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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 박하림 Oct 18. 2020

운명은

있는 걸까요








요즘 나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게 삶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요. 그건 아마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서 그런 것 같아요.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언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자신의 옛 연인의 눈을 직시했던 것처럼 죽음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요.


우주에서 블랙홀을 만난다는 건 그 우주로부터 영영 사라진다는 걸 의미하니까 아마 블랙홀을 만나는 것이 죽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죠. 블랙홀은 우주에 부유하는 다른 어떤 실체보다도 강력한 중력을 갖잖아요. 또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들어있죠. 모든 시간, 모든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빅뱅이 발생하고 또 다른 우주가 탄생하죠.


죽음도 그런 의미를 갖는 게 아닐까, 죽음은 삶이라는 우주에 떠다니는 블랙홀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속에 무엇이 있을지 삶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죽음의 관점에서 삶을 보면 삶의 모든 것, 모든 순간들이 빙하 속의 화석들처럼 펼쳐질 거에요.


죽음은 어쩌면 그저 하나의 문에 불과한지도 몰라요. 언젠가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속 한 인물이 자신의 연인에게 한 말처럼. 그가 미칠 듯이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도 권총 자살을 할 수 있었던 건 죽음이란 그저 하나의 문에 불과하고 매일 아침 우리가 눈을 뜨듯이 또다시 태어나게 마련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에요. 그 확신이 옳건 그르건 말이죠.


뜨개질을 하다 내 방 안에서부터 문지방을 건너 바깥으로 드리워진 빨간색 실 한 가닥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열린 문에 불과하고, 인연은 저 붉은 실처럼 문지방을 가뿐히 넘어서는 무언가가 아닐까. 하나의 방에서 날 것 그대로의 실을 꼬아 실 한 타래를 엮고, 그 실들이 다시 만나 엮이기도 하고 떠지기도 하고 땋아지기도 해서 또다른 실타래, 혹은 편물, 혹은 달리 쓰임이 있는 끈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 쓰임이 다해 마모가 되면 올이

 풀리거나 찢어지거나 먼지가 되어 바닥에 떨어지겠지만 한 번 질량을 가진 것이 영영 질량을 잃는 일은 없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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