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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리 Mar 13. 2019

009.벽의 의무

#백편의에세이 #천천히씁니다 #이모리

성수동 자취방으로 이사하던 날. 짐이 가득 담긴 박스를 들고 계단을 막 오르려는데 계단 맞은편에서 누군가 내려오고 있었다. 장애가 있어 걸음이 불편한 여성이 아주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무거운 상자를 들고 있던 나는 그 순간 조금 더 지쳤다. 창틀에 짐 상자를 걸쳐 놓고는 그가 계단을 다 내려오길 기다렸다. 내가 그를 보고 있으면 그가 조급할 것 같아 고개는 창밖을 본채였다. 그게 옆집 여자와의 첫 대면이었다. 


낮에는 이삿짐을 나르고, 해가 지고 나서야 짐 상자를 열어 정리했다. 욕실에 샴푸며 세면도구를 정리하는데 별안간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이 방엔 나 혼자인데 들려오는 목소리가 생생했다. 옆집 소리가 새어든 것이었다. 발음이 어눌한 여자. 아마도 낮에 마주쳤던 그 사람인 것 같았다. 방을 보러 왔던 날은 쥐 죽은 듯 조용했는데. 옆집 사는 사람과 오줌 누는 소리도 공유할 판이라니 난감하기도 하고 화도 좀 났다.


아빠는 애초부터 반대했었다. 이 건물은 사람더러 ‘살라고’ 지은 건물이 아니라나? 아빠는 옆 옆 블록에 있는 방 두 칸짜리 빌라가 애당초 주거 용도로 지은 건물이니 그쪽이 사람 살기에 적합한 건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빌라는 바로 옆에 건물이 붙어 있어 빛도 잘 들지 않았을뿐더러 1층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빠가 도시에서 혼자 사는 여자의 불안을 알리 없었다. 도시에서 여자 혼자 살려면 무엇보다 안전, 안전, 안전. 그러니 접근이 용이한 1층은 부적합한 곳이라는 것을 아빠는 몰랐다. 1층이라면 분명 창문도 제대로 열어 두지 못할 테고, 특히 밤에 귀가하는 날이면 고층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조심스러울 것이다. 침입하기가 훨씬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아빠의 말도 일리가 있긴 했다. 내가 세든 건물 1층에는 인쇄소가 있어서 아침 아홉 시가 되면 어김없이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이 아니라 육중한 기계가 연신 무언가를 내리찍어서 몸으로 느껴지는 진동 때문에 잠에서 깨곤 했다. 지하에는 신발 창고가 있었는데 건물에 들어서면 고무 냄새와 본드 냄새가 진동했고, 짐을 나르는 사람들이 드나들며 대부분의 낮시간에 분주했다. 계단과 복도에는 먼지가 잘 쌓이는 데다 복도 바닥은 둘로 나뉘어 한쪽엔 시멘트 마감이, 다른 한쪽엔 화강석 타일이 깔려있었다. 마치 다른 곳에 있던 건물의 반쪽을 가져다 붙여 놓은 것처럼. ‘건물이 이렇게도 허술할 수 있구나.’했다.


하지만 이런 건 살다 보니 괜찮아졌다. 내가 일할 때 그들도 일을 했고, 철야하는 일도 없었으니 퇴근 후엔 아주 조용했다. 게다가 이 방엔 베란다가 있었고, 베란다와 방 사이에는 나무 창틀로 된 커다란 창이 있었는데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이 중간 창을 지나면서 은은하게 부서지는 게 좋았다. 크기도 좋았다. 서울의 월세방은 언제나 내가 가진 짐에 비해 면적이 충분치 않은데, 이 방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회사와도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어서 누군가를 마주칠 염려는 거의 없었다. 고민 끝에 이 방에서 지내보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이 방이 좋았다. 방음이 허술하다는 문제를 알기 전까지는. 


