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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Oct 04. 2019

바른 말 대신 묻는다. "지금 네 마음은 어떠니?

정혜신 ㅣ 당신이 옳다

욕보다 폭력적인 것은 '바른말'일 수 있다. 원하지 않는 충고나 조언은 사람의 감정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다. 남의 감정에 대한 평가나 판단은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 몰 수도 있다. 지금까지 난 이런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가감 없이. 그것도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정혜신은 거리의 의사라고 불린다. 고문치유 모임, 쌍용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유족 등 지독한 마음의 상처로 죽음으로까지 내몰리는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런 그녀가 당신의 마음은 항상 옳다고 말한다. 그리고 요즘 마음은 어떠냐며 나에게 질문한다.




ㅣ공감,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름 공감이라 생각하며 아내에게 했던 말, 아이에게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 자신이 너무 힘들고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는 아내에게 난 "나도 힘들다."라고 말했다. 나도 힘드니 더 이상 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그녀의 아픔을 별것 아닌 걸로 내 멋대로 판단해 버렸다. "나보고 도대체 어쩌란 말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노력해봐!"라는 같잖은 충고를 해댔다.


'힘들었겠다. 그래... 얼마나 힘드니... 아이고 저런. 나는 상상조차 안되네.'라고 공감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언뜻 보면 공감을 하는 것 같지만 난 그녀의 감정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온 체중을 실어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 찬찬히 알아보지 않았다. 체중을 싣기는커녕 그녀의 마음이 궁금하지도 않았던 듯하다. 직접 바라보는 것이 무서웠고, 내가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내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다는 막강한 핑계가 있었다.


정혜신은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너는 항상 옳다. 너의 마음은 항상 옳다. 그리고 사람을 죽음 직전에서 다시 삶으로 끌어올 수 있는, 심리적으로 죽기 직전의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심리적 CPR'에 대해서 말한다. 바로 '공감'이다.


1. 공감은, 세상사에서 자신의 이야기로 초점을 돌릴 때 시작한다.
2. 공감은, 외형이 아닌 존재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3. 공감은, 그 존재가 느끼는 감정에 집중하고 알고 싶어 묻는 것이다.
4. 공감은, 현재의 감정을 먼저 알아주어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과 자신의 속마음을 하나하나 만져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5. 공감은, '행동이나 생각'은 '마음'과는 별개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분노를 말할 수 있으면 분노로 폭발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옳다.


누군가의 존재, 그 존재가 느끼는 감정을 알고 싶어 하고, 묻는 과정이 공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감정들을 마음대로 판단해 버린다. 마음은 항상 옳은 것임에도 슬픔, 화, 분노의 감정은 나쁜 것이라 스스로 규정하고 남들에게도 그 잣대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아이가 이러한 감정을 내비치기만 해도 그러면 안 된다고, 좋은 생각을 하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반사적으로 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왜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없다. 그저 나쁜 감정이라 판단해 버리고 없애버리려고만 한다.


정혜신은 슬퍼하는 걸 나쁘게 보지만 않아도 누군가의 상처를 말하고 듣는 시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유적인 경험이 된다고 말한다. 슬픔뿐만이 아니다. 짜증, 분노, 화와 같은 감정도 언제나 옳다. 아내가, 아이들이 그런 감정을 가지고 이를 표현할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그저 눈을 맞추고, 온몸으로 그 이야기를 들으면 된다. 그럴 만한 이유는 반드시 있기에 그 이유를 알아가면 된다. 그게 바로 공감이었다. 기계적으로 내뱉는 '힘들었겠구나...'가 공감이 아니었다.


정혜신이 말하는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 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난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 아니. 난 그런 사람이고 싶다. 작가는 누구나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ㅣ내 상처를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 둘째는 아프다. 여러 병이 있고 그로 인해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다 풀어낼 수는 없지만 이로 인해 내 마음엔 상처가 있다. 아이가 아플까 불안하다. 주변의 시선이 불편하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냐는 원망이 가슴에 가득하고, 왜 우리가 무시당해야 하는지 피해 의식이 가득하다. 이러한 무수한 상처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야기하기 힘들다. 정혜신은 그 이유를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현재 느끼고 있는 불안을 알아준다는 건 내 존재 자체에 초 집중하고 주목하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내 존재를 조건 없이 그대로 다 수용해 주는 사람이란 것이다.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어야 사람은 비로소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야 자기 상처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p155'


사람은 자신의 지난날 상처 때문에 아프지 않다. 자신의 흉터를 드러내는 것 자체를 그다지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별것 아닌 걸로 치부되어 버리거나, 무시당해 버리거나,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가 느끼는 감정이 외면당해 버렸을 때 아프고, 그것이 두려운 거다. 정혜신의 말처럼 난 그런 것들이 두려웠던 거다. 내 상처를 이야기하고 싶었고, 이를 통해 내 존재를 드러내고, 내 감정을 드러내고 싶었다. 날 안전하게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정혜신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오해는 누군가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 마음에 대해 자세히 묻는 것'은 부담을 주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라 말한다. 정 반대다. 가장 절박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다. 나도 그랬다.




