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눈비를 맞으며 오랜 세월을 이겨낸 모과나무처럼 어언 천 년을 가는 정원이 되라는 의미다. 사유원思惟園에서 가장 경이로운 공간인 이곳에 썩 어울리는 이름이다. 수령 300년 이상의 모과나무 108그루가 도열한 정원으로 입장하는 길은 범상치 않다. 포르투갈의 세계적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지은 소요헌消遙軒에 들렀다가 초하루길을 걸어 내려오면 두 개의 석상이 입구를 지키는 연회색의 긴 담이 막아선다. 저 담 뒤에는 뭐가 있을까. 조경가 정영선은 방문객의 궁금증과 기대감을 증폭시키도록 정원의 입구부터 치밀하게 설계했다. 담 뒤로 돌아 들어가면 수십 미터의 벽을 따라 길고 좁은 복도가 이어진다. 방문객은 자신의 발걸음이 내는 공명음을 들으며 걷는다. 복도 끝에 심어진 모과나무 한 그루와 좁은 하늘을 보며 걷는다. 자신의 심장 소리와도 같고 오래된 모과나무의 헛기침 소리와도 같은 울림을 견디며 걷는다. 복도 끝에 다다라 왼편 열린 공간으로 나서자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졌다.
風雪幾千年. 끝없이 펼쳐진 언덕 위에 모과나무 108 그루가 치밀하게 도열했다. 뿌리에서 올라온 밑동은 2 미터가 넘도록 굵으며 줄기에서 비롯된 잔가지가 시원하고 빼곡하게 뻗었다. 나뭇가지 끝에는 더러 샛노란 모과 열매가 달렸다. 숲의 정령들이 나무로 변해 사유원을 지키는 장수처럼 큰 사찰 입구에서 험악한 표정으로 방문객을 내려다보는 사천왕처럼 압도적인 모습으로 정원을 점령한 채 서있다. 풍설기천년에서 앞으로 펼쳐질 야외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목재로 된 평상 형태의 무대 이름은 농월대弄月臺. 농월대에 올라 연당 채당 회당 세 연못에 비친 모과나무 언덕을 바라보니 또다른 모습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일본 남부의 신비로운 섬 야쿠시마에서 미야노우라다케를 오르다 만난 원숭이들의 늪지 花之江河를 닮았다. 하지만 야쿠시마는 수천 년 된 나무들이 지키는 해발 이천 미터에 가까운 천혜의 숲인데 반해 사유원은 인간의 노동력으로 가꾼 인공의 수목원이라는 지점이 다르다.
나이 든 모과나무들이 사유원에 자리잡기까지는 그럴만한 배경이 있다. 경북 김천 출신의 태창철강 유재성 회장(75)은 일본으로 밀수출될 위기에 처한 300 년 묵은 모과나무 네 그루를 우연한 기회에 사들였다. 모과나무 분재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일제강점기부터 뽑혀 일본으로 건너간 나무들은 풍토가 달라 얼마 살지 못한 채 죽었다. 그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유 회장은 전국 각지의 오래된 모과나무들을 값을 넉넉히 치르고 사들였다. 사들인 나무들은 전문가의 손을 통해 잘 가꾸고 다듬어져 지금의 풍설기천년을 이뤘다. 이는 축구장 45 개 규모의 사유원을 탄생시킨 계기가 됐다.
사유원은 오랜 세월 유 회장과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의 손을 빌어 탄생했다. 조경가 정영선과 김현희, 원예가 키와기시 마츠노부, 건축가 승효상과 알바로 시자, 한옥건축가 박창열, 조명디자이너 고기영, 서예가 웨이랑 등 다시 한 자리에 모으기 어려워 보이는 세계적인 전문가들의 협업으로 지어졌으며 공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치허문을 지나 소요헌 팔공청향대 별유동천 농금대 금오유현대 소대 사담 한유시경 조사 명정 현암 내심낙원 유원 사야정 첨단 오당 와사 측소 등 사유원 내에 자리한 건축물과 정원들은 저마다 이유 있는 이름을 가진 걸작들이다. 이 아름다운 작품들을 짧은 글로 축약해낼 글재주가 나에게는 없다. 세계적인 정원을 자동차로 불과 30 분 거리에 갈 수 있는 곳에 산다는 건 내게 축복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곳을 찾아 변하는 풍광을 즐겨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