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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밍 Feb 12. 2016

내일, 혹은 내 일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처럼 일하는 사람들

직장인 5년차에 접어들면서 '일'이라는 것에 대해 부쩍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유달리 이직률이 높다는 업계 사정쯤은 들어올 때부터 알고 있었고, 아직 업계가 생긴 지 얼마 안된 특성 탓에 '정년'이라는 단어가 생소한 것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그렇지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라서일까. 내 인생을 지금 직장에 쏟아부으며 은퇴를 꿈꾸는 것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래서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유독 늘어났다.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지시에 따른 일이 더 많지만, 그래도 '적당히 자유로운' 환경과 '적당한 업무 강도'를 버티다보면 매월 25일에는 따박따박 통장에 숫자가 찍혔다. 그마저도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각종 금융기관의 이름으로 '퍼가요' 될지언정, 그래도 기댈 곳이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아침마다 이불을 걷어내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혹은, 좀더 어른이 되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지금은 화장실 한 켠만 내 집일 뿐이지만 좀더 돈을 모으면 부엌도, 거실도 은행 것이 아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발판 삼아 출근을 준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어쨌든 5년간,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을 한 회사에서 오롯이 보내며 얻은 결론은, 내가 받는 이 돈은 내 시간에 대한 대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고민은 다시 돌아왔다. 지금 회사를 떠나면, 명함 위에 찍힌 이 회사 로고와 직책 몇 가지를 떼고 정말 내 이름 세 글자만 남긴다면 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지금 내 눈 앞에서 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사람은, 내가 'XX회사 사람'이 아닌 '박 아무개'라는 인간만 남게 되어도 지금처럼 웃으며 이야기를 할까. 그런 생각은 회사에서 내가 맡은 업무가 이른바 '갑질'에 가까워질수록 더 심해졌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내가 속한 회사의 돈이었고, 내가 속한 회사가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였다.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난 뭘 한거지?


지금 만약 회사를 관둔다면.... 아직은 젊으니까 이것저것 노동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도 누군가가 고용하는 형태로. 혹은 약간의 재주를 살려 번역을 하거나, 그것도 어렵다면 뭔가...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회사 소속이 아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그렇지만 당장 머리를 굴려봐도 기술이 없는 상경계 출신 직장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럴 때 만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 제현주 (2015)"라는 다소 장황한 제목을 달고 있는데, 결코 얇지 않은 이 책을 요약해 보자면 "부모 세대처럼 한 직장에서 평생 일하면 저절로 안정적인 삶이 따라오는 그런 세상은 이미 끝났다. 회사에 기대는 대신,  한 가지 직장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스스로' 일하는 세상이 온다." 여기에 저자 본인이 운영하고 있는 협동조합의 노동 방식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글쓴이는 '금수저' 스펙이 틀림없다. 지금은 강원도 산골에서 비즈니스에 관련된 칼럼도 쓰고 번역 일을 하면서 '소소하게' 먹고 산다지만, 그런 삶을 택하기 이전 그녀는 일반 사람은 이름조차 낯설 외국계 투자은행과 컨설팅펌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하던 억대연봉 (이라고 저자가 스스로 밝히진 않았지만 직장명을 통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자였다. 그러니 일을 그만두고도 '프리랜서'로 먹고 살았겠지....하는 비아냥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일에 대한 환경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스스로 자기 삶을 바꾸었다는 건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을 터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프리랜서가 되어 자유로운 영혼이 되겠다고 회사를 뛰쳐나오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래서 그녀가 이야기하는 건, 생활협동조합 비슷한 '노동의 생활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이었다. 현재 그 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너댓명이 있는데, 모두 본업이 있음에도 퇴근 후 혹은 주말 시간을 이용해서 제 2의 일을 하고, 거기서 나온 수익금은 참여한 사람들이 나누어 갖는 형태의 회사였다. 그녀는 일반적인 직장인 (이라 쓰고 현대판 노예..) 의 삶이 이렇게 변한 것은 주식회사의 등장과 자본주의의 영향이 무엇보다 크다고 보고, 돈(=주식)이 많은 순서대로 발언권이 많은 주식회사 대신 협동조합을 설립한다. 그 곳에서는 모두가 일에 대한 가치는 공유하는 대신 계급체계나 지시 없이 모두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그리고 수익을 발생시키고 그 보상을 나눠갖는다.


얼핏 공산주의도 아닌 것이 특이한 구조다, 라고 보이겠지만 나름대로 기업의 형태 (주식회사만이 기업은 아니다.) 를 갖추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기업의 제 1 목표인 '이윤 창출' (경영학 교과서 맨 첫페이지에 나온다.) 도 추구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을 가장 큰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다. 그건 내가 한동안 잊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취업할 때야 이 회사는 무슨무슨 일을 하니 제 인생의 목표와 맞는 것 같고 고객을 위해 이러이러한 일도 해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큰소리를 쳤지만 그 이후 주어진 건 KPI라는 숫자였고 그것은 인센티브와 월급으로 직결됐다. 잊어서는 안될 것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그렇게 '현실도피'할 수 있는 독서 시간이어서 즐거웠지만, 결국 나는 다시 오늘도 덜 깬 눈을 비비며 자동적으로 사원증을 둘러매고 회사로 향한다. 하지만, 적어도 회사 밖의 내게는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다. 회사원과는 별개로, 내 이름을 걸고 일할 수 있는 일, 무엇보다 이윤 창출과 사회에 대한 가치 창출이 모두 가능한 일. 당장 달라지는 것이 없더라도, 의식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믿는다.


오늘의 일에 고민이 들 때 한 번쯤 책장을 넘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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