ㅣ나를 치유하는 공감


정혜신은 공감을 문을 여는 것에 비유한다. 존재로서의 '나'는 방안에 있다. 이 방으로 들어가 그 존재를 오롯이 마주하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 한다. 그 문이 감정이다. 존재의 마음 즉, 그가 느끼는 감정이 바로 문이다. 이 문을 열기 위해서는 문고리를 돌려야 한다. 이 문고리를 돌리는 일이 바로 공감이다.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의 구석구석을 바라본다. 천천히 그리고 환하게 살펴본다. 그러다 그 사람의 어떤 한 측면이 조금씩 보이는 상태에 다다른다. 그리고 존재 자체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간다. 그러면서 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또렷이 보게 된다. 이런 공감의 과정을 통해 '너'뿐 만이 아니라 '나'도 만나게 된다. 이것이 공감이다. 남을 치유함과 동시에 나 자신도 치유하는 상호 교류의 감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상대의 말은 중간에 끊지 않고 계속해서 기분을 맞춰주고 그저 수긍해주고 받아주는 것이 공감이라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정혜신은 이는 공감이 아니라 감정노동이라고 말한다. '힘들지만 조금 더 노력해서 공감하면 우리의 관계가 더 나아지겠지...'라는 마음은 사람을 금방 지치게 한다. 이는 사람의 감정을 소모하기만 한다. 채워주지 않는다. 진정한 공감은 나 자신을 먼저 챙기는 데서 비롯된다.


공감은 내 등골을 빼가며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이 아니다. 그 방식으론 상대를 끝까지 부축해 낼 수 없다. 둘 다 늪에 빠진다. 공감은 너를 공감하기 위해 나를 소홀히 하거나 억압하지 않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건 자신까지 무겁고 복잡해지다가 마침내 둘 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p121




ㅣ일상의 외주화


둘째가 아프면 그 피해는 오롯이 첫째에게 간다. 둘째에게 온갖 신경이 쏠리고 첫째는 엄마, 아빠가 언제든 자신을 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둘째의 아픔이 자신 때문이라 생각한다. 엄마 아빠가 힘든 것도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아이로서 응당 누려야 하는 욕구들이 충족되지 못한다. 되려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주변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폭력이다. 그리고 이 폭력을 통해 엄마를 시험한다. 자신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여기어 더 많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생긴다. 바로 엄마다. 둘째가 아픈 것도 내 탓인 것만 같다. 첫째가 보이는 폭력 성향도 내 탓이다. 게다가 첫째가 자신을 자꾸만 시험한다. 자신을 괴롭힌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첫째가 미워진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아이가 자꾸만 미워지는 이 감정. 그리고 그 감정과 붙어 있는 죄책감. 이런 감정은 혼자 감당하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에 매일매일 노출된다. 여기서 정혜신이 말하는 바로 그 '한 사람'이 필요하다.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 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 주는 사람'말이다. 아내는 그런 사람으로 나를 택하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난 이 요청을 그냥 넘겨버렸다. 난 상담을 권했다. 가족 치료를 해보자 했다. 정신과에 가서 진료를 받아보자고 말했다.

정혜신은 이를 일상의 외주화라 했다. '일상의 회복이나 일상의 교감에 집중하지 않고 전문가적 치유에만 기대려는 행위, 그게 일상의 외주화라 저자는 말한다. 난 내 스스로 무엇 하나 해보려 하지 않고 내 일상을 외주 주려 했다. 편하게 누군가가 나 대신 이 '병'을 고쳐 줄 거라 생각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다른 전문가라 칭하는 사람에게 기대어 병이 낫길 기대했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상담 센터에 다녔다. 상담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 가족의 관계를 회복시켜 준 것, 아이의 응어리진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준 것,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 것은 바로 함께 했던 시간이었다. 아이의 손을 맞잡고 지하철을 타고 상담 센터로 갔던 시간. 상담이 끝나고 떡볶이를 먹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던 시간. 상담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온몸을 던져 아이에게 집중하여 이야기했던 시간. 바로 그 시간들이 지금의 단단한 우리 가족을 만들었다.




ㅣ더 이상 '바른말'은 필요 없다.


정혜신은 공감적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군가가 느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태도. 그 마음을 함부로 규정하고 판단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상대의 마음에 집중하고 알고 싶어 하는 태도. 그 마음을 알 때까지 물어보고 끝까지 이해하려 애쓰는 태도.


친구가 너무 미워 때리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그러면 안 돼!"라고 충고를 하고 아이를 평가하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가 그런 마음을 가진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란 생각을 가장 먼저 하지 못했다. 얼마나 속상했으면 이런 생각까지 했을까라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화난 감정을 나에게 말해주는 일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이의 이러한 마음을 받아 주면 아이가 바른길로 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나는 아이를 바로 잡아해 했다. 그런 의무가 있었다. 아이의 존재 자체, 그 존재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말과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아이에게 충고하고 조언했을 뿐이다


아이는 개별적인 존재이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아이를 위해서 충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교육이라는 거죽을 쓴 폭력을 나는 아이에게 행사하고 있었다.


공감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이다. 그 사이에 충고를 하고, 조언을 하고, 평가를 하고, 판단을 해버리면 교류는 일어나지 않는다.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의 충고나 조언을 누가 따르겠는가? 내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그 누군가의 평가나 판단이 나에게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정혜신은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만 배쯤은 더 많이 보았다고 한다.




절대적으로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부모가 뒤에 있다는 걸 아는 딸은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모든 경우의 수를 늘어놓고 합리적으로 고민하고 판단할 수 있다. p233
사람은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 p239




바른 말 대신


"넌 누구니? 지금 네 마음은 어떤 거니"



라고 묻는 그 한 사람이 이제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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