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엽서시

쑥부쟁이

by 엽서시

시가 멎었을 때

나는 죽어야 한다


어느 날의 퇴근길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랄맞은 출근과 지랄맞은 오전…

지랄맞은 말과 지랄맞은 일…

지랄맞은…


지하철에는 나의 하루가 또 지랄맞은 수백의 하루와 함께 흔들린다

덜컹덜컹덜컹


바라는 것이라고는 그저 눈앞에 자리가 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얼른 일어나야 한다)

에스컬레이터 앞의 사람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것,

(대체 왜 여기서 이렇게 꾸물럭대는지, 참)


끊어야겠다고 수없이 다짐한 맥주캔을 또 사들고 들어가는,

퇴근길, 집 앞의 화단, 그리고 쑥부쟁이…

쑥부쟁이!


쑥부쟁이가 끌어올려낸, 그리고 피워낸

그 꽃 앞에서 나는 다짐한다


시가 멎었을 때

나는 죽어야 한다


이러한 다짐 없이 쑥부쟁이는 꽃을 피워낼 수 없다

이러한 다짐으로 쑥부쟁이는,

이렇게도 푸른 꽃을 피워냈다,

검은 흙, 노란 불빛,

쑥부쟁이의 세상에는 없던 빛깔을,

쑥부쟁이는 이렇게도 피워냈다


그리고 나는,

쑥부쟁이 앞에서, 그저…

나도 쓸 수 있을까, 나도 그런, 세상에 없던 빛깔을, 과연 쓸 수 있을까, 쑥부쟁이야…


노란 불빛 아래

쑥부쟁이가 웃는다 푸른 빛으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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