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푸레 Mar 15. 2021

18 시간 화물선 탑승기

울릉도에서 포항까지, 생애 가장 긴 여행


새벽 두 시의 동해. 깊은 밤바다에 싸륵싸륵 눈이 내린다. 시린 갑판 위로 내린 눈이 얼음처럼 쌓인다. 내가 기어서 들어간 선실의 크기는 1인용 백패킹 텐트의 내부 공간과 비슷하다. 똑바로 누우면 발끝과 벽 사이의 여유가 한 뼘에 불과하다. 양 어깨와 벽 사이의 공간 역시 빠듯하며, 자리에 앉으면 머리가 천정에 닿을 듯하다. 몸을 누이면 목재로 짜 놓은 선실에 꽉 끼는 듯하다. 그 방에는 2층 침대 형태로 같은 크기의 침상이 위아래로 두 칸 옆으로 두 칸 그래서 총 4 명을 수용한다. 선실에는 어른 머리 크기 창이 바다를 향해 나있다. 배 안팎의 기온차에 의한 결로로 인해 창 유리가 젖어 뿌옇고 축축하다. 철재로 된 덧창을 닫으면 객실은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다. 산채로 관 속에 갇히면 이런 기분일까. 어제 오후 4시에 배를 탔으니 나는 이미 10 시간째 선실에 갇혀있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복도를 지나면 갑판으로 나갈 수 있지만 거센 파도가 배를 흔드는 중이다. 얼어붙은 갑판에 나갔다가는 미끄러져 바다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나는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관 같은 객실에 죽은 듯 눕는다.


먼 섬으로 떠나는 배는 날씨에 따라 운행 일정이 자주 바뀐다. 당초에 섬으로 출발하기로 했던 날은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을 것으로 예고되었기에 우리는 일정을 하루 앞당겼다. 뭍에서 섬까지 바닷길이 멀었지만 우리가 탄 쾌속선은 3시간 30분이면 닿을 수 있었다. 객실에 앉아 섬에서의 백패킹을 기대하며 트레킹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었다. 지난여름부터 꿈꿔왔던 원시림 속으로의 겨울 여행이었다. 하지만 배가 항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육지로부터 다급한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전화였다. 전화를 받는 내 목소리가 떨리는 걸 스스로 느꼈다. 나는 급히 서울로 가야 했고 배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섬에서 나오는 가장 빠른 배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타고 있는 배 이후 며칠간은 섬에서 나오거나 들어가는 배가 없었다. 바다의 날씨가 여객선의 운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섬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남은 수단은 화물선이었다. 화물선은 여객선에 비해 훨씬 규모가 커서 어지간한 날씨에도 배를 띄울 수 있다고 한다. 섬의 사정에 밝은 일행이 있어 선사에 연락을 취했다. 다급한 일이 있어 내일 중에 배를 꼭 타야만 하는 일행이 있노라며 사정을 했다. 하지만 선사 측 담당자의 답은 냉랭했다. 배에 차를 실은 운전자가 아닌 여행객은 화물선에 태울 수 없다고 했다. 당신들처럼 급한일을 핑계로 화물선을 얻어 타고 섬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피곤하다고 했다. 당신 같은 사람 태워 줄 자리는 없으니 꿈도 꾸지 말라며 하소연과 훈계를 섞어 10여 분 넘게 수화기를 놓지 않았다.


다음날 화물선에 탑승할 수 있기만을 기다리며,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일행들과 약속된 일정을 따랐다. 어렵게 시간을 내서 먼 곳까지 여행을 떠나온 일행들에게 가능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이미 일행들의 여행 분위를 어느 정도 망쳤지만) 애써 초조함을 감춘 채 돌아본 섬은 거칠고 아름다웠다. 해안을 집어삼킬 듯 덮쳐오는 파도는 그 위기감과는 달리 깊고 청아한 푸른빛이었다. 두렵고 맑고 찬란했다. 깎아지른 해안의 바위 절벽은 비늘을 떨구 듯 낙석을 토해냈다. 떨어진 돌멩이들이 함부로 도로를 침범했다. 절벽의 경사만큼 골이 깊었고 깊은 골 사이로 맑고 시린 생명수가 넉넉히 흘렀다.