생활 소음은 까다롭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알게 되고,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알리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 도시 속 뜨내기들의 아주 애매한 관계, ‘나도 그들을 알고 그들도 나를 알지만, 아는 척할 사이도 아니고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관계’ 안에서 생활 소음은 두고두고 신경 쓰이는 일이다. 자연스럽게 옆집과는 심적, 물리적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하고,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옆집에는 모녀가 사는 것 같았다. 옆집 여자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고, 여자의 어머니일지도 모르는 중년의 여자가 매일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면 한동안 고요한 채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는 노래 취향이 확고했다. 스트리밍으로 100곡, 1000곡도 들을 수 있는 세상에 비틀즈의 노래 중에서도 <렛 잇 비>만, 어쩌다가 한 번씩 사이먼 앤 가펑클의 <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를 들었다. 이 세상에 그 노래 말고 다른 노래는 없는 것처럼, 다른 곡은 듣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처음 몇 달은 괜찮았다. 오랜만에 비틀즈라니 반갑기도 했다. 그러다 차츰 괴로워졌다. 사람에겐 고통 그 자체보다 이유 없는 고통이 견디기 어려운 법. 나는 옆집 여자가 같은 노래를 이토록 집요하게 반복해서 듣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했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쓴다면 주야장천 한 곡만 듣지 않을 거야. 사람이라면 그럴 거야. 왜냐면 본전 생각이 나기 때문이지. 애당초 여자에게 주어진 데이터가 한정적이지 않고서야 이렇게 한 곡만 무한 반복할 리가 없어. mp3에 단 몇 곡뿐인 건 아닐까? 아니면 CD나 카세트테이프로 무한 반복하는 것일지도 몰라. 하지만 카세트테이프는 아닐 거야. 이렇게 반복할 수 있는 카세트테이프는 없어. 어쩌다 재생된 다른 곡들도 ‘그 시절 추억의 팝송’인 걸 보면, 한때 지하철에서 팔았던 <팝 명곡 top 50> 같은 거 아닐까. 그것도 단 한 장. 그것도 아니라면 CD플레이어가 한 곡 반복 버튼이 눌린 채로 고장 났을까? 아니면 혹시.. 극심한 짝사랑 때문인가? 사랑은 사람을 열성적 이게도 하니까. 아주아주 소중한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일지도 몰라. 그것도 아니면.. 내가 뭘 잘못했나? 이사 첫날 내가 그에게 인사하지 않아서? 그래, 그건 내가 잘못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요즘은 <렛 잇 고>도 있다고!’


나는 결국 <렛 잇 비>의 후유증을 앓았다. <렛 잇 비>는 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간주의 기타 소리는 듣고 있지 않아도 들렸다. 그러나 <렛 잇 비>를 들으며 누군가에게 적대감을 품기란 쉽지 않은 일. 비틀즈는 내게 관대함을 알려주었다.


여자는 대체로 명랑했다. 어떤 때는 친구와 스피커폰을 켜고 통화도 했는데 친구의 썸남에 대해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때론 흉도 함께 봐주었다. 공들여 내뱉은 말들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가진 편견에 놀랐다. 그의 삶과 나의 삶이 크게 다를 거라는 생각. 그의 삶은 마치 끝나지 않는 터널처럼 길고 외롭기만 할 거라는 생각. 

그러나 그도 친구의 하소연을 들어주느라 한 시간씩 통화하는 여자라는 걸, 깔깔 웃는 여자라는 걸. 비로소 그의 옆집에 살며 알게 되었다. 


여자가 <렛 잇 비>를 듣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다른 노래를 들었냐면, 아니. 울었다. 그의 울음소리가 어떤 맥락으로 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울음은 언제나 적막 속에 시작되었다.

이 집에 이사와 처음으로 그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남몰래 우는 사람을 발견한 사람의 마음이 되어 그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애쓴 날도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 서있는 벽이 그의 소리와 나의 소리를 잘 먹어치워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이 벽은 일관되게 헐렁하니까 그의 울음소리에 반응하는 내 소리도 전할 게 뻔했다. 그래서 그가 울면 더욱 조심했다.


그의 울음소리엔 성인의 울음소리에 있을 법한 숨죽임, 부끄러움, 구김 따위가 없었다. 방 한 칸을 울음소리로 채워보겠다는 듯, 그렇게 울어야 내일을 살 수 있으리란 듯이 언제나 제대로 소리 내어 울었고 그렇게 제 안의 찌꺼기들을 빠짐없이 흘려보냈다. 그의 울음소리가 눈에 보인다면, 다림질한 새파란 천이 계단을 지나 밖까지 늘어진 형상일 것이라고. 나는 그의 울음소리를 그렇게 상상했다. 

그가 울음을 그친 뒤 다시 그를 쫓아다니는 소리들-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발걸음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을 들으면, 나로서도 알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명치부터 묘한 열망 같은 것이 차올라 넘을 듯 말 듯 찰랑거렸다. 그것은 ‘되살아남’에 대한 박수. 무관심 속에서 낡아가는 삶을 이리저리 굴려보겠다는 다짐, 운동장 이쪽 끝에서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저 끝까지 가보겠다는 선언. 그런 것들과 비슷했다.  


열망이 피어오르는 한편, 정신적으로는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마음을 쓴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뜻하지 않은 소음 때문에 내 감정은 단 한 번 마주친 사람에게까지 뻗어갔다. 옆집 여자가 대낮에 방 한가득 풀어놓은 슬픔의 증인이 되어, 하루하루 두터워진 슬픔의 세계를 버거워했다.

집에는 사람과 함께 내밀한 소리들이 산다. 그 소리들을 죽이지 않아도 집을 둘러싼 벽 안에서 가장 안전하게 나의 모든 것이 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오밀조밀 모여 사는 도시의 집들은 허술하고 무심하게 지어져서는 안 된다. 집을 이루는 벽들은 그것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 당시 나는 그런 마음이었다. 벽이 된 마음. 


