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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밍 Jul 22. 2020

왜 중요한 이야기는 꼭 만나야 들을 수 있을까

언택트 시대의 컨택트, SNS가 전하지 못하는 이야기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직장까지 다니다보니 좀처럼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 나지 않았다. 나는 혼자 있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에너지가 충전되는 '가슴형' 인간이라,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도 부대끼는 시간이 절실한데도 한동안 집과 회사만 오가느라 배터리가 방전된 것처럼 기운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맡기기도 힘든 상황에 데리고 밖에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아 결국 집에 사람들을 초대했다. 결혼 전부터 손바닥처럼 좁은 원룸에 친구들을 그렇게도 초대했으니 (그 때 와준 친구들에게는 제대로 대접하지 못해 미안하기도 하지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내 친구들 뿐만 아니라 남편 친구들까지 시도때도 없이 우리 집에 드나들었고, 동네 사랑방마냥 우리 집에는 늘 '이모'와 '삼촌'들이 오가곤 했다. 때로는 맛있는 디저트와 와인, 때로는 장난감을 한아름 안고 방문해준 친구들에게는 성심성의껏 무언가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놓곤 했고, 그렇게 조금이나마 다른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시간이 내게는 참 단비같았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한동안 친구들의 방문이 뚝 끊겼다. 나는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다들 어린 아이가 있는 집에 섣불리 방문했다가 혹시라도 감염되면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모두들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켰다. 아쉬웠지만 안전과 건강이 제일이니 어쩔 수 없었고 그렇게 몇 달이 흘러 조금씩 제한적이나마, 마스크를 쓰고서라도 다시 친구들이 집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늘 오는 친구들도 있지만 더러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가 (SNS에서만 소식을 서로 주고받던) 오히려 외부 활동이 줄어들어 시간이 생겼다며 우리 집을 찾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몇달, 몇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마주한 친구들은 그간의 간극을 메우려 여러 가지 이야기를 쏟아냈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인생에서 많은 것이 변화하는 시기인만큼, 직장, 연애, 결혼, 육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들을 꺼내놓다보면 이야깃거리가 끊일 걱정은 별로 없다. 하물며 특별한 삶의 이벤트가 없더라도 서른이 지나는 순간 이상하게 몸은 갑자기 늙어가는 신호라도 읽어낸 양 여기저기 고장나기 시작해서, 자잘하게 병원을 드나드는 친구들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모든 이야기들은 그, 또는 그녀들의 SNS에서는 일절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A는 10년 가까이 학교 친구이자 일을 함께 하며 동고동락한 '남사친'이 결혼을 준비한다는 얘기에 세상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 같아서 너무나 힘들었다며 그간의 심경을 토로했고 (그건 더이상 남사친이 아니야), 

B는 그 새 둘째를 임신하고 친정 부모님과 합가하고 일을 옮기면서 폭풍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C는 코로나 직전 결혼식만 올렸는데 해외에 살던 배우자가 차마 짐을 정리하지 못한 새 입국금지를 당해 이산가족처럼 살고 있었고,

D는 멀쩡하게 건강하던 가족이 갑자기 암 3기 진단을 받아 수술하고 항암치료를 하고 있었고,

E는 임신을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아서 고민 끝에 병원을 다니다 문제가 해결되어 기뻐하고 있었고,

F는 신혼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집안일에 관심 없는 남편과 시가 문제 때문에 가슴을 끙끙 앓고 있었고, G는 경력단절에서 탈출해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정신이 없었고........


물론 자기 삶의 중요한 이벤트를 온라인에 가감없이 공유하는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은 활발하게 SNS와 메신저를 사용할지언정 정작 진짜 스스로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이야기(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부정적이거나 슬프거나 힘든 것일수록)들은 만나지 않고서는 풀어놓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인스타그램에는 여행 가서 눈보다 카메라에 먼저 담은 풍경, 실제 맛과는 상관없이 일단 맛있어 보이는 음식, 아이들의 웃는 모습만이 피드를 채우고 있지만 그 사진 한 장 뒷면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던가. 여행 짐 꾸리느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다 남편이랑 투닥거리고, 아이들은 끝없이 징징거리고, 그 와중에 혼자 열도 냈다가 짜증도 냈다가, 가려고 했던 식당은 문이 닫아서 급하게 다른 곳을 찾고, 장거리 운전을 하다가 아이가 토한 흔적 닦느라 난리가 나고.... 그런 일련의 과정은 전부 삭제한 채,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순간만 남긴 그 여행 사진. 마치 한없이 예쁘고 잘생긴 주인공들이 서로 마주보고 웃는 장면만 끝없이 늘어지는 드라마 같은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친구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나보다. 사진 속 친구들은 하나같이 좋은 곳에서 여유롭게 맛있는 것을 앞에 두고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막상 만나서 듣는 이야기들은 즐거운 이야기와 힘든 이야기가 롤러코스터처럼 오간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가 다른 사람의 삶과 생각을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혼자 살면서는 온전히 경험할 수 없는 타인의 경험과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친구들과의 수다는 온몸으로 듣고 느끼는 또다른 소설 읽기가 아닐까. 그들의 정제된 사진과 짧은 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생의 이야기는 왜 꼭 이렇게 얼굴을 맞대야만 들을 수 있는 걸까.


코로나가 조금 더 심했을 때 해외에 있는 친구들과 온라인 술모임을 한 적이 있다. 

각자 집에서 맥주 한 캔, 안주를 준비해두고 노트북 카메라를 향해 한참 근황을 떠들곤 했다. 메신저로 매일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인데도 직접 목소리를 듣고 움직이는 얼굴을 볼 때 우리는 조금 더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다. 텍스트가 주는 간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일할 때는 그래서 원격 근무를 선호하고, 전화보다는 메일과 메신저를 선호하지만,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친구 사이에서는 텍스트 대신 이미지와 목소리라도 보고 듣고 느끼고 싶었다.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이렇게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코로나 덕분에 오히려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자주, 지금보다 더 자주 '이모'와 '삼촌'들을 집에 초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쉽게 밖에서 사람들을 다같이 만나기 힘들기에, 두어명이라도 자그마한 우리 집에 초대해서 별 거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나누고 싶다. 혹 그게 여의치않다면, 가끔이라도 꼭 전화를 하고 함께 화상통화를 하면서 온라인 술모임이라도 해야지. 텍스트로 전하는 것보다, SNS에 올라오는 것보다도, 사람들의 삶은 훨씬 더 다양하고 훨씬 더 다이나믹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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