섬의 풍광에 빠진 것도 잠시, 섬을 한 바퀴 돌아 화물선이 정박한 항구로 향했다. 화물의 선적을 총괄하는 선사의 부장은 화물선을 오가며 현장을 지휘하느라 바빴다. 비쩍 마른 몸에 색안경과 군모를 쓴 부장은 마치 꼿꼿한 공무원처럼 보였다. 절박한 심정으로 화물선에 탑승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부장은 선선히 탑승을 허락했다. 숙소로 되돌아가 부지런히 짐을 챙겨 부장과 약속한 오후 4시에 화물선에 올랐다. 2천 톤급 배는 커다란 운동장만 한 화물칸을 고래처럼 입을 벌려 선적될 화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3층 높이의 화물칸에 설치된 계단을 올라야 객실로 향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화물칸이 거의 비어 었는데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실 2층 침상에는 이미 한 남자가 자리를 차지했다. 누군지 모를 여성과 스피커 폰으로 긴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창가 아래쪽 침상에 자리를 잡았고 함께 배를 탄 두 남자가 남은 자리로 각각 몸을 밀어 넣었다. 그 두 남성은 독도에 파견됐다가 포항의 본대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섬에서의 근무 기간은 통상 한 달이지만 날씨로 인해 두 달만에야 독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섬을 빠져나와 다시 섬에 갇힐 수 없어 화물선에 올라탔다고 했다. 가족과 지인들이 열두 시간이나 걸리는 배를 꼭 타야만 하느냐고 말렸지만 육지가 너무도 그리워 화물선을 탔다고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오후 5시에 출항 예정이던 배는 6시를 넘어 7시가 되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화물칸에는 섬에서 채취한 고로쇠를 싣는 화물차와 지게차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분주히 선적작업이 이루어졌다. 지루했고 배가 고팠다. 부장에게 잠시 편의점에 다녀와도 되겠는지 물었다. 부장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 저으며 곧 출항할 예정이니 내릴 수 없다고 했다. 선적이 계획된 화물의 양이 있고 능숙한 관리자라면 일정한 양의 화물을 싣는데 걸리는 소요 시간을 뻔히 알고 있을 테다. 그런데 승객을 출항 몇 시간 전에 미리 태워놓고 내리지도 못하게 하는 이유가 뭘까 의아했다. 탑승한 후 다섯 시간 반이 지난밤 9시 30분이 되어서야 배는 출항했다. 포항까지 항해는 12 시간이 소요될 예정이다. 비행기로 12 시간이면 인천에서 런던 또는 LA 공항까지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선원이 냉온수기 위치를 알려주며 컵라면을 먹을 수 있다고 알려줬지만 우린 컵라면이 없었다. 섬에서 사 온 빵과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관 속에 누웠다.


쏟아지는 눈은 물 위에서 산화했고 파도는 더 높이 솟구쳤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까무룩 잠이 들었지만 지진이 난 듯한 떨림과 기관총을 쏘는 듯한 타격음에 놀라 잠에서 깼다. 소음의 근원은 개별 침상마다 설치된 문짝이었다. 침상에 누워 미닫이 문을 닫으면 다른 승객과 완전히 분리되는 점은 좋았으나 목재 문짝의 틈이 벌어져 문과 문틀이 부딪히며 심하게 떨렸다. 높은 파도에 흔들리는 배는 마치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시외버스에 탄 듯했다. 배의 요동과 전쟁터 같은 소음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출발 전 미리 먹어둔 멀미약 덕분에 뱃멀미 증세는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손에 쥔 스마트폰이 유일한 위안이었는데 어느 순간 통신이 끊겼다. 배가 어디쯤 지나는지 언제 도착하는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GPS 신호는 엉뚱하게도 울릉도와 대마도 사이를 가리켰다. 폭풍으로 배가 목적지를 일본으로 변경한 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공상에 잠겼다. 다시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결로로 인해 창과 벽에서 흘러내린 습기가 옷과 이불을 적셨다. 옆에 세워둔 텀블러가 배의 흔들림에 쓰러져 함부로 굴러다녔다. 배에서의 시간은 느리고 더디게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창밖이 뿌옇게 밝아왔다. 덜컹이던 문짝의 소음은 어느새 잠잠했다. 좁은 복도를 지나 갑판으로 나갔더니 동승객들이 담배를 피우며 서있었다. 갑판 위에는 눈이 두텁게 얼어있었고 난간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고드름 너머 멀리 육지가 보였다. 포항 영일만이다. 느린 배는 육지를 코 앞에 두고도 한 시간이 지나서야 항구에 도착했다. 저동항에서 배를 탄지 고박 18 시간 만에 다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생애 가장 길고 먼 여행은 포항에서 다시 차를 달려 그날 밤 서울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끝났다. 어머니는 수술을 잘 마치고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겼다는 소식이 들렸다. 회복의 시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자령 설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