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를 빙자한 본격 필카 사진 자랑...
해방촌 카페에서 2019년의 마지막 노을을 찍었다. 한 해를 정리하기 위해 연차를 내고 찾아간 곳. 29살을 목전에 둔 나를 보고 남자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29살에 유럽여행을 갔다 온 게 신의 한 수였어. 그때 너가 유럽여행 가자고 억지 부릴 때 여행 전과 후에 쌓일 일들 때문에 가기 싫었었거든. 근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20대의 마지막을 유럽 여행으로 장식했다는 게 너무 좋더라고. 그러니 우리 올해 연말에 어디든 가자.'
그의 말에 단번에 뉴욕 타임스퀘어를 떠올렸다. 하지만 카운트다운 명당에 들어가기 위해선 기저귀를 차야 한다는 후기를 생각하고 금세 고개를 저었다. 대신 대만의 101 빌딩에서 하는 카운트다운 보러 가자. 아니면 최소한 보신각에라도 가자. 하는 말들을 했던 것 같다. 다가올 코로나의 습격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아직도 저 사진을 보면 그때의 행복이 그대로 느껴진다. 20대의 마지막을 어떤 곳에서 멋있게 장식할까 하며 설렜던 기억. 코로나로 전 세계가 나의 아홉수를 같이 겪어줄 줄은 꿈에도 몰랐지. 하하 이것 참 고마워서 어쩌나.
올해는 역대급으로 친구들을 못 만났다. 이렇게 길어질 줄 모르고 모든 약속을 '코로나 괜찮아지면 만나자'라는 말로 미뤘으니까. 남자 친구는 1년 동안 안 볼 수 없으니 1년 내내 우리는 야외 데이트를 했다. '데이트하는 날=가장 많이 걷는 날' 공식까지 생겼다. 걷는 걸 참 싫어했었는데 코로나가 걷기의 즐거움을 알려주었다. 하하 이거 참 또 고마워 죽겠네.
우리 집 현 막내(좌)와 구 막내(우). 꼬라지 담당들이다. 그래도 이 둘 때문에 제일 많이 웃는다. 우연히 마루에 나갔다가 평화로운 풍경에 까치발 들고 카메라를 가져왔다.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강아지들이 작은 인기척에도 얼마나 잘 깨는지. 카메라를 가져오기 전과 후에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 또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주 드문 확률을 뚫고 휴, 성공. 사진 찍자마자 내쉬었던 안도의 한숨이 기억난다.
필름 카메라를 꺼내서 키고, 조리개 값을 조정하다 보면 아무래도 스마트폰에 비해 사진을 찍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인지 필름 사진을 보면 사진을 찍었던 때의 분위기나 기분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것이 내가 필름 카메라를 사랑하는 100가지 이유 중 하나다. 사진을 찍은 지 거진 8개월이 지났는데도 그날의 행복을 선연하게 전달해 끝내 미소 짓게 만드니까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 집의 또 다른 풍경. 우리 집은 아침엔 마루가 햇빛으로 가득 차고 해 질 녘엔 부엌으로 노을이 쏟아져 들어온다. 몇 년째 '언젠간 꼭 이 노란빛을 찍어야지' 다짐만 하다가 드디어 성공했다. 매일 생활하는 공간인데, 심지어 매번 설거지 지옥에 빠지는 공간인데 이렇게 보니 또 아련하다. 지금도 뛰면 3초면 갈 수 있는 곳인데 이 찡한 느낌은 무엇이지? 뭐야, 왜 슬퍼지는 건데. 이것 역시 필름 카메라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시집간 사촌언니가 놀러 온 날. 임산부인 탓에 사람이 없는 공간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찾게 된 우리의 비밀 플레이스. (라고 하기엔 주민 모두가 아는 곳) 가족들도, 우리 강아지도 이 공간을 좋아한다.
