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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리 May 09. 2019

011.전해지지 않을 편지, 1호

#백편의에세이 #천천히씁니다

아빠는 내 눈썹이 초승달 같다고 했었는데. 요즘은 一 자 눈썹이 유행이래요, 그래야 더 어려 보인다나. 눈썹도 컸어요. 모질어졌어요. 그래도 나, 내 눈썹을 달고 살아. 아빠가 예쁘다고 해서.


아빠의 사과 농사는 끝이 났나요? 아빠의 농장에는 여전히 사과가 열리는 것은 아닌지. 그 농사를 끝끝내 놓지 못하고 올해 여름도 까맣게 그을린 채 점점 말라가길 준비하는 것은 아닌지.


돈이 없어서 어떡해?

얘 그래도 사과 판 돈으로 느이 엄마 맛있는 건 사줘.

우리의 농담은 갈수록 쓰네요. 우리의 웃음은 아직 먹을 만하고요.


아빠가 하늘과 동업한다고 했을 때 아빠는 하늘과 친하지 않잖아요 이 말을 안 한 것은 내가 가장 잘한 일이에요. 사과 농사를 그만두는 날, 전화 한통 하지 않은 것은 내가 가장 못 한 일이에요.


그래도 나. 과일들이 시체처럼 누워있는 걸 본 후 땅에서 나는 건 값을 깎지 않아요. 갓길에 세워진 복숭아 떨이 장수를 보고 ‘사과는 저장이라도 하지, 저 복숭아는 어쩌나.’ 우리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아빠. 나는 서른을 훌쩍 넘은 남자들을 보면서 아빠의 서른을 골라 먹어요. 바람에 날리게 내버려 둔 새까만 머리카락, 오직 자신만 키워본 손, 아직 부끄러워할 줄 아는 얼굴, 미처 굳지 않은 미소, 거듭 신랄한 입술, 뒤로 물러나지 않는 눈동자, 눈동자! 그들은 알기나 알까요. 어린 자신의 시퍼런 생기가 배신을 준비하는 이야기. 그 사실을 자기만 모르는 이야기.


나는 당신의 서른 살 무렵에 가서 살아요. 거기에 무슨 미움이 있나요. 꽃구경을 가는데. 바람을 맞는데. 음식을 나눠 먹는데. 술도 한잔 걸치는데. 담배도 배우는데. 하염없이 밤길을 걷는데. 거기에 무슨 미움이 있나요.

우리가 친구로 만났다면 나는 당신의 얼굴을 읽고 목소리를 담고 말을 삼가고 손가락을 훔쳐봤겠지요.


들끓는 미움을 산채로 땅에 묻으려고 했었어요. 그럼 나는 허공에서 자란 머리카락이 되었지요.


미친년처럼 강 속을 뒹굴다 새까맣게 탄 돌덩이를 삼켰어요. 내 뱃가죽에 돌덩이가 쌓이면 가장 무거운 것, 만져지지 않도록 맨질한 것을 골라 잠든 당신의 이마에 하나. 팔목에 둘. 목젖에 하나. 명치 위에 하나. 무릎에 둘. 발끝에 하나씩. 당신의 가장자리마다 공들여 돌을 세웠어요. 당신의 맹세를 찾아 헤매다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고 싶다던 당신을 마주치면 내 두 무릎뼈를 꺼내 먹였지요.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면서.


지난겨울 들여놓은 동백꽃나무는 나 너랑 못 살겠다 밤새 내 귀에 속삭이다 이제는 새싹도 내놓지 않아요. 죽어서까지 아빠 말이 맞는다고 우겨요.

그래도 이제는요. 키우는 나무가 모조리 죽어버려도 아빠 말이 틀리지 않았으면 해요. 우리는 하늘에 낚싯줄을 내리는 부녀니까요. 뜬구름은 우리의 양식이니까요.


아빠가 다 가져가세요.

그럼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될게요.


-2019년 어버이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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