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팬티를 진작 버렸어야 했다.

-잡job다한 소설(小說)-

by 성실한 베짱이

아... 젠장. 아프다. 다른 팬티를 입었어야 했다. 하필 오늘 아침 샤워 후 손에 잡힌 게 그 팬티다. 이 팬티만 입으면 양 허벅지 사이 접히는 부분에 팬티가 파고든다. 누가 그곳을 꼬집는 느낌이다. 걸을 때마다 따끔따끔하다. 불편하고 불쾌하다. 소리를 지를 정도는 아니지만 기분 나쁜 자극이 그곳에서 올라온다. 이 팬티를 사는 게 아니었다.

팬티에 살이 끼어 아팠던 그날 인사이동이 있었다. 최종 보스가 바뀌면서 그의 조직에 새 바람이 불었다. 새 바람이라고 해봤자 밑에 있던 사람이 위로 한 계단씩 올라간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분위기가 나기는 난다고 그는 생각했다. 10명 남짓한 그의 조직도 새 바람이라면 새 바람이 불었다.


한 임원이 날아가고, 그 자리를 아래에서 채웠다. 그랬더니 자리가 나고, 채우니 또 자리가 났다. 단 한 명이 빠졌지만 5명이 승진했다. 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경제적인가!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매년 위에서 한 명씩 나간다면 모든 부서원이 행복해지는데 5년이면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행복만 찾아온 건 아니었다. 그나마 유연했던 임원이 나가고 제일 권위적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인간적이고 리더십 있는 팀장이 가고 인간적인 면이 부족한 워커홀릭이 왔다. 그는 자신과는 제일 상성이 안 좋은 2명이 왔다고 생각했다. 플러스 펜으로 이면지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린 원이 많아질수록 회오리를 닮아갔다.

팀원도 2명 나가고 2명이 들어왔다. 팀장 라인 한 명, 본부장 라인 한 명이 들어왔다. 우리 부서에는 라인 같은 건 없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임원과 팀장이 자기 라인 사람을 한 명씩 데리고 왔다는 걸 모르는 바보가 어디 있겠냐며 코웃음 쳤다.

는 업무분장이 있었던 날도 그 팬티를 입었다. 일진이 안 좋은 날엔 왜 인지 모르겠지만 꼭 그 팬티를 입는다. 오늘은 꼭 버려야겠다 생각했다. 하나씩이라도 버려야 다시 입지 않지. 그럼 일진이 안 좋은 날도 없을 것 아닌가.


팬티가 그의 살을 집어 누르는 만큼 업무분장 회의는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2시간이 넘는 회의를 빙자한 팀장의 원맨쇼 시간 내내 팬티가 불편했다. 팀장의 말이 불편했고 그에게 넘어오는 일이 불편했다. 불편함은 심장을 쥐어짜고 혈액은 빠르게 얼굴로 몰렸다. 혈액이 몰리는 만큼 심장도 더 빠르게 뛰었다. 동일한 숫자의 사람이 나가고 동일한 숫자의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의 업무는 늘어나 있었다.

은 이렇게 말했다.


잡무는 기존에 하던 대로 하세요. 나간 사람들이 맡고 있던 잡무도 기존 사람들이 주로 가져가세요.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잡무를 몰아주는 건 안됩니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먼저 나갈 테니 일을 먼저 받으세요. 다 경험해 봐야지요.


그가 이 부서에 왔던 건 3년 전이었다. 잡무는 그에게 몰렸다. 1년 후 그 잡무를 모아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몰아주었다. 그리고 1년 후 또 새로 들어온 사람이 잡무를 맡았다. 잡무란 잡무를 싹 몰아서 준 것은 아니었지만 주요(?) 잡무는 이런 식으로 돌고 돌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그 일이 적응을 도와준다는 미명 하에 돌아갔다.

