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 간 디자이너의 추억

라떼는 말이죠

by 물푸레


전자출판이 도입되기 전 첫 직장에서 사진식자를 치고 암실에서 현상을 했다. 제판 집에서 손으로 하나하나 오려 붙여 만든 필름으로 뜬 소부판을 들고 인쇄소로 뛰었다. 인쇄가 야간에 걸리면 밤을 새워 인쇄 상태를 살펴야 했다. 납기에 쫓기면 제본소로 달려가 일손이 달리는 제본소에서 노가다를 도왔다. 트럭에 가득 실린 인쇄물을 지정된 장소에 납품해야 일이 끝났다. 충무로와 인현동 일대가 예전 그대로라면 눈을 감고도 복잡한 골목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다녀야 했다.


광고주 또는 광고대행사에서 던져 준 콘셉트를 받아 팀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했다. 크리에이티브 부띠끄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에게 브레인스토밍은 일의 시작이었다. 크리에이티브는 열심히 한다고 나오지 않는다. 저녁에 아이디어가 정리되면 밤을 새우기 일쑤다. 새벽에 시안을 출력한 후 사우나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광고주에게 향한다. 시안을 받은 광고주는 책상 위에 던져두고 우선 자기 일부터 처리한다. 저녁쯤 광고주로부터 연락을 받고 들어가면 수정 사항을 주면서 내일 아침에 보자고 한다. 다시 밤샘 무한루프 모드로 돌입한다. 어렵게 하나의 프로젝트를 끝내면 정산과 청구를 하고 광고주와 밀당을 거쳐 계산서를 발행해야 비로소 완료된다.


디자이너로 짬밥이 차서 팀장급이 되면 카피라이터의 결과물을 컨펌해야 한다. 제품 분석이 부족하거나 시장 동향을 알지 못하면 카피를 한 줄도 쓸 수 없다. 틈틈이 공부를 해야 한다. 비딩과 경쟁 PT는 일상이다. 디자인과 카피를 섭렵해서 고참이 되면 A.E. 역할을 맡고 디렉터가 돼야 한다. 큰 비딩을 이겨서 대기업의 프로젝트를 따 내면 회사의 한 시즌 먹거리가 되기에 치열하게 준비한다. 오퍼레이터로 시작한 디자이너는 어느새 대기업의 홍보 마케팅 연구개발 부서의 임직원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어도비 포토샵 일러스트 쿽 익스프레스 페인터 등 거의 모든 애플리케이션은 독학으로 배워야 한다.

당시에는 한글 매뉴얼도 없어서 원서로 익히고 어깨너머로 배운다. 어렵게 따낸 프로젝트에서 오타가 한 글자라도 나오면 폭망이다. 어느 텍스트를 보든 맞춤법이 맞는지 보고 오탈자를 찾는 내 모습은 이때 시작된 일종의 직업병이다.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없는 체력과 광고주의 잦은 변덕을 감당해 낼 수 있는 멘털 그리고 수시로 해야만 하는 접대를 버텨내는 주량까지 겸비해야 한다. 육체노동과 감정 노동에 더해 창의력까지 겸비해야 디자이너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광고주는 주로 삼성 엘지 등 전기 전자와 IT 쪽이 주류였지만 분야는 너무도 넓었다. 국회 지방의회 등 각종 정치광고를 하며 정치인과 보좌관들의 이면을 봤고, 인천항 등 관공서의 브로슈어를 제작하며 행시 패스한 고위직 공무원의 갑질을 목도했다. 벤처 열풍이 불던 시기에는 내가 담당했던 바이오 업체가 한 달 가까이 상한가를 치는 장면을 열기 속에서 바라봤다. 기업 홍보실에서 몇 년 일 할 때 봤던 언론사별 기자들의 행태는 지금도 변함없는 듯하다. 그 외에도 박물관 일을 하다 보면 역사, 한전 일을 하다 보면 에너지, 한우 패키지를 맡게 되면 농축산, 모델 촬영을 진행하다 보면 연예인과 기획사 그리고 매니저의 역할을 알게 된다.


정리하자면, SNS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느 분의 글처럼 디자이너의 세상에 대한 넓고 얕은 지식은 여러 직업 중 단연 최고다. 어찌하다 보니 제조업으로 넘어와서 섬유공장을 운영하게 된 내게 지금까지 남아있는 많은 분야에 대한 '야매' 짓은 이때 배운 버릇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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