아직 봄이 다 오지 않아 쌀쌀했던 어느 오후, 옆집 여자가 건물 현관 앞에 앉아 있었다. 외투도 없이 빨간색 스웨터 차림이었던 여자는 아직 입김이 나오도록 추운데도 차디찬 돌바닥에 앉아 햇빛을 쐬고 있었다.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수많은 질문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내가 문을 열려고 다가서자 그는 자리에 앉은 채로 몸을 한쪽으로 기울여 문을 열 수 있게 최소한의 자리를 내주었다. 


뜻밖의 재회였다. 나는 여자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발걸음은 그를 지나쳐 저벅저벅 계단으로 향했다. 다시 돌아가 쌓인 말들을 해볼까. 당신이 우는 소리 때문에 내가 괴롭다고. 난 당신의 사생활, 특히 당신의 슬픔을 알고 싶지 않다고. 내 귓구멍에서 모든 공기를 빼내고, 순식간에 얼려서 당신의 눈 앞에 와장창 깨뜨려버리고 싶을 만큼 괴롭다고. 그러니 제발 그만 울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하지 못했다.


집이란 각자에게 하나뿐이니까. 산속 짐승이 험난한 비탈에서 구르고 발을 삐끗하고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 하루치 힘을 모두 써버렸을 때,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웅크리고 상처를 핥아대듯이. 어떤 이에게 집이란 여러 가지 일들로 지친 몸과 마음에 하루치 힘을 비축할 수 있는 안전한 동굴이며, 먹고 자고 ‘때로 울기도 하는’ 유일한 사적 공간이니까.  


소리로나마 그의 생활을 엿본 나로서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대부분의 시간에 집에 머무른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 ‘갈 수가 없다’는 말은 ‘갈 데가 없다’는 말과 같은 게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 집은 나에게도 유일하지만, 어쩌면 집 외에 대안적 공간이 거의 없는 그에게는 더 간절한 장소일 것이고, 나의 조심해달라는 당부가 그에겐 또 다른 금지와 한계가 될 터였다. 그러니 나는 말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그의 소리와 나의 소리는 사귀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엉켜 지냈다. 당시 나는 직장을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하루하루 긴장도 높은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교제하던 사람과의 사이는 점점 나빠져만 갔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몹쓸 자격지심과 위축감이 커갔고, 나는 그 모습을 격려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그는 내 모습에 많이 당황했고, 종종 만취한 채 밤늦은 시각에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가 복도와 계단실을 쾅쾅 울렸다. 그럴 때면 나는 그를 격렬하게 미워했다. 힘든 하루를 보낸 날은 그 사람의 무례함때문에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피차 괴로운 상황이 반복되자,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혼자 훌쩍인 날들도 지나고, 분주한 날들도 지나간 어느 날, 퇴근해 집에 돌아오니 건물 앞에는 버려진 가구들과 쓰레기봉투가 잔뜩 놓여있었다. 누군가 이사 간 것이었다. 복도부터 소란스럽더니 옆집에서는 낯선 남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늦겨울의 만남은 우리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대면이 되었다. 그는 몰랐겠지만 혼자서 감정을 뻗어갔던 나로선 허전하고, 심지어 서운하기까지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용기를 내볼 걸. 그랬다면, 어쩌면. 우리는 다른 노래를 들을 수 있었을까. 그는 덜 울 수 있었을까. 아니면 어색해졌을까. 열어보지 않은 미래엔 무엇이 적혀있었을까. 


다음날 아침, 옆집 남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방바닥에 조각보만 한 햇빛이 떨어졌다. 옆집 여자의 <렛 잇 비>는 끝났다. 


나는 종종 궁금하다. 요즘도 엄마 모르게 열심히 우는지, 여전히 고집스럽게 <렛 잇 비>만 듣는지. 당신의 눈물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지. 자유에 관한 것이었는지. 당신의 세계가 축소되는 악몽을 꾼 것이었는지. 


요령이 없어서 쉬이 지치고, 가끔은 사라지고 싶을 때 옆 방에 있는 당신이 가열하게 울어서 그 소리에 잠깐 숨을 수 있었다. 우린 모두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당신과 내가 이 벽을 사이에 둔 채 함께 울었다. 당신도 구태여 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무례함이나 뻔뻔함이 아니라 어쩔 도리가 없이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나는 당신을 잘 몰랐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우는 이유를 내가 아주 모르는 것 같지 않았다. 우린 모두 울고 싶을 때가 있고 울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자신의 낮을 슬픔으로 채우는 것이 내가 나의 낮을 여러 개의 사정으로 채우는 일보다 못한 일이 아니고, 당신이 외출하지 않는 날이 내가 나의 의무로 외출하는 날보다 못한 일이 아니다. 당신이 나보다 더 서럽지 않고, 내가 당신보다 더 괴롭지 않다. 우리는 서로 혼자였지만, 우리의 슬픔은 짝을 지었다. 


신나게 울던 당신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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