그러나 팀장이 바뀌었고, 어떤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가야 할 잡무가 가지 않았다. 기존에 있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일들만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4년 차인 그에게 잡무가 주어졌다. 업무 분장 전 그는 생각했다. 이제는 소위 말하는 뽀대 나는 일을 맡아보겠다고. 책임은 크지만 조금 더 자율적이고 완결성 있는 기획 업무를 맡아보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건 루틴 하게 돌아가는 단순한 업무처리뿐이었다. 이미 3년 전에 죽어라 했던 일이 돌고 돌아 4년 차인 자신에게 돌아왔다. 다시 한번 심장이 조여왔다. 명치끝이 묵직해졌고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 싸대기를 갈기고 싶었다. 그러나 이성의 끈을 잡고 있어서였는지, 강자에게는 약한 타고난 그의 본능 때문인지 조히 자리를 지켰다.

그는 이 모든 게 팬티 때문인 것 같았다. 트렁크형 사각팬티가 왠지 꼰대스러워 보여 드로즈를 사러 마트에 갔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적당한 가격의 드로즈를 그냥 6개 사버렸다. 처음 입었던 순간 그의 살을 꼬집었지만 몇 번 빨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뻣뻣해서 그런 거니 빨리 입어 부드럽게 만들어야겠다고. 6개월이 지난 지금 그 팬티 6장은 그를 계속 꼬집고 있다. 버리자니 아까웠고, 내 선택을 부정하는 것 같아 망설였다. 꼬집히는 순간 이 망할 팬티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집에 들어오는 순간 까맣게 잊는다. 다시 빨래 바구니에 넣고 세탁기를 지나 속옷 서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팬티는 다시 내 살을 꼬집는다.

업무 분장이 있던 날 그는 이 팬티를 버리러 밖으로 나갔다. 팬티 6장이 든 쓰레기봉투는 헐렁했다. 엄마가 봤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거라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쓰레기봉투를 놓고 뒤돌아섰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팀장을 찾아갔다.

팀장님. 어제 업무 분장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제 업무 분장은 공정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뭐가 문제인데?

일단 일이 몇 사람에게 편중되어 있습니다. 업무량으로 보면 기존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일이 몰려 있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의 일은 적습니다. 신입사원도 아니고 직장생활을 10년 가까이 한 전입 사원에게 일을 적게 주어야 할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특별한 전문성을 가지고 일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이제 업무가 변경된 사람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자는 건데! 무슨 말을 그렇게 이기적으로 하나!

약간의 배려를 해줄 수는 있겠죠. 숙련도가 떨어지니 일을 조금 줄여주는 게 맞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배려가 목적이라면 주요 업무의 양을 줄이고 위험성이 적고 단순한 업무 위주로 배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단순한 업무들을 주지 않는 쪽으로 배려해 주시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먼저 나가는 사람이 먼저 경험을 해봐야 하기 때문에 잡무를 맡아야 한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팀장은 당황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직장생활 25년 동안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손에 잡은 볼펜을 꽉 쥐어 보았다. 태연한 척하고 싶었지만 눈에 담긴 살기는 숨길 수 없었다. 팀장은 그가 싫어졌다. 싸가지 없고 건방진 녀석이라 생각했다. 감히 내가 내린 결정에 반대를 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대놓고.

반드시 내년에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게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전문성을 가지고 일하는 게 아니라고? 일에 대한 자부심도 없고 사명감도 없고 옆 동료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저런 새끼는 회사에 암적인 존재다. 볼 것도 없다. 회사보다 자기 잇속을 먼저 챙길 게 뻔하다. 저런 새끼는 당장 잘라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한이다. 도대체 회사를 뭐라 생각하는 거야. 무조건 회사의 이익을 우선으로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해야 하는 게 아닌가? 건방진 새끼.

장은 생각해 볼 테니, 일단 자리로 돌아가 있으라고 했다.

팀장에게 가진 생각을 쏟아낸 그는 가슴이 후련했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4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부모님께 말대답한 것도 손에 꼽았다. 그런 그가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팀장에게 대들었다. 대들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불공정함에 대해 말했다. 최근에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생각하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리로 돌아갔다.


먼저 나가는 사람이 먼저 경험을 해봐야 하기 때문에 잡무를 맡아야 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논리라면 업무 적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잡무 먼저 시작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으로 들어왔지만 애써 지워버렸다. 지워버린 그 자리를 역시 어제 팬티를 잘 버렸다는 생각으로 얼른 채워버렸다. 불쾌감을 주는 팬티를 6개월이나 끌어안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미련했는지 자책했다. 기분 좋은 자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