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지 도망쳐서 잠시 숨 고를 수 있어
나에게는 아지트가 있었다.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내. 한옥을 개량한 작은 게스트하우스가 내 아지트였다. 우연히, 섬진강이 보고 싶어 찾아갔던 구례에는 뚜벅이가 갈 수 있는 내가 찾은 숙소는 몇 없었다. 두 개의 선택지 중에서 하나는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밥이 맛있는 곳, 하나는 읍내에서 걸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신혼부부가 운영을 하고, 저녁이면 마당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말에 이곳으로 정했다.
이때만 해도 자전거를 탈 줄 몰라서, 안주인에게 모자를 빌려 섬진강을 향해 걸었다. 자전거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는데 오월의 볕이 어찌나 뜨겁던지 결국 길의 초입에 멈춰서서 정자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그래도 섬진강은 봤으니 됐지. 싶어서. 아늑하고 넉넉한 섬진강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구례가 좋아지기 시작한 건 이쯤부터인 것 같다.
저녁엔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이 마당에 옹기종기 모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맥주 한 잔씩 하면서 주인 내외와 다같이 어울려 시시콜콜한 농담을 했는데 각자 개성들이 강해서인지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때만해도 외국이 아니라 국내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한다는게 참 낯설었는데, 그땐 나답지 않게 마음이 활짝 열렸었다. 그러니 그 뒤로 계속 구례를 찾았겠지.
한 달 뒤였나. 한 번 더 구례에 갔다. 이번엔 섬진강을 보겠다는 목표도 없었고 그저 그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부부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이기 시작했고, 마침 비가 왔나. 우리는 동네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빌려다 보고 동네 작은 식당을 돌아다니며 밥을 먹고, 지리산이 코앞인데 읍내만 쏘다녔다. 아기자기한 동네가 너무 좋았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한지 일 년이 되었다고 초대장을 받았다. 파티를 연다고. 마당에서 고기도 굽고, 기타 치고 키보드 연주하며 노래도 부르고, 선물 교환도 했다. 나처럼 선택받은 나름 단골 손님들과도 인연을 맺었다.
구례가 좋았던 건 마을이 주는 편안함도 있지만 좋은 사람이 있어서였다. 그 뒤로 일하다가 지칠 때면 주말동안 구례에 내려가 있다 올라왔다. 기차 타고 버스 타고 택시타고 하면 우리집에서 편도로 5-6시간은 족히 걸리지만, 피곤보다는 행복이 더 큰 일이었다. 직장에선 구례에 자주 가는 나를 보며 구례에 뭔가를 숨겨놨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도대체 구례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처음 간 게 2016년이었으니까 햇수로 5년을 꼬박 채웠다. 휴가철에는 오래 머물기도 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좋아하는 친구들을 데려가 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정말 나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수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다. 서늘한 아침엔 찻잔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 저기 멀리 노고단을 바라보며 멍때리는 게 일이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구름이 흩어지면 잠시 선명해지는 지리산의 능선을 보는 일. 가만히 바람을 느끼다가 몸이 부르르 떨릴때쯤 헐레벌떡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저녁이면 석류나무 앞 의자에 쪼그려 앉아 맥주를 한 캔 마시고, 해질 때쯤엔 서시천으로 가서 자전거를 탄다. 나는 구례에서 자전거를 배웠다. 서시천은 자전거를 배우기 좋은 곳이다. 길이 잘 닦여 있고 사람이 적어서 나는 몇 번 넘어져가면서 자전거를 배웠다. 이제는 섬진강 자전거길도 쌩쌩 다니고 읍내도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다.
부부에게 귀한 아이가 생겼고, 이젠 친구가 된 부부가 내가 손님으로 가면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이것저것 신경쓸까 염려되어 한동안 구례를 가지 못했다. 그러다 코로나19로 어디든 옴싹달싹 못하는 지경이 됐고, 아가에게 해가 될까 더 가지 못했다.
그러다 연락을 받았다. 겨울 동안에 잠시 게스트하우스를 맡아 줄 수 있겠냐고.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한동안 가지 못했는데, 사정이 생겨서 당분간 게스트하우스 관리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마침 나는 때 일을 쉬고 있었고, 코로나 때문에 갇혀 지내는 삶이 괴로웠다. 구례에 가면 손님들을 만나야 하는 게 좀 마음에 걸렸지만, 언젠가 한번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해보고 싶었던 마음, 구례에 살아보고 싶었던 마음이 나를 구례로 이끌었다.
한 달 정도 되는 시간이었을까.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비교적 자유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고, 동네친구도 생겼고, 동네 단골 가게도 만들었다. 그동안 구례에 가면 게스트하우스 주변 읍내만 맴돌아서 구경하지 못했던 구례의 곳곳을 다녀보기도 했고, 자전거를 마음껏 타기도 했다. 좋은 손님들을 만나기도 했고, 식빵을 만드는 법도 배웠다. 요가를 등록해서 다니며 마을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게스트하우스의 호스트가 되기에믄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았다.
부부의 배려로 마지막은 가족들을 초대해서 함께 새해를 맞이했다. 처음엔 왜 이런 곳에 있느냐고 나를 딱하게 여기던 아빠도 하루만에 구례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아주 우연히 시작된 인연이 인생에 감사한 추억을 남겨줬다.
이제 부부는 구례에 없다. 다른 곳으로 터를 옮겼고 게스트하우스는 다른 주인이 운영을 하고 있다. 보통의 손님들처럼 다시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했고, 곳곳에 이전 호스트들의 흔적과 나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뭔가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구례는 그대로인데 아지트를 든든하게 지켜주던, 마음의 위로가 되어주던 사람이 이제 구례에 없다. 틈만 나면 구례로 도망갈 궁리를 하던 내게 이제 아지트가 없다. 시간이 생기면 어디를 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마음에 차지 않아 포기해버리고 방구석에서 표류하고 만다. 쉬지만 쉰 것 같지 않은 기분. 역시 아지트가 필요하다. 아지트를 갖는 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