하다니. 지난 두 달을 생각해 보면 나의 여행에서 계획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이었는지 뻔히 알고도 남았을 텐데 나는 또 미련을 못 버리고 계획을 세워 놨었다. 그 계획을 너에게 이야기했고, 너는 그 바닷가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타야 하는 곳을 알려줬다. 아바나에서 시내버스를 타는 건 거의 쿠바인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관광객은 대부분 택시를 이용했고, 버스를 이용하려고 해도 어디서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버스를 타면 대부분 쿠바인이므로 쏟아지는 시선을 감당해야 하기도 하고, 노선이 어디로 이어지며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일이므로 버스를 탄다는 건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그 날 하루를 버려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여유롭게 해야 하는 일이었다) 네가 알려준 정보들은 내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너는 같이 가도 되냐고 물었고 나는 수영을 못하니 그냥 바다만 보고 올 거라고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난 네가 이방인에게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것저것 묻는 것이 참 많기도 했다. 너도 나도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다 떨어져 어둠이 몰려왔고, 그때서야 나는 핸드폰을 까사(Casa Particular, 외국인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에 놓고 온 게 생각났다. 그게 없으면 길도 잘 못 찾는데. 게다가 난 지금 혼잔데. 걱정이 앞서서 가야겠다고 말했고 너는 내게 이름과 전화번호, 메일 주소, 집주소를 물었다. 이미 무장 해제된 상태였으므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네게 내 정보를 줬다. 그러면서도 연락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너와 내가 친구가 됐다는 상징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너는 내게 까사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갖고 있던 까사 명함을 보여주니 너희 집과 가깝다고 했다. 나는 너를 따라 아바나의 낯선 골목골목을 걸었다. 골목의 가로등 불빛은 무의미했고 이따금씩 나타난 상가의 불빛들이 나를 안심시켰다. 돌이켜보면 참 순진했고 위험한 일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를 만난 게 운이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뜨리니다드에서부터 숱하게 들어온 음악이 상가 불빛을 따라 흘렀고, 나는 이 노래 알고 있다고 네게 자랑을 했다. 너는 이 노래 가사를 적어 내게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내일 아침 버스를 타러 가기 전에 너희 집에 들르라고 했다. 준비해 놓고 있겠다고. 너는 참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까사가 가까워올 무렵 너는 내게 선물을 달라고 했다. 너의 가족들이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너희 돈으로 3세우세(1세우세는 1달러보다 조금 더 비싸다)를 달라고 했다. 내게 그건 큰 돈은 아니었다. 여행이 끝나가는 마당에 쿠바 돈 조금을 친구에게 주는 것도 그리 꺼려지는 일은 아니었다. 네가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네게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그 얘기를 듣는데 전부터 들어온 쿠바 사람들이 뒤통수를 치는 전형적인 수법이 생각났다.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고는 돈을 요구한다고. 쿠바 여행은 호불호가 강한데 그중 하나는 쿠바 사람들의 친절. 누군가는 타고난 천성이 친절하고, 누군가는 목적을 가진 친절이라고. 목적을 가진 친절을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쿠바에 실망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가져온 쿠바라는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판타지. 순수하고 맑은 사람들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쿠바에서의 마지막 밤에, 나는 드디어 그런 인간을 만난 건가. 처음엔 의연하게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 너도 처음엔 좀 더 친절한 말투로 자세하게 설명을 하는 듯하더니 내가 계속 못 알아듣는 척을 하자 약간은 목소리가 격앙되는 것 같았다. 내 기분도 점점 불쾌해졌는데 어둡고 낯선 골목에서 너와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까사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지금 너에게 줄 돈이 없다고 했다. 내가 가진 건 1세우세가 전부라고 했다. 넌 그거라도 괜찮다고 했다. 1세우세를 받은 너는 마지막까지 내게 친구라고 말하며 작별의 포옹을 하고 내일 아침 꼭 너희 집으로 들려서 노래 가사를 받아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쿠바인에 대한 내 판타지와 함께.