나의 인생 절친들. 사촌 언니랑 동생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으려나 몰라. 세상에서 나의 역사를 가장 잘 알고, 오랫동안 함께 맞춰온 호흡이 그야말로 찰떡궁합인 이들. 꼭 이 둘만은 아니어도, 어떤 일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사는 건 순전히 우리 가족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11살이 된 토끼 아니고 꿈이. 어이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이면 밥도 알아서 먹고 양치도 스스로 하는 나이 아닌가? 아무것도 안 하려고 이렇게 귀엽게 태어났지? 흥 그래 대학생 되어 졸업할 나이까지 건강하게만 있어줘라 제발
오후 4시, 수원의 한 카페. 24시간 중 '아, 오늘 필카 가지고 나왔어야 하는데'라는 말을 가장 많이 뱉는 시간이 바로 이때 즈음이다. 슬슬 해가 넘어갈 채비를 하기 시작하는, 여름의 오후 6~8시와 겨울의 오후 4~6시. 누구는 이 시간을 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다는데 그 말은 너무 무섭고 나는 보통 '헐 노란 햇빛! 이건 찍어야 돼!'라고 한다. 프로이미지 탓인가 생각보다 노란 햇빛은 잘 담기지 않았지만, 이 풍경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던 순간을 생각하면, 필카의 존재 이유는 이미 충분하다.
나를 기쁘게 했던 이 카페 이름은 '정지영 커피 로스터즈'다. 행궁동 골목골목 예쁜 카페와 맛집들이 들어서게 되면서 이 일대가 '행리단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 첫 시작이 바로 이 카페라고 한다. 카페 입구에는 '행리단길의 시작이 되어주신 정지영 님께 감사합니다'라는 수원시장의 감사패가 붙어있다. 정지영 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지만 저 문구를 보고 감격해버렸다. 작은 카페 하나가 지역의 풍경을 아예 바꿔놓았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도 이렇게 기념비(?)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래서인지 커피나 빵의 맛보단 기념패의 문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물론 라떼와 빵은 게눈 감추듯 아주 맛있게 호로로록 했다)
합정의 한 카페에서 만난 무지개. 계산대 바로 앞에 있었지만 주문을 할 때도, 커피를 가지러 왔다 갔다 할 때도 발견하지 못했다. 핸드폰으로 땅바닥을 열심히 찍고 있던 여성분 덕분에 찾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땅바닥에도 이런 아름다움이 깃든다. 2021년은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 여기, 저기, 너도, 나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오래 바라봐야지. 그래야 아름다운 순간들을 더 많이 보고 간직할 수 있을 테니까.
누구든 그랬겠지만, 2020년은 정말 별일이 많은 해였다.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은 업종 중 하나여서 그런지 비교적 일찍 코로나의 영향을 실감했다. 좋아하는 회사 사람들을 잃고 내 일도 잃을 뻔했다. 이제 한숨 좀 돌리나 싶어질 때 쯤, 코로나의 마수는 다른 가족들과 주변인들에게까지 뻗쳐왔다.
반전의 반전의 반전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을 돌아보면 행복한 기억밖에 없다. 그럴 수 있음에 감사하다. 펜데믹 속에서도 그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환경에도 감사하고, 20대 초반과 다르게 이런 난리법석 속에서도 내 행복과 안위를 지킬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된 거 같아 특히 감사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행복의 방점이 오로지 나 자신에만 찍혀있었다는 것. 행복의 기준이 오로지 내 기분과 안위였다는 것. 20대 전체, 아니 태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쭉 그래왔던 것 같다. 이제 나도 멋 모르는 20대 아니라 멋 잘 아는 멋찐 30대니까. 앞으로는 화살표의 방향을 내 속이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돌려 놓아야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해야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많이 사랑하고 아껴줘야지. 이런 다짐을 하며 나의 20대는 쿨하게 보내줘야겠다. 안녕 잘 가. 고생 많았어. 오점도 있지만 그 순간에는 그게 나의 최선이었을 테니까. 그러니 미련 없이 떠나가렴! 기왕이면 코로나도 데려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