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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리 May 17. 2019

012. 책을 깨운 토요일 아침, 편지

영화 <로마>에 대하여 #천천히씁니다 #백편의에세이

희원님,


저는 오늘도 서점에 있습니다. 오늘은 토요일, 오후 열두 시를 조금 넘겼습니다. 아마 많은 이들이 늦잠을 자고 일어나 역시 늦은 아침을 먹고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른 아침, 서점원 뿐인 서점에서 책들을 깨웠습니다.


책을 깨우는 것은 얼핏 보면 서가를 보기 좋게 정리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제게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저의 역할은 그들에게 동일한 조건을 주는 거예요. 모두가 제대로 눈에 띄게 하는 거지요. 모두 잘 서 있는지, 한걸음 뒤로 빠져있는 책이 있다면 앞으로 당겨 모두 같은 선상에 세우고, 페이지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왜소한 책들은 두 권씩 꽂아두기도 해요. 다른 덩치 큰 책들에 이리저리 밀리지 않도록 이요.


서점에 있다 보면 감정은 대체로 단조롭지만, 전에 없던 감정이라면 책들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모습을 보면 위태로움과 의무감을 느낀달까요. 팔아야 하는 책을 다루면서 제 방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를 갖게 되었지요.


책들이 한쪽으로 쓰러져 있으면 키가 큰 책은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서로의 무게에 짓눌려 어딘가 상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럼 저게 저 모양이라 안 팔리면 어쩌나. 저걸 그냥 두고 보는 나의 직무유기가 저 책을 더 망가뜨리겠지. 하면서 팔을 걷어붙인답니다. 책의 입장이야 모를 일이지만, 피동의 시간을 지나는 것들에겐 관리인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모든 물건이 그렇듯 손때가 묻고 어딘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잖아요. 하지만 이곳 서점에서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책들은 강제로 연약한 상태에 머물러야만 해요. 서점원들은 그 상태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지요.


새것인 것. 이곳에서는 연약한 것과 거의 같은 거예요. 새것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조건이 많이 붙으니까요. 언젠가 이 책들이 누군가를 만나 이곳저곳이 닳고 접히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또 다르게 닳는 과정을 거치면 그것이야 말로 책으로써 온전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겠지요. 매일 보이던 책이 어느 날 갑자기 안 보이면 슬쩍 기쁜 마음도 든답니다. 주인을 만났구나. 이제 정말 책으로 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요.


선택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는 건 우리를 참 연약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달리 생각해 ‘외면당한다는 것’은 곧 ‘선택받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접어들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며 영화 <로마> 속 클레오의 쉽지 않았던 삶에 대해 이야기해봅니다.


클레오가 연락 두절된 남자 친구를 찾아갔던 운동장에서 기인의 행동을 좇아 눈을 감고, 한쪽 다리와 두 팔을 들었던 장면을 기억하세요? 다른 이들은 모두 이리저리 비틀거리고 넘어지는데 클레오 혼자만 그 자리에 나무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어요. 저는 한 발로 선 채 흔들림 없는 클레오를 보고서야 그에 대해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답니다. 이런 오해를 했지요. 익숙한 것이라곤 지명뿐인 이국땅 ‘로마’의, 역시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그리기 위해 클레오라는 비운의 여인이 동원된 것은 아닐까. 희원님께서 편지에도 적어주셨듯 우리는 남자 감독이 그린 여성 서사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으니까요.


관객인 우리는 극 중 인물보다 먼저 그들의 불운을 알아차립니다. 그토록 어렵게 남자 친구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이미 우린 알았어요. 아니 어쩌면 발가벗은 채 무술을 선보이던 클레오의 남자 친구를 보았을 때부터였는지도 몰라요.


클레오는 백인 가정의 가정부로 주인의 기분에 따라 귀한 존재가 되기도, 화받이가 되기도 하고 소수의 언어로 이야기하고(그 언어는 비밀과 불안을 털어놓을 때 쓰는 낯선 소리였지요.) 연인의 아이를 뱃속에 품은 채 그로부터 외면당한 여인이었지요.


그러나 모래바람 이는 운동장에서 ‘혼자 꼿꼿한’ 클레오의 모습을 본 후 저의 오해는 사라졌어요. 이 영화는 클레오의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라는 것을, 환경과 역사의 풍파에 휩쓸리기만 했던 피동의 존재가 아니라, 비록 다량의 말을 잃었을지언정 아픔을 딛고 살아간 클레오라는 개인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 장면은, 그러니까 영화가 비로소 클레오라는 여인에게 주인공성을 부여한 거지요. 점을 찍어준 거예요. 이건 카메라 속 클레오가 담긴 시간의 비례함때문도, 영화의 문을 여는 이가 다름 아닌 클레오이기 때문도 아니에요.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영화라고 하지요. 뭘 잘 몰랐던 어린 시절, 지나고 보니 너무도 또렷하게 남는 존재가 누구에게나 한 명쯤은 있나 봅니다. 감독에게는 클레오라는 여인이 잊을 수 없는 존재였던가 봐요. 감독이 실제로 클레오의 삶 일거수일투족을 목격하고 만든 영화가 아닐 텐데도, 영화 속에서 클레오가 나무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어쩌면 클레오에 대한 감독의 조심스러운 해석이 아닐까요. 그리고 영화는 ‘내게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답니다. 앞으로도 나는 당신을 이런 사람으로 기억할 거예요.’라고 감독 개인이 클레오에게 뒤늦게 전하는 감사이자 선언 같은 게 아닐는지.


우리는 저 말들을 누구에게 전할 수 있을까요. 뇌의 주름을 가르고, 순순히 흘러가는 기억을 뒤돌게 만드는 사람. 미처 몰랐던 슬픔과 기쁨에 기꺼이 동참하고픈 사람. 제게 이 영화는 그런 사람을 떠올리게 하네요.


답장이 조금 늦었지요.

바빴는데요, 틈틈이 편지를 적는 시간이 제게는 휴식이었습니다.

곧 다시 봐요.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겠어요.


2019년 1월 19일 토요일

이은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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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저의 친구 백희원님과 제가 매달 한 편의 영화를 함께 감상한 후 편지를 주고받기로 한 후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희원님의 동의를 구하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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