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편의에세이 #천천히씁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 아이를 번번이 꿔다 쓴 게 언제부터였는지.
내게는 오랜 친구가 있다. 대학에서 처음 만나 벌써 햇수로 15년이나 묵었다. 건축과 동기인 우리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숱하게 밤을 지새웠다. 처음으로 우리가 같은 팀을 이루었던 것은 20세기 거장들의 대표작을 리모델링하는 과제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 하는 말이지만, 1학년 학부생에게 말도 안 되게 과분한 과제였다. 차라리 개집을 짓지.) 우리는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를 선택했다. 고작 1학년 학부생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가 건축사에 어떤 의미인지 알게 뭔가. 남길 것과 없앨 것을 제대로 구분할 리 없었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아마도, 우리가 그 작품을 지나치게 거침없이 뜯어고쳤던 것처럼 보였던가보다. 교수님의 크리틱을 받았는데, 친구가 용케도 교수님의 노트에 적힌 메모를 보고와 일러주었다.
‘교수님 노트에 뭐라고 적혀있는 줄 알아? 우리 개념 X(알파벳 엑스)래!’
우리는 정말 속상했지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무지 열심히 했는데 개념이 없대, 개념이 없는 게 무슨 말이야? 버릇이 없다는 말인가?’ 하며 씁쓸해하다가 박장대소했다. 만약 혼자였다면 도서관이나 자취방에 틀어박혀 다음 크리틱을 밤새워 준비했겠지. 무슨 큰 일이라도 생긴마냥.
그날 나의 실패는 우리가 우리로 묶여서 작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아마 내가 나의 친구를 꿔다 쓴 것은 이게 처음이었지 싶다.
쓰다 만 공책, 읽다 만 책, 마시다 만 물까지 일제히 나를 비난했다. 끝끝내 결말을 내지 못한 영화처럼 미약한 내가 나를 몰아세울 때, 내 친구는 과정을 가꿨다. 돌고 돌면 좀 어때, 결과 좀 못 보면 어때. 저 끝이 뭐든 관심 없다는 듯. 내 친구는 나의 과정을 빠짐없이 신뢰했다.
사람들에게 나는, 급출발과 급정거를 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여전할지도 모른다. 내 부모와 형제 조차 날 이해하지 못했다. 조바심이 원동력이 되어 빠르게 올라타서는 자기 신뢰라는 연료 부족으로 빠르게 내렸다. 내 친구는 내 출발과 멈춤의 역사를 알았다. 나조차 나의 출발을 미심쩍어할 때, 친구는 언제나 자기 엄지를 아끼지 않고 치켜올렸다. 그걸 배워서 나도 그에게 내 엄지를 아끼지 않는다.
친구가 디자인 에이전시에 들어가 일하면서 일이 고되고 괴로워서 몸이 많이 상했던 것을 알고, 그 힘들다는 디자인 업계에서 경력을 쌓아 올려 결국 프리랜서로 심심치 않게 일을 해온 것을 봤지만, 돌연 지금의 남편을 만나 규모도 작지 않은 레스토랑의 사장이 되었다. 남편의 오랜 꿈에 기꺼이 올라타서 그 꿈에 자신의 꿈을 섞은 것이다. 얼마큼 사랑하면 그게 되느냐고 묻는 것은 그의 결정을 과소평가한 질문이었다. 꿈에 꿈을 얹는 것은 사랑을 뛰어넘는 일이니까. 어느 소설가가 그랬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과대평가한다고.
내게는 죽음을 엿보는 오랜 말버릇이 있다. 매일 한 번씩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는 말이 나를 값싸게 만들었다. 네가 그렇지, 이거 하나 못해, 무능해, 넌 항상 니 주제를 모르고 헤매지. 이런 말들이 사라짐에 대한 갈망이 되고, 몸이 공기 중에 날려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갈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친구는 말을 참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에게 말의 정원이 있다면 아주 잘 핀 꽃과 나무가 무성할 것이다.
대학생 시절, 그와 내가 싸운 것은 모두 말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넌 어쩜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느냐고. 내가 그에게 들은 원망은 모두 나의 말 때문이었다.
내 머릿속은 유독 또렷하게 비난의 방향으로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을 뒤덮고 다른 길을 만드는 것이 내 인생의 크나큰 목표가 된 후, 나에겐 내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생겼다.
나는 종종 갚지도 못할 내 친구를 꿔왔다. 어쩌면 장사 준비를 하고 있을 친구, 몰아닥친 저녁 손님들로 정신없이 바쁠 친구, 남편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을지도 모를 친구를 깨워다가 두 개의 의자가 놓인 빈 방, 내 이름표가 붙어있는 자리에 친구를 앉혔다. 그리고 그에게 방금 내가 나에게 한 말을 다시 뱉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면 내가 방금 내게 한 말이 뿌리째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아는 줄로 믿었던 것을 실은 모른 채 살았다.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로새겨진 줄로 착각하고, 새겨진 그것이 즉각 내 입술과 혀 끝을 움직일 정도로 강력한 줄로 착각하면서. 나는 머리로 아는 지식이 내 혀끝을 움직이게 하는 길고 긴 여정이 얼마나 고된지 이제야 안다. 나는 염치 불고하고 그 여정에 친구를 통째로 꿔다가 내 여비 삼았다. 그래서인지 말이 조금씩 고와지는 것 같다.
그는 나의 유일한 돌, 적막과 사랑을 철마다 갈아 끼우고 그것을 눈물로 흠뻑 적실 줄 아는 이. 언제나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되는 사람. 실은 내가 가장 조심하는 사람.
사랑과 달리 우정은 과소평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