까사로 돌아와 친구에게 너를 만난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그래도 3세우세면 되게 조금 요구한 거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큰일 날 뻔했다며, 앞으로는 어디를 여행 가든 낯선 사람에게 네가 묵고 있는 곳의 주소를 알려주지 말라고 했다. 끔찍했던 영화 테이큰 얘기를 덧붙이며. 그제야 네게 알려준 내 개인정보 생각이 났다. 별일이야 없겠지. 네가 내게 요구한 3세우세는 선물을 좋아하는 너희 나라 사람들의 기질에서 비롯된 걸까. 아니면 네가 정말 내게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였을까. 네 친절의 값으로 지불한 1세우세는 너무 적은 돈이었을까. 결국 나는 몇 세우세의 동전을 한국까지 가져왔는데. 이럴 거면 기분 좋게 네가 요구하는 돈을 줄 걸 그랬나.
뜨리니다드에서 자수가 놓인 천을 사려고 가게에 들어갔을 때, 가게 주인처럼 보였던 젊은 여자애가 다른 건 자신이 만든 거라 깎아줄 수 있지만 내가 고른 건 자기 친구가 만든 거라서 절대로 깎아줄 수 없다고 하다가, 내가 가진 돈을 전부 보여주자 한숨을 쉬며 그럼 자기에게도 선물을 달라고 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녀가 내게서 받고 싶었던 선물은 내가 메고 있던 크로스백. 그녀가 팔고 있던 자수 놓인 천을 몇 장은 살 수 있는 값과 맞먹는 가방이었는데 그걸 달라고 해서 난 좀 놀랐다. 남은 여행을 위해서는 가방이 필요했으므로 나는 그녀와 흥정하기를 실패하고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가진 돈이 정말 없었으므로. 까사와 가게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까사로 돌아와 차메로Chamero Guerrera(까사 주인)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쿠바 사람들은 선물을 좋아한다고 했다. 기념품을 사러 갔을 때도 상인들은 흥정을 하는 대신에 선물을 하나씩 끼워 줬다. 1세우세를 깎아주는 대신에 1세우세에 팔고 있는 물건을 선물로 주는 격이었다. 여행 첫날 아르헨티나 공항 택시에서 엄청 바가지를 쓴 이후부터 사기당하지 않으려고 바가지 쓰지 않으려고 물건을 살 때마다 셈하기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던 나는 그들의 셈법이 결국은 상술이라고만 생각하고 웃어넘겼었다. 생각해보면, 차메로와 아니따Anita Guerrera(까사 주인)는 내게 많은 선물을 줬다. 우리의 관계가 두터워질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건넸다. 이거 정말 좋은 시가야. 아버지 가져다 드리면 좋아하실거야. 이건 체 게바라가 있는 동전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화를 나누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나는 "운 모멘또 . un momento"를 외치며 내 방으로 들어가 캐리어 속의 물건을 꺼내왔다. 비록 남미에서 산 기념품들과 한국에서 가져간 셀카봉이 내가 가진 전부였지만. 그들에겐 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건 여행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라서 틈만 나면 그들에게 뭘 보내주면 좋을까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건 그들과 내 관계가 그만큼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고 아직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는 건 내 상식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시, 말레꼰에서 만난 너를 생각해 보니 너희들이 말하는 선물이라는 게 셈을 떠나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진짜 마음을 주는 일이었다면 나는 관계에 있어서도 셈을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게다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는 것이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줌으로써 너와 내가 특별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관계에 대한 나의 편견이 부끄러워진다. 그저 당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려고, 그런 억울한 기분을 만들지 않으려고 진짜 중요한, 너희들과 나 사이의 교감을 놓친 거라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1세우세를 줬을 때 화내지 않고 이거라도 고맙다고 했던 네가 생각이 난다. 넌 그걸 친절의 대가가 아니라 정말 선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지는 편이 나를 위해서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